71화. < Chapter 14. 대야장의 손녀 - 2 >
“반했냐? 반했구나. 역시 이 녀석 앞에선 너도 어쩔 수 없군. 뇌제가 알면 무척 재밌겠어.”
뜻밖의 만남에 강신혁이 잠시 얼을 타고 있자니 뒤에 앉아있던 이만우가 강신혁이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히죽거리며 말했다.
전면의 소녀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 그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신혁은 머쓱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아, 선생님. 계셨구나. 전 사실 선생님이 여태까지 할아버지 가죽을 뒤집어쓰고 연기하던 미녀인 줄 알고 긴장했어요.”
“……네놈 요즘 슬슬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강신혁의 농담에 이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선 방치한 후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학과의 교복, 2학년을 나타내는 파란색의 넥타이. 건강하게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에 잔잔하게 흐르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은발,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까지. 강신혁은 분명히 이 사람…… 아니 선배를 만난 기억이 있었다. 비룡관 앞에서.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기억하고 있었네. ……빚은 어떻게 됐어?”
빚? 아, 그래. 그때 분명 그런 얘기를 했었다. 동아리에 관해 백인하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때 우연히 지나가던 이 사람이 그에게 괜히 진지한 목소리로 빚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여기 계신 이만우 선생님 덕에 어떻게 빚은 안 지고 끝났어요.”
“그래? 나는 매몰차게 쫓아냈었는데. 능력 없는 손녀보다 결국은 망치를 잡는 장인을 더 챙긴다 이거지.”
“그 얘긴 이미 전에 충분히 했었다만.”
그녀는 은근히 차갑게 들리는 말을 하며 이만우를 쏘아보았다. 이만우 역시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고…… 그런데 잠깐. 손녀? 강신혁이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잽싸게 말했다.
“친할아버지.”
“그렇구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하셨었죠……."
“정말 기억력 좋네. 아님? 날 여태 신경 쓰고 있었나?”
"음......."
우연히 그 사실을 떠올렸을 뿐인데.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맞은편 책상을 두드렸다. 서 있지 말고 앉으라는 제스처.
그리곤 강신혁이 순순히 거기에 따르자 피식 웃었다.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여자가 흔히 짓는 표정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무척 예쁘지만 동시에 약삭빠르고 재수 없는 표정이다.
- 후, 세상엔 불여우가 정말 많군요.
‘기본적인 교섭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교섭.’
아니나 다를까 아까와 마찬가지로 분노하는 관리자를 진정시키며 강신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이만우를 향해서였다.
“이 선배가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인챈터죠?”
“눈치 하나는 빠르군.”
“본인이 직접 쫓겨났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외에 있겠어요?”
"끙……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녀석 이름은 이나희다. 장담컨대 같은 나이대에선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뒤져봐도 녀석보다 나은 인챈터는 없을 거다.”
“대야장의 손녀가 천재 인챈터라고 하니 뭔가 납득이 가긴 하네요.”
“그놈의 대야장 소리 좀 하지 마라. 네게 들으니 무슨 놀림이라도 받는 것 같다.”
이만우는 강신혁을 굉장히 높게 사고 있었다.
강신혁이 그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짓는 반면 이나희는 그녀와 친하지 않은 강신혁이라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그를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가 그렇게 대단해? 다 포기했던 할아버지가 다시 망치를 잡게 할 만큼?”
“내가 다시 잡은 게 아니다. 이 녀석을 조금 도와줄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그리고 학교에선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퇴직하겠다던 양반이 무슨 선생님.”
강신혁은 눈앞에서 티격태격 대는 조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평범한 조손관계란 이런 것이겠지. 허구헌날 혀 짧은 목소리로 할부지라고 부르며 찰싹 달라붙어서 애교를 피우는 연상의 손녀는 정상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만우와의 얘기를 마친 이나희가 강신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7월에 열리는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아티팩트 경연대회에 참가한다면서.”
“네."
“그럼 슬슬 보여 봐. 얼마나 네 능력이 대단한 건지 내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강신혁은 이나희 대신 이만우를 바라보았다. 이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 대한 얘기는 예전부터 몇 번 했다만…… 아무래도 마력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에이라이트로 아티팩트를 만들었다는 얘기에 크게 흥미를 가진 것 같더군. 그러니 보여줘라. 이 녀석에게도 세상이 넓다는 걸 한 번쯤은 알려줘야지.”
"음."
강신혁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나희는 미모뿐만 아니라 인챈터로서의 능력도 제법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대단한 인재가 그를 도와준다면 보다 대단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것도 꿈은 아닐 터. 강신혁에겐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아티팩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집 같은 것은 없었다. 하물며 동아리의 존속이 걸린 경연에 혹시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네가 만든 아티팩트가 에이라이트라는 점이다. 마나를 튕겨내는 창에는 추가 인챈트가 힘들 테니……. 합작은 앞으로 차차 하면 좋을 문제이긴 하다만.”
“누가 동아리에 돌아오기는 한데? 물건이 마음에 안 들면 어림도 없어.”
까칠하게 말하는 손녀에게 이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애가 달아서는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던 게 누구냐.”
“대야장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건방진 놈이 누군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가진 사람은 모른다니까!”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지만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 진짜 재수 없으니까 하지 마.”
강신혁은 눈을 돌렸다. 뭐 가족과 있을 땐 성격이 달라지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니까. 뜻하지 않게 신은아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져버리고 말았다.
“여기 있어요.”
“아."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버리듯 앞으로 나서며 에이라이트로 만든 단창, 즉 [파마의 단창(B-)]을 내밀었다.
“……방금 그거 어디서 나왔어?”
“아공간 아티팩트를 지원받았거든요.”
거짓말도 하면 느는 법이다. 더글러스 페인이 아공간 아티팩트를 다루는 모습을 보며 이 정도는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강신혁은 시치미를 뚝 떼며 그렇게 둘러댔다. 하지만 이나희는 그 말에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얘 어디 거대 재벌 후계자야?”
“그건 아니지만 뇌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우와……."
이나희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오해란 탄생하는 것인가. 강신혁은 이만우를 째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래, 정정하마. 뇌제가 일방적으로 이 녀석에게 매달리고 있다.”
“우와아……."
이나희의 표정이 더욱 심해졌다. 실로 악질적인 점은 뉘앙스는 다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시 단창을 내밀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까 보기나 하세요.”
“그 뇌제가 1학년생한테 말이지, 하긴 실습 감독을 한다고 할 때부터 수상하더라니…… 아, 그래. 흠……."
이나희는 난데없이 날아든 뇌제의 봄바람 소식에 웃음을 짓다 말고 창을 받아들었다.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단창은 디자인은 심플했으나 어느 한 군데 흠을 잡기 힘들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그녀는 창을 받아들자마자 감탄사를 내더니 진지한 표정을 짓고 그것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으으으음…… 응……?”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겉모습만 봐선 무기와 연관이 없을 것처럼 생긴 소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무기를 감정하는 모습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만 단창을 살피는 그녀의 진지한 눈만 봐도 그녀가 장인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의 할아버지 이만우가 감정을 할 때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잠깐만. 이거. 이거 뭐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표정은 곧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이만우를 노려보았다. 이만우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알고 있었구나.”
“당연히 알고 있었지. 네게 감정 기술을 가르쳐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도 잘했다. 이걸 알아낼 정도가 되었으니 감정에 대해선 더 가르쳐줄 게 없겠어.”
“어, 어떻게 이런…… 이거, 이거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지금 눈앞에 있지 않냐.”
“아냐, 말도 안돼. 말도……."
지금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람. 알맹이만 쏙 빼놓고 얘기하는 두 조손을 보며 강신혁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뭐가 말도 안 되는데요?”
“너……."
이번엔 강신혁을 째려보는 이나희. 그러던 중 곧 뭔가를 깨달았는지 그녀의 큰 두 눈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러고 보면 너, 분명 마나를 못 다룬다고 했었지……."
“응? 그 얘기가 왜 나와요?”
“그렇구나.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아니 그래도 말도 안 되잖아. 신인왕이잖아? 당연히 이젠 마나를 다루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아아아아.”
이나희가 창을 내려놓고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혹시 파마의 단창에 추가로 광화 효과라도 걸려 있었던가? 강신혁이 의아해하며 창을 회수하는데, 그녀가 대뜸 폭탄을 터트렸다.
“너 여전히 마나 못 다루지?”
“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그 창에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네…… 아? 에이라이트 재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마나를 튕겨내는 에이라이트가 됐든 뭐가 됐든, 세상 모든 아티팩트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 아티팩트에는 마나가 없다고!”
기어이 그녀가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강신혁은 뺨을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야금술만으로 만든 아티팩트는 모두 이렇게 되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야금술만으로 만들어낸 아티팩트에는 절로 마나가 깃들지. 아티팩트가 되었음에도 마나를 품고 있지 않은 것은 지극히 이질적인 일이다.”
이만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강신혁은 그 말을 들으며 해머로 자신의 머리통을 내려찍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만우가 처음부터 그의 능력에 경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아티팩트는 없어. 아마도 네가 만든 거 말고는 하나도 없다고. 대체 기원도 뭔지 알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는 이런 기적적인 아티팩트는……."
이나희가 말했다.
“만약 여기에 마나로 인챈트를 더할 수 있다면…… 그건 ‘강화 인챈트’가 아닌 ‘다중 인챈트’가 돼. 외발자전거는 바퀴가 아무리 커봤자 외발이지만 두발자전거는 외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잖아. 이해 가지?”
“굉장히 직관적인 설명이구나.”
“할아버진 조용히 해. 강신혁이라고 했지? 너 똑똑히 들어. 네 능력으로 모든 아티팩트 제작자들이 꿈에도 그리던, 신의 영역에 도전 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상상이 가?”
사실 별로 감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무수한 세상의 대장장이를 놔두고 모루가 전 차원에서 가장 위대한 대장장이로 꼽혔는지는 대충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영력을 다루는 대장장이는 매우 귀하다고 말씀드렸었죠.
관리자가 으쓱해져 끼어들었다.
- 단언컨대 회원님은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품은 대장장이입니다. 다른 회원들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히어로 유니버스의 그 누구도 회원님에 비하면 별 볼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띄워요. 어지러워 죽겠으니까.’
“너."
강신혁이 관리자를 진정시키던 그때 이나희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강신혁은 멈칫했다. 겉으로만 보면 작고 귀엽게 보였던 그녀의 손에 딱딱하게 박힌 굳은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랑 하자.”
“네!?”
“진정해라, 손녀야. 뇌제가 침 바른 놈이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생략해선 안 될 말을 생략해버리고 만 이나희가 할아버지에게 화를 버럭 내더니 강신혁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역시나, 이건 장인의 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신혁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나랑 같이 아티팩트 만들자고!”
이나희가 진지한 목소리로 외쳤다.
강신혁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뒤에서 이만우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처음부터 이나희가 강신혁에게 그런 부탁을 먼저 해오리라 예상했던 것이겠지.
강신혁은 처음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이나희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죠.”
그렇게 해서 전생과 현생 통틀어 최초로 그와 인챈터의 합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