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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 Chapter 12. 비룡이 부르는 소리 - 3 >

지금 시간은 오후 10시. 오늘 실습에서 있었던 소란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교는 오늘부터 사흘간 학생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즉 기숙사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단 뜻이다. ……아니, 원래 오후 10시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내부에 머물러 있어야 하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여학생들로 우글거리는 기숙사에 남학생이 돌격하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허가가 나지 않는다. 강신혁 역시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몰라 당황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로열 클래스에 온 걸 환영해.”

그 답은 카렌이 알려주었다.

일반 기숙사와는 아예 다른 입구에 배치된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신혁을 기다리고 있던 카렌이 직접 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더니 카드키를 인식시켰고,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로열 클래스?”

“뭐야, 못 들어봤어? 신영 상위 1% 인재들에게만 허락된 특별공간이잖아. 식당도 따로 있는데 진짜 몰라?”

"1%? 네가?”

“내 불합리한 취급에 대한 분노는 나중에 터트리는 걸로 하고…… 크흠, 난 부단장님의 시중을 드는 조건으로 애초에 로열 클래스에 들어오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어.”

비룡기사단의 부단장, 엘레노어 R. 알제의 시중을 든다고? 그것이 입학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 사람 무슨 귀족 같은 거냐?”

“귀족 같은 게 아니라 귀족 중의 귀족이야. 무우우우척 높은 분. 윗분들께선 그분을 영국 왕립 초인 아카데미로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그분께서 워낙 강하게 신영을 희망하고 계셔서 별 수 없었지. 음, 일단 말해두는데 나도 귀족이다?”

강신혁은 그 말에 제법 놀랐다.

영국의 귀족들은 초인이 처음으로 발생한 그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그들 중 강한 이를 가문에 끌어들여 피의 강화를 노렸으며, 초인을 포함하는 대다수의 영국 국민들 또한 여왕과 귀족들을 존중하며 동경하고 있었기에 그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그로부터 족히 2대 이상이 흘러 가문에 섞인 고위 초인들의 피가 성공적으로 발현된 지금은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실력과 잠재력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계 강화 능력이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출신성분부터 범상치 않았을 줄이야…… 다만 귀족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태도가 친근한 것 같긴 한데.’

강신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카렌이 이어서 설명했다.

“본래 로열 클래스는 신영을 대표하는 3대 단체…… 학생회, 비룡기사단, 신영마도학회에 소속된 학생들 중에서도 임원급인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야. 나도 부단장님이 아니었으면 못 들어왔겠지.”

“와, 지금 처음 알았지만 너무 그럴 듯해서 한숨이 나온다.”

어쩐지 기숙사나 학생식당에서 잘 나가는 양반들 얼굴을 볼 일이 없더라니, 아예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단 말인가. 강신혁은 그저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런 그의 옆모습을 카렌이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개인전에서 각 분야 톱을 차지하는 사람들도 로열 클래스에 들어오게 돼.”

“뭐?”

“어차피 기사왕과 마도왕은 각각 비룡기사단과 신영마도학회에서 차지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으로 되어 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투왕 하고 신인왕 정도인데, 보통은 이 둘도 비룡기사단이랑 신영마도학회에서 나오는 편이고.”

하지만 이번 신인왕은 그렇지 않지, 하고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강신혁은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아무 말 없던데?”

“로열 클래스에 방을 내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네가 아무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걸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래도 이번 주 중으로는 안내해주지 싶은데.”

마침 그 타이밍에 그들의 스틱이 동시에 울렸다. 교사들이 외부 임무에 동원되게 되어 이번 주 금요일은 수업이 없을 예정이라는 내용.

강신혁은 거기에 더해 메시지가 하나 더 날아들었는데, 로열 클래스 입주가 결정되었으니 수업이 없는 금요일 날 기숙사 사감 에밀볼튼의 안내를 받아 짐을 옮기라는 얘기였다.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운 거 아냐?”

“딱히 그렇진 않을걸. 이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네 입주가 당겨진 것 아닐까?”

“아, 과연.”

강신혁도 그 말에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서 좋은 방을 내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근데 내년에 새로운 신인왕 나오면?”

“그 전에 뭐가 됐든 새로 한 자리 차지하면 안 쫓겨나겠지? 참고로 저번 신인왕은 부단장님이셨어.”

“나 참.”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최상층은 실내 장식부터 차별화되어 있었는데, 바닥에 깔린 융단의 재질도 심상치 않아보였다.

“부단장님 방은 이쪽이야. 자자, 빨리.”

“그런데 아직 용건을 못 들었는데.”

“그런 건 구실일 뿐이니까 빨리 오기나 해.”

“스스로 그런 말을 했겠다……."

카렌을 따라 안쪽에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강신혁은 그녀가 도어노커를 품위 있게 두드리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노커 자체도 상당히 세련된 것으로, 방패 안에 사자와 용이 한데 얽혀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드로와.”

“저 사람 혀 짧아?”

“이상하게 한국어를 하실 때만 가끔씩 ‘어’ 발음이 안 되셔. 평소는 괜찮은데 긴장할 때 가끔씩 튀어나오더라.”

문이 열렸다. 무척 넓고 호화로운 방이었으나 강신혁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서 홀로 차를 마시고 있는 엘레노어 R. 알제에게 주목했다.

그녀는 비룡기사단의 정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귀족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찻잔을 든 모습이 실로 품위 있어 보였다. 그녀의 매끄러운 검은 생머리에서 강신혁은 절제된 우아함을 느꼈다.

- 칫.

‘관리자님?’

이상하다, 분명 방금 관리자의 메시지가 보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강신혁의 부름에도 관리자의 메시지가 이어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의 오해일 것이다.

“안녕. 엘레노어 R. 알제…… 기사학과 2학년 B클래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신혁을 보더니 무례하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짧은 인사를 건넸다. 선배이니만큼 강신혁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기사학과 1학년 C클래스 강신혁입니다.”

“편히, 앉아.”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고 하시네. 부디 편하게 있으라고 하셔.”

“방금 그런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강신혁은 알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오밤중에 그를 부른 것일까, 만약 입단하라는 제의를 하려는 것이라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실은 이번 실습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말씀드렸거든.”

“뭐 그랬겠지.”

카렌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알제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차를 따르는 모습이 상당히 그럴싸했다.

강신혁은 잠시나마 중세 영국 귀족의 응접실에 있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 방금 카렌이 그에게 윙크를 하면서 분위기를 다 날려 먹었다.

“그래서…… 실습에서 있었던 일이면 뭐, 습격당한 거?”

“그것도 있지만 그냥 전반적으로 네가 싸우는 모습이나 특기 같은 걸 말씀드렸지. 그랬더니 네가 무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는 데에 흥미를 가지시더라고.”

“이 학교에 장인은…… 드무니까.”

그 시점에서 알제가 직접 입을 열어 카렌의 말에 보태었다. 확실히 그렇다. 그야 신영은 게이트 최전선에 서는 특급 초인들을 길러내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 학교니까.

생산능력을 키우려고 신영에 들어오는 이는 없다. 강신혁도 처음부터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쪽 전문학교로 갔을 것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혹시 아티팩트도…… 만들 수 있어?”

“네."

“와."

이번에 학교에 제출한 실습 지참 무구 목록에 아티팩트가 들어가 있는 만큼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카렌과 알제는 그의 거침없는 긍정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러면 수리 같은 것도?”

"으으음......."

아티팩트의 수리라면 바로 오늘 하나를 성공시킨 참이긴 한데. 하지만 그렇다고 강신혁이 전문적인 수리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이기가 미묘했다.

- 회원님의 야금술은 커버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과거 회원님께선 다른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들의 무구를 맡아 수리해주신 일도 많지요. 대개 수리보다는 개량, 진화라 불러 마땅한 결과를 낳았습니다만.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 위한 능력이 부족하니까 말이죠…….'

그때였다. 강신혁이 짓고 있는 미묘한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알제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해했어.”

“와, 솔직히 그냥 구실이었는데 이걸 신혁이가 물어버리네.”

“나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도 돼?”

“부탁할 게 있오…… 읏.”

아, 또다. 말실수를 한 알제가 분한 표정으로 제 입가를 가리더니,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곤 말을 이었다.

“비룡기사단에 대대로 전해지는 아티팩트가, 지금 고장 난 상태라서.”

“이봐 결국 내부 얘기가 나왔잖아.”

“고쳐준다면, 나는 ‘단장’에게 빚을 지울 수 있어. 그것으로 너는, 내게 빚을 지울 수 있어.”

알제의 보랏빛 눈이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과연, 그 말을 듣는 강신혁의 뇌리에도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비룡기사단에 대대로 전해지는 아티팩트라고 한다면 그도 이미 들어본 적이 있다.

“혹시 고장 났다는 아티팩트가 비룡기사단에서 기르는 와이번을 컨트롤하는 테이밍 전용 아티팩트인가요?”

“응.”

“그걸 외부인한테 맡기겠다고요?”

“지금 아티팩트는 내가 보관하고 있어.”

강신혁은 알제에게 더 묻지 않고 카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간결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아티팩트를 고장 낸 건 단장님이야. 전대 단장에게 승계를 받고 와이번을 컨트롤하려던 때 뭘 잘못했는지 고장내버렸거든. 그래놓고는 부단장님께 일을 떠넘긴 거지. 이런 잡일은 단장의 임무가 아니라든가, 남자를 내조하는 게 여자의 역할이라든가.”

강신혁은 자신이 조선시대 사람에게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인가 잠시 의심했다.

“뭐냐, 그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솔직히 컨셉 같지 않아? 근데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니까? 애초에 부단장님을 제외하고는 여자 단원들한테 제대로 된 임원직도 안 주려고 하는데 보고 있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그게 컨셉이 아니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대단한 일인데. 강신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알제에게 물었다.

“그걸 그냥 듣고 계셨어요? 영국 귀족이시라면서요.”

“그게 통할 상대도 아니지만, 나는 내 신분을 앞세우지 않아.”

귀족의 프라이드라는 것인가, 강신혁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제법 고지식한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분명 실력도 그녀가 더 앞선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애초에 그 남자를 누르고 단장직에 오르지 않은 것일까. 아무래도 아직 강신혁에게 하지 않은 얘기가 남은 듯했다. 물론 굳이 들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물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도 없었어. ……그래서 방치해두고 있었어. 네게 말한 것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만약 잘 되면 빚을 지울 수 있어, 앞으로가 편해지니까.”

“처음부터 말했지만 이건 그냥 구실이었다니까? 본 목적은 부단장님이 하도 널 마음에 들어 하셔서, 읍. 읍읍.”

알제가 카렌의 입을 막았다.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차를 마셨다. 무척 맛있었다.

“절 비룡기사단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라면, 뭐 한 번쯤 보긴 할게요. 고친다는 보장은 없지만.”

테이밍 전용 아티팩트. 솔직히 말한다면 무척 큰 관심이 있었다. 그 귀한 것을 고치는 경험을 한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야금술에 있어, 그리고 아티팩트 제작에 있어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오.......”

강신혁이 의외로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이자 알제와 카렌은 재차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구실로 삼고 있던 부탁이 간단히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래서 그건 정리가 됐고. 그 외에 또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요.”

구실 얘기는 끝났다. 카렌이 말했다시피 ‘본 목적’이 남아있던 알제는 그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을…… 요청하고 싶어.”

"음?"

“이 학교에 와서, 기술적인 면에서 나보다 우위에 선 사람을 본 건 처음이니까.”

기술적인 면, 아마도 환룡무…… 아니, 그 시점에선 아룡환무였던 기술을 토대로 강신혁이 보였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겠지. 알제는 그 말을 하며 눈을 더욱 맹렬히 반짝였다. 그 작은 몸집에 이만한 정열을 감추고 있던 것이 놀라웠다.

“부탁해. 겨뤄조.”

자신이 발음을 틀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진지한 눈으로 부탁해오는 알제. 강신혁은 그제야 어째서 알제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무인이다. 특성이나 스킬이 아닌, 바닥부터 쌓아 올려온 무예를 바탕으로 하는 능력자. 그녀는…… 말하자면 강신혁과 동류 였던 것이다.

‘뭐, 그것도 대개는 무예와 관련된 특성을 얻어서 해당 무술의 이해도가 터무니없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화력 위주의 특성이 있으면 기예 위주의 특성이 있다. 강신혁은 굳이 그 두 가지 사이의 우열을 논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마력을 타고나지 못해 수년간 고생했듯이, 화력에만 집중된 특성 탓에 아무리 수련해도 마음먹은 대로 기예를 닦지 못하는 이도 있었을 터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대개 기예 위주의 특성을 지닌 이가 화력 위주의 특성을 지닌 이보다 많은 시간 수련하며 무술을 갈고 닦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잘 하는 것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좋아요, 저야 영광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요는 무엇이냐면, 강신혁도 알제와 같은 과인만큼 그녀의 제안이 썩 기꺼웠다는 사실이었다.

“좋아……!”

“하여간 우리 부단장님은 너무 무투파라니까……."

강신혁의 긍정에 기분이 좋아진 듯한 알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카렌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서 내일 목요일, 강신혁은 고장 난 아티팩트의 확인 겸 엘레노어 R. 알제와의 대련을 위해 결국 비룡기사단의 훈련소 2관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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