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Chapter 13. 어웨이크닝 - 6 [3권 끝] >
“수리가 안 된 게 분명해!”
더글러스 페인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안장을 얹고 멜로이의 등에 타려는 바로 그 순간 멜로이가 극렬히 분노하여 날뛰는 바람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모든 기사단원이 라이브로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 크루루로오오오오오오!
멜로이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더글러스 페인의 모습에 더더욱 흥분해 괴성을 내질렀다. 노랗게 빛나는 눈으로 놈을 노려보는 것이 다음에 가까이 다가갔다간 머리를 쪼아 먹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더글러스 페인은 자신의 체력이(체력은 스태미나이며 동시에 신체 내구도와 직결되는 수치였다.) S-랭크인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비룡기사단에서 그 누구보다 강한 내가 인정을 받지 못할 리가 없잖아. 너! 네가 내게 거짓말을 친 거지!”
“더글러스 페인!”
더글러스 페인이 강신혁을 노려보며 힘을 행사하려던 순간 에밀 볼튼이 큰소리를 냈다. 제아무리 그의 체력이 S-랭크라고 해도 에밀 볼튼이 쏘아낸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에밀 볼튼이 눈을 부라렸다.
“언제부터 비룡기사단이 생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의 유치원이 된 거지? 더글러스 페인, 그게 내가 물려준 단장 배지에 어울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아닙니다! 하지만 선배님, 저는 모든 단원의 인정을 받고 비룡기사단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안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저 놈이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이만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지 못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고, 아티팩트의 기준은 다르다고.”
“그 두 가지가 뭐가 다릅니까!”
더글러스 페인은 진실로 그것을 모르는 듯이 보였다. 에밀 볼튼은 자신이 말해도 되겠냐는 표정으로 이만우와 강신혁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둘은 어차피 에밀 볼튼이 아니고서야 더글러스 페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기준에는 순수한 무력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지. 예를 들면 인맥. 예를 들면 관점. 예를 들면…… 가문.”
“저는! 선배님!”
더글러스 페인이 억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제 가문을 내세워 단장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알아. 알고 있어, 더글러스. 나는 자네의 가문을 말한 것이 아냐.”
“예……?”
- 그루루아아아아아아!
그가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와이번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성질을 잔뜩 부리고 있었기에, 강신혁이 누구도 몰래 다가가 녀석을 진정시켜주었다.
녀석은 신기하게도 강신혁의 손이 닿는 순간 바로 차분해지더니 그의 손을 핥으며 그루루, 작게 울었다. 역시 이 녀석 그냥 집에 데려가고 싶은데.
“역시 신혁이 네가 단장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
“웃기시네.”
그는 카렌의 되도 않는 수작에 코웃음을 쳐주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차례는 이미 다 끝났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가문이 아니라면 누구의…… 예?”
더글러스 페인은 말을 하다 말고 스스로 깨달았는지, 조금 전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엘레노어에게 시선을 옮겼다. 몸집이 작은 그녀이기에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긴장하는 모습이 마치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부단장이?”
“조는, 아닙니다.”
혀를 씹는 것을 보면 스스로 맞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글러스 페인은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니, 그럴 리가, 같은 말 따위를 입 안에서 굴렸다.
“아닙니다.”
더글러스 페인이 얼을 타는 사이 정신을 수습한 엘레노어가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이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 더글러스 페인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실력을 숨겼나, 부단장?”
“아뇨…… 저는.”
“저 녀석을 타라, 부단장.”
“단장.”
“단장의 지시다. 아니면 본인보다 약한 사람의 말이기에 따를 수 없나?”
엘레노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와이번이 자신을 거부할 가능성에 걸고 움직여볼 수밖에 없었다.
- 그루루루…….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멜로이가 낮은 목소리로 울더니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천천히 몸을 낮춰 그녀가 쉽게 탈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
심지어 안장까지 제대로 발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듯 희미한 빛을 발했다. 더글러스 페인이 움직였을 때는 조금도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런가.”
더글러스 페인은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그런 말을 흘리더니 강신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강신혁도 알 수 있었다. 안장을 수리한 장본인인 강신혁이 안장이 엘레노어에게 반응하도록 수를 쓴 것이 아닐까, 그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겠지.
그러나 이내 그는 강신혁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곤 다급히 와이번에게서 내려오는 엘레노어를 보며 더욱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비룡기사단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것이 모두 이 때문인가? 부단장이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뇨, 제가 당신보다 강하다고는 누구도.”
“좋다, 그렇다면 싸워보자.”
더글러스 페인이 말했다. 그가 자신의 팔찌에 손을 뻗어 매만지자 허공에 절로 거대한 대검이 생성되었다. 아마도 안에 물건을 수납 할 수 있는 아공간 기능을 갖춘 팔찌인 모양이다. 과연 잘 사는 놈은 달랐다.
그는 그것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가볍게 휘두르더니, 부단장을 겨누었다. 딱 봐도 질량이 장난 아닌 듯 보이는데 그것을 우습게 다루고 있으니, 과연 힘 하나는 무지막지했다.
“단장.”
“확실히 하기 위해 싸우자는 거다. 지금 이대론 납득할수 없어. 끝까지 부단장이 그렇게 발을 뺀다면, 나는 이놈이 작정하고 나를 속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
그의 칼끝이 강신혁을 향했다. 이럴 땐 또 머리가 굴러가는구나. 강신혁은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했다. 반면 엘레노어는 그의 말에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알겠습니다. 싸우죠.”
“능력을 숨기지 마라.”
“숨기지 않습니다.”
“부단장이 이기면, 나는 단장직에서 물러나겠다. 네가 단장이 된다.”
“그건.”
망설이는 엘레노어에게 더글러스 페인이 단호히 말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한 굴욕을 당했다. 날 이 이상 치욕스럽게 할 셈은 아니겠지?”
절반 이상은 자업자득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강신혁은 아직 더글러스 페인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으로 보기엔 더글러스 페인도 엘레노어 R. 알제도 규격외이기는 매한가지다. 신영의 기준으로도 둘은 특별했다. 그런 더글러스 페인을 이긴 백인하는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다른 학생들이 보기엔 기적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강신혁이야말로 규격외 판정을 받을 테지만 아직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주 조금 부족했다.
“……좋습니다.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엘레노어가 끝내 그렇게 말했다. 무척 큰 결심을 한 듯 진지하게 반짝이는 보랏빛 눈에 누구나가 압도되고 말았다.
그 순간 올해 첫 번째의 단장 결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단원이 이 자리에 나와 있었기에 따로 소집을 할 필요도 없다. 훈련소에는 대련을 위한 시설도 갖춰져 있다. 그들은 즉시 자리를 옮겼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에밀 볼튼과 이만우도 그들을 따랐다.
단장파에 속한 단원들은 대부분이 강신혁을 노려보거나, 혹은 정말로 단장이 부단장에 질 것인가 불안해했고, 부단장파에 속한 단원들은 엘레노어가 화끈하게 단장을 이겨줄 것을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신혁이 미워.”
그리고 카렌은 다 죽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퍽퍽 찔렀다. 그러나 그의 체력은 A-랭크. 이 정도로는 가렵지도 않았다.
“사실 내가 의도한 건 아닌데, 날 끌어들였으니 너희도 패를 하나 까는 게 맞다고는 생각해.”
“에휴,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게 생겼네.”
“너 한국말 참 잘 한다 야.”
강신혁은 그 부분에서 말을 멈추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도 그들에게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단장직을 놓고 치르는 단장과 부단장의 결투가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 나도 이젠 들을 준비가 됐어. 너 안 그래도 전부터 계속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잖아. 그래서 대체 무슨 사정인데?”
임시라고는 해도 비룡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이다. 더구나 확고한 부단장파로 인지되고 있는 이상 알아둬야 할 것은 알아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신혁이 대놓고 묻자 카렌 역시 그와 비슷하게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엘레노어 전하는 현 영국 왕실 가문인 레드레이크의 직계 자손이셔.”
“깜박이도 안 키고 훅 들어오네. 레드레이크는 또 뭐야?”
“초인 시대가 개막되고 바뀐 영국 왕가의 성씨야. 이것도 몰랐어?”
하긴 영국 왕실 가문은 원래부터 성씨가 휙휙 바뀌기로 유명하긴 했지. 하지만 설마 왕족이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왕족이 대체 왜 한국에 있는 초인학교를 다니는 거지?
“쫓겨나셨어. 지금 영국 왕실은 가문 내에서 제법 분쟁이 심하거든. 가디언…… 아, 초인을 이르는 영국 명칭인데, 가디언에 대한 실질적 통솔권이 왕실에 있다 보니 그 권력이 과거 어느 때에 비해서도 강력해. 그런 만큼 그걸 차지하려고 제법…… 음, 꼴사나운 일들을 많이 하고 있어.”
“야야, 됐어. 이 다음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으니까. 부단장 쪽은 세력이 약하고, 하지만 이상하게 재능은 부단장이 가장 뛰어나. 그래서 여기저기서 견제를 당하다 결국 부단장이 도피하듯 한국행. 한국에 와서도 최대한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건가.”
“뭐 군데군데 첨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정확해.”
“둘 다 바보야? 저 사람 올해 투왕이야. 지금 학교에서 제일 주목받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비룡기사단 단장이라는 칭호에 비해 별로 안 꿇려.”
“내 말이!”
카렌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원래 결승에서 단장과 만나서 져주려고 하셨단 말이야! 그런데 웬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단장을 조기탈락 시켜버리는 바람에……."
“이젠 또 백인하 탓이냐.”
더글러스 페인이 아닌 상대라도 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마법학과의 마도왕이었고, 그 상황에서 차마 질 수가 없어 전력을 낸 결과 투왕을 차지했다고.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애초에 출전 안 했으면 됐잖아.”
“비룡기사단의 부단장직에 계신 전하가 출전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하겠지?”
“부단장을 안 했으면 됐잖아.”
“비룡기사단에 입단을 하니까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나 봐. 구체적으로는 더글러스 페인의 의지. 하여간 전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 난 놈이라니까.”
“입단을 안 했으면 됐잖아.”
“로열 클래스에 들어갈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어. 학교는 전하의 신분을 알고 있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로열 클래스에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을 테니까.”
“진짜 제멋대로네. 결국 자존심하고 최소한의 권위를 챙기려다 이렇게 됐다는 거잖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기왕 자신을 숨길 거 아예 실력발휘를 안 하고 꽁꽁 숨어 지냈으면 지금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부분에서 타협하지 못한 끝에 입장이 어정쩡해지고 말았다.
왜 흔히 소설을 읽어보면 능력이 밝혀지면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을 감추려고 안달 난 것처럼 행세하던 주인공들이 기분이 상하면 나서고, 뭔가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나서고, 필요하지 않아도 꼴리면 나서고 하는 바람에 대부분 얼마 안가서 능력이 들통 나지 않던가.
그리고 그런 상황 대부분에서 드러나는 사실이 뭔가 하면.
“사실 주목받아도 별 일 없는 거 아냐?”
“……어떤 대답을 원해? 귀족으로서의 대답? 아니면 부단장님의 검을 동경하는 소녀로서의 대답?”
“그건 이미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네.”
“장단 좀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
그렇다. 능력이 들통 난다고 뭐 큰 일이 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제 능력이 밝혀진 주인공이 무슨 집단 린치를 당하기라도 하는가? 물론 조금 주목을 받고 잡놈들의 습격을 받는 등 귀찮아지긴 하지만 결국 다 해결하지 않던가? 왜? 강하니까!
엘레노어 R. 알제는 강하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무심코 능력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능력이 모두 드러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단지 조금 귀찮아질 뿐이다.
게다가 그녀가 영국 왕실의 권력 투쟁 한가운데 놓여있다면 어차피 언젠가 능력은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저 여태까지 그 순간을 유보해온 것에 불과하다. 조금 더 일찍 귀찮아지느냐, 귀찮은 순간을 조금 미루느냐.
그녀는 그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이는 과정에서 유보된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앞당겨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강신혁이라는 동아줄을 붙잡는 바람에…….
“……제가 이겼습니다.”
오늘 강제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검신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더글러스 페인이 검을 놓고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똑바로 더글러스 페인을 바라보며 - 아니, 그 너머의 강신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투왕전 이후로 헤매고 있던 마음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
“단장직을 맡겠습니다. 결심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더글러스 페인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신혁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너희들끼리 좀 알아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