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Chapter 12. 비룡이 부르는 소리 - 6 >
테이밍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는 지금, 와이번 멜로이는 단원들이 주는 식사를 받아먹기만 할 뿐 그들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도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고.
사실 이 막사도 무척 튼튼하게 제작된 데다 특수한 마법까지 걸려있어 실상 와이번을 가둬두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하긴 무려 B급을 초과하는 몬스터를 교내에서 기르는 것인데 그만한 안전장치도 없을 리가 없었다.
“와, 진짜 신기하네.”
“멜로이가 저렇게 사람을 따르는 건 처음 본 것 같아. 전대 단장님한테도 저 정도로 따르지는 않았는데.”
기사단원들은 저마다 꼬치를 하나씩 입에 물고는 다가와 강신혁과 와이번을 보며 놀라워했다. 강신혁은 알제에게서 받아든 꼬치를 베어 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 이러는 거 아니었어요?”
“너 정말 테이밍 능력자 아니야?”
1학년 때부터 멜로이를 봐왔다는 3학년 여선배가 다가와 멜로이한테 손을 내밀었으나, 녀석은 그르르르르,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위협할 뿐이었다. 과연 정말로 강신혁과는 취급이 달랐다.
“암컷이라서 남자를 좋아하나? 혹시 비룡기사단 단장이 대대로 남자였던 데에 그런 이유가.”
“하지만 멜로이한테는 지금 단장은 물론이고 도우진도 접근 못했잖아.”
“그거야 그 둘이 신혁이랑은 달리…… 에이, 그거 내가 꼭 말해야 해?”
“이미 다 말한 거나 다름없거든요?”
도우진은 조금 삐진 듯했다. 강신혁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멜로이의 턱을 긁어주었다. 녀석은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강신혁에게 재롱을 부렸다. 그 모습을 본 알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태우고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정말 테이밍된 것도 아닌데 그건 좀 위험하죠, 만약에 폭주라도 했다간.”
“우리 신혁이 받아들여서 쿠데타해요, 쿠데타. 솔직히 비룡기사단 단장이면 비룡을 타야죠, 비룡을.”
“그럼 신혁이가 단장 되는 거야?”
“오오올, 1학년 단장 완전 멋져.”
“가능할 리가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강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멜로이에게서 떨어졌다. 녀석은 아쉬운 표정으로 몇 번 서글프게 울더니 우리 안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설령 정말로 녀석이 강신혁에게 테이밍되었다 해도 비룡기사단의 소유물인 녀석을 강신혁이 어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소에도 저렇게만 얌전하면 좋을 텐데.”
“신혁이가 자주 놀러와 주면 좋겠다.”
“누나들이 잘해줄 테니까 앞으로 편히 놀러와, 응?”
“선배님들 헛꿈 그만 꾸시고요. 일단 고기나 먹으러 가요.”
바베큐 파티는 그로부터 30분 정도 더 계속되었다. 성별을 불문하고 다들 몸을 많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보니 기본적으로 3~4인분 정도는 무리 없이 먹었는데, 특히나 강신혁은 멜로이만큼 먹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을 먹어치웠다.
재생력이 B랭크로 성장한 이후로 한층 먹는 양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구 우리 신혁이 잘 먹네. 어쩜 먹는 것도 그렇게 복스럽게 먹니.”
“선배, 좀 늙은 티 나니까 그거 하지 마십쇼.”
“지금부터 연륜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도우진 너 따라 나와라.”
도우진도 맨날 뭐라 불평을 늘어놓더니 티격태격하면서도 2관 사람들과 함께 제법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강신혁은 선배를 상대로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달려든 도우진이 형편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며 구운 파인애플을 먹었다. 무척 달콤했다.
“그러고 보니.”
강신혁은 카렌이 따라준 허브티를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치며 알제에게 물었다.
“아직 아티팩트를 못 봤는데요.”
“아, 그게 구실이었지.”
“그러니까 넌 아까부터 그걸 구실이라고 하지 말라고.”
“보여줄게. 따라와.”
강신혁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친 알제가 그를 훈련소 안으로 이끌었다. 선배들은 그 모습을 보곤 강신혁을 향해 엄지를 세워보였는데, 아마도 다들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어떤 식으로 생긴 아티팩트인가요?”
“여기 보관되어 있어.”
어쩌다보니 알제의 개인방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성격을 드러내듯 깔끔하게 정돈된 집무실 한쪽에는 갑주가 장식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 벽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거침없이 그곳으로 다가가 벽장을 열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은 화려한 장식이 된 안장(裝裝)이었다.
“이렇게 나왔군요.”
- 고위의 아티팩트입니다. 야금술보다는 마나 크래프트의 영역이군요.
마나 크래프트, 그것은 인챈트 능력을 지니는 능력자들 중에서도 고위의 능력자들이 지니는 희귀스킬로, 마나를 품은 재료를 활용해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전문 스킬이었다.
대장장이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 물건 제작부터 인챈트까지 해결해버리는 개사기 스킬. 야금술만으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강신혁만큼이나 대단한 것이라고 한다.
“좀, 알겠어?”
“아뇨,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잘.”
단단한 금속의 토대 위에 부드러운 가죽을 덧씌워 완성한 그 안장은 대체 뭐가 고장났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할 만큼 완벽한 형상이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가죽 안장에 금속 장식이 몇 개인가 덧대어져 있다는 것인데…….
“저건 뭐죠?”
“역대 단장들의 배지. 가장 최근에 붙은 것이, 지금 단장 더글러스 페인의 배지.”
“딱 봐도 저게 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지?”
아무래도 일반인은 아티팩트를 보는 관점이 강신혁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알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곤 요청했다.
“선배님, 직접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엘레노어, 라고 부르면 돼.”
“그럼 엘레노어 선배님.”
알제…… 아니, 엘레노어는 그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무튼 허락이 떨어졌으니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안장을 매만졌다.
엘레노어는 그 모습에 아, 소리를 내곤 자신의 손을 거둬들이며 침묵했다. 그녀의 얼굴이 미미한 붉은빛으로 물드는 모습에 관리자가 악의가 가득 담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 저 여자도 불여우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 세상이 흉흉하군요.
'......?'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관리자를 무시하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이미 던전 벽과의 소통까지 끝마친 그에게 사물과 소통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 제아무리 고위 아티팩트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시…… 이 배지들도 그냥 물건은 아니었던 것 같네.’
그는 오롯이 안장과 소통하려는 것인데, 그 중간에 배지들이 저마다 제 개성을 주장하며 끼어들고 있었다.
본래 이 배지는 사용자의 마력을 담아 테이밍 아티팩트와 연결하는 것으로 사용자가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그게 몇 개씩이나 안장에 달라붙어 있다 보니 혼선을 일으켜 아티팩트와의 연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
“이거 좀 떼어낼게요.”
“아."
엘레노어가 말리려 했지만 강신혁은 과감하게 배지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그러자 안장이 지닌 기운이 조금 살아났으나…… 그럼에도 아티팩트의 본래 능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신혁의 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랜 세월 아티팩트를 잘못 이용해온 나머지 아티팩트 내부의 마력 흐름이 엉클어질 대로 엉클어져버린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는 분석조차 힘들겠는데.’
그는 인상을 팍 썼다. 그 옆에서 엘레노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대 단장들의, 배지인데.”
“어차피 그 상태로 있었으면 더 심하게 망가지기만 했을걸요. 처음에 어쩌다 망가졌는지도 알겠어요. 지금 단장이 배지를 부착한 순간 마력 혼선이 임계점에 달해 아작이 났을 겁니다.”
“확실히…… 자신의 배지가 이상한 건가, 하고 말했었어.”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티팩트를 다루는 강신혁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편 강신혁은 아티팩트에만 집중했다.
본래 지니고 있던 구조, 아티팩트가 지닌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의 영력으로 그것을 보강하고자 한 것이다. 노력의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아 그의 머릿속에 흐릿하게나마 아티팩트의 구조도가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핵심은 꽝이었다.
근본적으로 너무 쇠약해져 있는 것이다. 본래 고위의 아티팩트였던 그것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관리도 받지 못하며, 심지어는 배지가 계속해서 덕지덕지 붙어 늘어나는 바람에 거의 아티팩트로서의 한계점에 이르러있었다.
"으으음."
몇 번 더 아티팩트를 붙잡고 씨름해보던 강신혁은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거 잠시 가져갈 수 있을까요? 이 자리에서는 해결 못할 것 같은데요.”
“가져가면 해결할 자신이 있어?”
“자신까진 아니지만.”
강신혁은 한 번 더 안장에 영력을 불어넣어, 이번엔 안장의 외부 구조를 면밀히 파악했다. 외부를 손보면 내부의 마력흐름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어느 정도는 그것이 적중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겁니다.”
“좋아, 그럼 맡길게.”
“괜찮을까요?”
“단장은 내게 아티팩트를 복구하라고 했어. 외부로 반출하지는 말라고 했지만, 넌 외부인이 아니니까.”
엘레노어의 진중한 표정을 보건대 어쩌면 그녀가 제법 큰 결단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도 아티팩트가 이 이상으로 망가지는 일은 없을 터.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할게요.”
"응."
강신혁은 안장을 소중히 감싸 안고 건물을 나왔다. 도중에 주방에서 바베큐에 쓴 식기들과 그릴을 설거지하고 있는 도우진을 발견해 걸음을 멈춘 강신혁이었으나 ‘설거지는 당번제니까 동정하지 말고 꺼져’라는 도우진의 말을 받아들여 냉큼 꺼지기로 했다.
“아, 신혁이 벌써 간다!”
“내일도 놀러 와야 해! 내일은 우리랑 대련하자!”
“우리한테 지면 입단하기!”
알제와 멋진 승부를 벌인 강신혁이 단단히 마음에 든 것인지 여선배들이 하나같이 추파를 던져왔다.
강신혁은 그녀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관리자는 그녀들을 전부 싸잡아 욕했지만 이젠 그것에도 슬슬 익숙해졌기에 무시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혼자 안장을 살피고 있어도 뾰족한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안장을 사람에 비유해 말한다면, 지금 이 녀석에게는 장기간의 요양과 그에 따른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여기에 멋대로 다른 뭔가를 첨가하는 건 더 위험한 일이겠죠……."
- 전생의 회원님께선 가죽 제품의 제작과 수리에도 능하셨습니다. 분명 지금의 회원님께도 가능할 것입니다.
“누누이 생각하지만 정말 그게 야금술이 맞나 싶네요.”
- 야금술에서 출발하여 ‘올 크래프트(All Craft)’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만류귀종이라는 말은 회원님께서도 알고 계실 터입니다.
“멀어요, 거기까진 아직 너무 멀다고요.”
역시 관리자는 강신혁을 전생의 모루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장을 다듬었다.
지금은 그저 영력을 최대한 듬뿍 담은 브러시와 가죽 손질용 오일로 겉을 손질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영력이 효과를 발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주 조금씩 상태가 좋아지고 있기는 했다.
“……영력 수련을 이걸로 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네요.”
- 가죽만 손질해도 그림이 되는 회원님의 모습에 200HP 보너스!
요즘 들어 점점 관리자의 보너스 판단 기준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강신혁만의 착각일까. 픽 웃으며 안장을 닦고 있자니 오닉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방바닥에 가시 안 박히게 조심해라.”
- 뀨!
오닉스의 장점은 대답을 잘한다는 것, 그리고 단점은 대답만 잘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차 녀석에게 주의를 주곤 미리 준비해놓은 쇳 덩어리 하나를 녀석의 입에 물렸다.
금속을 오물거리는 오닉스를 그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일을 하고 있자니 그건 또 그것 나름 느낌이 괜찮았다.
“그래, 와이번이 아니면 어때.”
- 뀨?
“아니야, 너 많이 먹고 쑥쑥 크라고.”
- 뀨뀨웃!
그 날 하루는 그렇게 평화롭게 저물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금요일은 임시휴일. 강신혁은 오전부터 사감의 방문을 받았다. 이미 예정되었던 방문이었다.
“연락은 받았겠지? 축하한다, 강신혁 학생. 언젠가 로열 클래스의 주민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올해일 줄은 몰랐는데…… 내 눈도 이젠 영 못 쓰겠어.”
“에밀 볼튼 선생님……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내년엔 투왕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군. 자, 짐은 싸놓은 것 같으니 이동하지.”
“네, 선생님.”
강신혁은 문자를 확인한 날 이미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물건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캐리어에 정리해두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나온 강신혁은 에밀 볼튼과 함께 복도를 이동했다. 이미 그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복도로 얼굴을 내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얘기해야 할 사람(백인하)에게는 얘기한 후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기숙사 내 애완동물 반입은 가능합니까?”
“얼마든지. 하지만 그렇게 묻는 걸 보니 평범한 애완동물은 아닌 것 같은데.”
“소형 몬스터입니다.”
“그건 테임 증명서가 필요하겠어. 바로 뽑아주지. 학교 측에 제출해서 인증만 받으면 종류에 따라 실습에도 대동이 가능해.”
“감사합니다.”
그들은 일단 한 번 기숙사 로비로 나온 후 여자기숙사에 있던 것처럼 외부에 따로 마련되어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에밀 볼튼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카드키를 인식시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고는 그것을 강신혁에게 건넸다.
“강신혁 학생의 소유물이야. 더 이상 로열 클래스의 주민이 아니게 되었을 때 반납하면 돼.”
“비싸 보이네요.”
“마도공학의 산물이니까. 제작과정에서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진짜인지는 모르겠네. 참고로 그 물건은 엘리베이터 인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 열쇠, 식당 출입 열쇠, 운유관 로열 클래스 특별 시설 입장 등에도 이용되니 단단히 기억해두도록.”
“차별대우가 어마어마하네요.”
“신영은 강한 초인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인 일종의 훈련소이고, 훈련소에서 훌륭한 성과를 낸 인재를 대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강신혁도 그것에는 공감했다. 모든 학생이 공평한 대우를 받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일반적인 고등학교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활동이나 지원혜택을 받다보니 가끔씩 착각하곤 하지만 신영은 결코 탁아소가 아닌 것이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초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도착이다. 13층.”
“이 건물, 13층까지 있었던가요…… 아니,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강신혁은 씩 웃어 보이는 에밀 볼튼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캐리어를 끌며 복도를 나아갔다. 호화로운 융단, 번쩍이는 상들리에. 공용 휴게실도 있었지만 열어보지는 않았다.
“어디보자, 제 방은 1303호실이네요…… 헉.”
카드키로 잠금을 풀고 문을 열었다. 내부를 둘러보고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넓다’였다. 호화롭다, 찬란하다 정도가 그 뒤를 이었다.
“조명, 컴퓨터, 침대, 화장실, 욕실, 부엌까지 아마 이전에 쓰던 곳과는 많이 다를 거야. 간단하게 운동할수 있는 개인실도 있으니 운동이 하고 싶을 때마다 매번 내려올 필요도 없겠지. 방음 설비도 되어있으니 신경 쓰지 않고 운동해도 돼.”
“사기야……."
호텔의 스위트룸도 이보다 훌륭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신영에 들어온 이래 무엇에도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거늘 앞으로도 쭉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짐을 푸는 걸 도와줄까?”
“아, 아뇨. 개인적인 짐이라서요. 안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렇다면 됐어. 로열 클래스는 이용하는 식당이 따로 있으니 까먹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세한 내용이 정리된 파일이 오늘 중으로 발송될 거야.”
“넵.”
식당이라, 하지만 신인왕이 되었다고 해서 냉큼 백인하를 버리고 밥을 혼자 먹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에밀 볼튼이 돌아간 후, 백인하에게 연락을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백인하 : 나도 곧 로열 클래스 올라갈 테니까 괜찮아.]
[나 : 학생회로?]
[백인하 : ……티 많이 났냐?]
[나 : 당연한 소릴.]
신영의 학생회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학기 말에 치러지게 되어 있다. 선거운동을 할 기간이 짧은 것은 의도된 것이다.
정치질에 굳이 힘을 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영은 청소년의 어쭙잖은 공작으로 좌지우지 될만한 학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결론만 말한다면 이미 학생회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는 내정자들이 있어, 그들끼리 내부에서 권력 다툼을 벌일 뿐 일반 학생들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백인하는 아마 그들 중에서도…….
[백인하: 같이 나가자. 나랑 시녹이랑 팀 먹으면 최강이잖아?]
[나: 사절.]
[백인하: 그렇게 나올 줄 알고는 있었는데.]
백인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강신혁은 그가 이미 이전부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쉬이 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 : 그래서? 임원단 구성은 어떻게 되는데. 아니지, 네가 뭘로 나갈 건데.]
[백인하: 신영 교칙상 1학년은 회장이 될 수 없어. 그래서 부회장이야. 지금 부회장을 하고 있는 선배와 인연이 좀 있거든. 그 사람을 회장으로 올릴 거다.]
본격적으로 더러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백인하는 강신혁이 신인왕이 되기 전이었다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살짝 들었다.
[나 : 나는 귀찮게 하지 마라?]
[백인하 : 사실 네가 도와줄 것도 없어. 놈들이 더러운 수작을 부릴 틈도 없이 깔끔하게 밀어버릴 테니까, 뭐 그냥 보고 있어.]
백인하의 메시지는 평소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에서는 보기 힘든 살벌함을 품고 있었다. 강신혁은 뭐라 더 말할까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나 : 뭐 힘내든가.]
[백인하 : 여유지. 그러니까 선거 끝날 때까지는 나랑 같이 일반 학생식당에서 밥 먹어주세요…….]
녀석은 갑자기 비굴해졌다. 학생회 선거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면서 밥을 같이 먹을 친구는 없다니 무슨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있단 말인가. 강신혁은 한숨을 쉬면서도 일단은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두었다.
[바텐더 누나 : 신혁이 로열 클래스 들어갔네?]
백인하와의 대화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있자니 클레어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강신혁은 얼떨떨해져 대꾸했다.
[나 :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알고 계세요?]
[바텐더 누나: 글쎄, 내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답은 그날 저녁에 알게 되었다.
클레어가 당당하게 그의 방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