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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 Chapter 12. 비룡이 부르는 소리 - 1 >

- 정말로 고마워요, 누나. 농담이 아니라 누나가 적절한 타이밍에 포션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예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네가 무사했으면 됐어. 서두른 보람이 있네.

강신혁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감사 메시지를 받은 클레어의 대답은 정말로 시크했다.

넝마가 된 교복을 쓰레기통에 처넣고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 안에 다이빙한 채, 강신혁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넘쳐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 사랑해요 누나.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전에도 말했지만 난 연하는 별로니까 포기하렴.

단호하고 깔끔한 거절에 적잖게 풀이 죽긴 했지만 강신혁의 불굴의 의지는 그 정도로는 꺾이지 않았다.

- 이 은혜는 어떤 식으로든 갚을게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그 말은 좀 땡기는데. 그럼 우리 바에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걸로 하자.

- 앗.......

눈 깜짝하는 소리에 언질을 잡히고 말았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중2병 넘치는 공간에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녀가 강신혁의 목숨을 구원해준 것도 사실이니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순수하게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콜?

- 코, 콜........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좋았어. 넌 이제부터 우리 프론트라인 바(Front-line Bar)의 미스테리어스를 담당하는 서버(server)야.

- 미스테리어스 담당이라니……. 그런데 누나, 미국에 계시잖아요? 어떻게 제가 출근하죠?

강신혁의 지당한 질문에 클레어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까르륵 웃곤 대꾸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우리 바 한국에 차릴 건데?

- ……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자꾸 나한테 연금술사 이미지를 씌우고 멋대로 컨트롤하려는 미국 정부에 질렸단 말이야. 내가 그때 바텐더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잖아? 미국에서는, 하물며 뉴욕에서 바를 열었다간 맨날 정부 놈들이 귀찮게 굴 거야.

- 음, 누나? 한국에서 하면 더욱 귀찮아지지 않을까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그땐 정말 한국으로 귀화해버리겠다고 하면 돼. 장담컨대 더는 날 괴롭히지 못하게 될 걸.

그는 클레어의 터무니없는 막가파 정신에 존경심이 들었다. 그도 정부를 상대로 이렇듯 당당하게 뻐길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SS랭크가 되면 그럴 수 있을까?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지금 중요한 건 정부가 아니라 은아잖아. 너 어떻게 할 거야.

- 미안해요, 누나. 하지만 이미 반쯤 들켜있던 거나 마찬가지라서요. 우습지도 않은 연극을 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어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줄은 알았는데, 지금 심각한 게 뭐냐면 사실 은아가 너를…… 으아아아.

클레어는 메시지로 절규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조금 침착한 투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그래, 어쩌면 더 잘된 걸지도 모르지. 은아가 괜한 마음 품기 전에 잘 자른 걸지도…….

- 괜한 마음……?

- 바텐더 님의 귓속말: 아무것도 아냐. 과년한 손녀딸 앞으로 잘 돌보라는 얘기.

클레어의 메시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끊어졌다.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강신혁이 협회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과 관련된 얘기일까?

강신혁을 훌륭한 인재로 판단한 신은아는 다소 억지로라도 그를 협회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가 ‘모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개인적인 욕심을 포기했다, 뭐 그런 얘기가 아닐까?

‘과년한 손녀딸이라.’

신은아와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한 뭔가가 들어앉는 기분이었다. 시선을 내리니, 자신의 가슴팍 위에서 오닉스 녀석이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너 임마.”

- 뀨우뀨우우!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녀석 나름 애교를 피우는 듯했다. 솔직히 조금 귀여웠기에 머리를 살살 쓸어줬더니 만족한 기색으로 눈을 감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진짜 위험했을 테니까…… 당분간은 잘 해줄까.’

그는 녀석을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전투가 끝나고 아직 상태창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뭐가 성장했다는 메시지를 여러 개 보긴 했는데 그 당시엔 거기 신경을 쓸 경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태창.”

[강신혁 - A-랭크]

[특성]

금안의 환룡 (S)

[신체능력]

힘 - A-

민첩 - A-

체력 - A-

[특수능력]

영력 - B+

재생력 - B

[스킬]

환룡무(S+) - B+

야금술 - C

윈드 마스터리(A-) - D-

레지스트 포이즌(B+) - C

“하, 미쳤네 진짜.”

모든 신체 스테이터스가 A-랭크에 오른 것도, 윈드 마스터리며 레지스트 포이즌 스킬을 익힌 것도.

심지어 여왕거미의 막대한 경험치를 흡수하는 것으로 영력도 성장하여 B+랭크가 되었고,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D-랭크였던 재생력은 무려 B랭크가 되었다. 이젠 상처를 입어도 회복되는 것이 육안으로 쉽게 관찰이 될 정도가 된 것이다.

재생력이 뛰어난 곤충 몬스터들을 특히 대량으로 학살하고 다닌 탓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겠지만, 그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도 스테이터스가 너무 갑작스럽게 올라 적응훈련을 하던 차였는데, 심지어 거기서 더 대폭으로 성장해버리다니.’

만약 그의 상태창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할까? 그대로 기절해버리지 않을까? 이 정도라면 여태까지는 규격 외라고만 여겼던 그의 친구, 백인하와도 한 번 붙어볼만하지 않을까?

아니, 물론 그의 민첩과 특성의 조화를 아직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이번 일은 정말 위험했지만…… 그래도 대박이 맞았어.’

게이트에서 몬스터의 알로 가득 찬 둥지를 발견해 부수었더니 그 자리에서 스테이터스의 성장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도시전설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강신혁이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했으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성장폭으로.

- 더구나 자동 루팅 기능도 얻으셨지요.

"......."

강신혁이 성장의 환희에 취해있던 그때 관리자가 조용히 한 마디를 얹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자동 루팅 기능. 그것은 자신이 사냥한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들을 순식간에 분리해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오직 히어로 유니버스만이 제공하는 기능이었다.

심지어 인벤토리 기능과 연계되어 루팅한 부산물을 자동으로 인벤토리에 수납하기까지!

“완전히 게임이잖아요. 그것도 루팅도 인벤토리도 솔로잉 전용 기능 느낌이 팍팍 드는데.”

- 개발과정에서 그것을 참고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무척 훌륭한 기능입니다. 회원님께도 도움이 되었지요.

“오늘에 한해서는 말이죠……."

그 결과물이 어떤지 논의하는 것은 둘째 치고 과정만 놓고 보면 마법이 따로 없는 그 자동 루팅 기능은, 여왕거미를 해치우고 게이트가 붕괴되는 그 짧은 순간 여왕거미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확보, 인벤토리 안에 수납해주었다.

심지어는 그 공동 안에 널려있던 거미와 사마귀의 시체들로부터도 부산물을 확보했으니 과연 굉장한 기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가격이다.

“400만 HP나 할 줄은 몰랐다고요.”

- VIP 50% 특별 할인가가 적용되었기에 그 정도입니다. 본래 가격은 800만 HP일뿐더러 회원등급이 어지간히 높지 않으면 구매할 수 없는 기능이죠. 앞으로도 두고두고 도움이 될 기능이니 그리 낙담하지 마시길.

“게다가 그 부산물들을 전부 저장하느라 인벤토리까지 추가로 2칸 구매했고……."

- 인벤토리 역시 앞으로 회원님께 큰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물론 강신혁도 알고 있다. 자동 루팅도 인벤토리도 가히 권능에 가까운 힘이며, 있으면 무척 도움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약이 오른다. 인벤토리는 어떻게 아티팩트라고 둘러댄다 쳐도 자동 루팅은 도저히 사람들 앞에선 써먹을 수 없는 기술이니까!

- 루팅 기능도 아티팩트, 혹은 스킬이라고 둘러대시죠. 신비와 환상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어라, 듣고 보니 그것도 말이 되긴 하네요.”

아공간에 물건을 수납하는 아티팩트가 실존하는 마당에 몬스터를 자동으로 해체하는 아티팩트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구나. 강신혁은 순식간에 납득해 조용해졌다.

아무튼 자동 루팅 기능과 인벤토리 두 칸을 추가로 구매하면서 700만 HP를 쓰고, 남은 HP는 225만. 대체 그 게이트 안에서 얼마나 벌어들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수치다.

‘확실히 굉장한 금액이긴 하지만…… 오우거 파워 건틀렛이 다시 매물로 올라와도 못 사겠네.’

강신혁은 이쯤에서 아티팩트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털어내기로 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양한 재료들을 매입해 자신이 아티팩트를 만드는 쪽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득이 될지도 몰랐다.

아니지, 일단은 이번에 얻은 여왕거미의 부산물들을 비롯한 재료들을 가지고…… 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전리품이 있지 않던가!

“구슬.”

아직 그 구슬 조각들을 확인하지 않았다. 사마귀 둥지와 거미집에 각각 하나씩 박혀있던 것을 보면 분명 게이트의 핵심이 되는 물건이었음에 분명한데, 그것이 정확히 무슨 기능을 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굉장한 아이템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관리자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곧장 인벤토리에 집어 넣으라고 했던 것만 봐도 각이 나오지 않는가.

'......살펴볼까.’

그러나 그가 인벤토리에서 두 구슬조각을 꺼내려던 찰나, 밖에서 그의 스틱이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신은아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닉스는 여전히 달랑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있었다.

자, 우선은 ‘과년한 손녀딸’ 은아와 대화를 나눠야 할 차례였다.

@@@

약속장소는, 당연하지만, 교내였다. 정체모를 놈들에게 습격당한 그 당일 날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안 되었다.

사람의 이목을 모으지 않고 뇌제 신은아와 단둘이 담소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장소. 그들이 약속장소로 고른 곳은 다름 아닌 아티팩트 제작 동아리의 부실이었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다.”

이만우가 강신혁을 보자마자 내뱉은 소리였다. 동아리방 안에 신은아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전후사정은 그녀에게 다 들은 모양. 강신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든요. 저번에 만든 에이라이트 단창도 도움이 됐습니다.”

“회수해 왔겠지?”

“네, 물론이죠.”

사실 잃어버릴 뻔했는데, 자동 루팅 기능에 자신이 던진 투척물의 회수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던 덕에 간신히 회수할 수 있었다. 강신혁이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자동 루팅 기능을 구입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셈이다.

“경연에 낼 물품이니 다시 한 번 손질해두어라. ……그럼 오늘은 이만 자리를 비워주마.”

이만우는 신은아에게 한 번 시선을 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곱게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마지막에 강신혁을 돌아보며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녀관계는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것 다행이구만. 그럼.”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혹시 그는 신은아가 지닌 싸이코적인 기질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신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신은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을 읽혔을 리도 없는데 괜히 찔끔하며 자리에 앉는 강신혁. 신은아의 맞은편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입고 있던 정장이 아니라, 그녀의 고혹적인 신체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가죽치마를 입고 있었다.

성인 여성의 매력을 물씬 드러내는 복장이 그에게 괜한 압박감을 더했다. 역시 뭔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자리에 앉았음에도 신은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몸을 뒤트는 강신혁, 그를 더더욱 빤히 바라보는 신은아.

"그......."

“할부지?”

끝내 강신혁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신은아가 선수를 쳤다. 직구였다.

강신혁은 순수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일순 무수한 생각을 떠올렸으나, 이내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제가 모루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생의 기억은 아직 얼마 없지만요.”

“내가 ‘은아’라는 거, 바로 알았어?”

연달아 직구만 던져오는 신은아. 그것을 피할 수 없이 맨몸에 계속 얻어맞아야 한다는 것이 강신혁은 가장 무서웠다.

“네."

“그런데 왜 감췄어?”

“부담스러웠어요. 더구나 제가 정체를 밝히는 게 선배님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랬, 구나.”

강신혁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가 각오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완전히 생뚱맞은 것이었다.

"......은아."

“네?”

“선배님 말고 은아라고 불러.”

은아라고 부르지 않으면 강신혁의 얼굴 가죽을 뜯어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한도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하고 강신혁이 망설이자 그녀는 마지못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해줘.”

“그럼…… 은아.”

"응."

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라 그저 신은아가 활짝 웃었을 뿐이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여태껏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미소였다.

강신혁은 미녀의 미소는 빛 속성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배웠다. 그것도 어지간한 언데드는 한 방에 정화될 정도로 강력한 빛 속성이다.

“그럼 이제 됐어.”

신은아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신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반문했다.

“네?”

“반말.”

“아, 아니. 뭐가 됐다는 거…… 야?”

그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강신혁의 바로 옆자리였다.

“어, 어?”

“후우, 그러니까.”

강신혁이 당황하는 와중에 그녀는 강신혁의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살포시 뉘었다. 강신혁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음…… 이걸로 다 됐다는 얘기.”

“화, 안 내?”

“화나.”

“그러면.”

“할부지는 은아를 바로 알아봤는데, 은아는 할부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게 화나.”

모루라는 것이 확실해지니 지금 이 성숙한 미녀의 모습으로도 바로 유아퇴행을 하는구나. 솔직히 언밸런스가 지나친 나머지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샴푸 냄새, 살 내음이며 감촉에 아찔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강신혁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할부지한테 화를 내면 안 돼. 은아는 착한 아이니까 내 잘못을 남한테 떠넘기지 않아.”

"......."

묘하게 어른스러운 듯한,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이 같은 발언을 하는 신은아의 모습에 강신혁은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자라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불쑥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마 지금 그것을 묻는 것은 치사한 일이겠지.

"힉."

무슨 말을 하는 대신 그녀를 내려다보았더니 미약하게 벌어진 블라우스 틈으로 속옷이 보이는 바람에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그녀가 누운 채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강신혁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설마 눈치 챈 건가!? 강신혁은 헉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다행히도 그녀는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됐어. 이걸로 됐어.”

“……미안.”

“으응…… 할부지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강신혁의 사과를 못 들은 것처럼 그의 손을 쥔 손에 살며시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다시.

“할부지가 은아 곁에 와줘서 너무 기뻐.”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은 한 손을 신은아의 이마로 뻗은 것은 강신혁의 본능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날이 커져가는 모루의 기억이 불러일으킨 일일지도 몰랐다.

“응…… 후흐흐.”

그는 신은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타인이었으면 무척 무례하고 기분 나쁘게 여겨질 행동이었으나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정말로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피우는 손녀딸처럼.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강신혁은 연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전엔 막연히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면, 지금은 거기에 아직 어린 딸을 대하는 듯한 친애의 감정이 더해졌다. 모루의 영향일까, 하지만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할부지…… 너무 좋아.”

“그래도 할부지라고 부르는 건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떨까.”

“할부지, 나 할부지가 생일선물로 준 머리핀 계속 하고 있었어. 착하지.”

“……그래, 그래.”

“할부지 사랑해……."

할부지라는 단어에 게슈탈트 붕괴를 일으킬 것만 같은 상황이 얼마나 지속된 것일까, 문득 그녀가 바깥으로 돌아누웠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가, 자신의 무릎이 젖는 것을 느끼곤 화들짝 놀라 등을 곧추세웠다.

신은아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일까, 그는 감히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앞으론......."

이윽고 그녀가 가만히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앞으론 계속계속 같이 있을 거야. 계속계속 할부지랑......."

"......."

신은아는 그 후로도 세 시간 동안 강신혁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었다.

강신혁은 차라리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을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얌전히 그녀가 만족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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