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Chapter 11. 환룡, 바람을 타고 - 2 >
사물의 기억과 경험을 읽어내는 경험이라면 여태까지 실컷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대상의 격이 달랐다. 무려 A-급으로 변이한 이레귤러 게이트 전체였으니까.
‘부탁이니까.’
될까 안 될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그에겐 이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응답해줘.’
믿고 집중했다. 감히 전부를 읽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거미들이 가장 많은 곳, 그곳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 .......
대상의 격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일까, 처음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강신혁의 영력이 꾸준히 흘러들어가며 벽을 자극하던 어느 한 순간, 극도로 작은 소리가 그의 귀를 통하지 않고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 ......딸깍. ......딸깍.
그것은 아마도 천장 어딘가를 살금살금 기어가는 거미의 기척. 강신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에게서 가까운 천장 안의 통로. 거미의 위치는 물론 움직임까지도 희미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성공했다! 벽의 기억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특정의 자극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강신혁의 본능이 ‘이것이 맞다’고 느낀 순간, 바닥, 천장, 그 외 사방의 모든 벽면에 접해있는 거미에 대한 정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끄, 헉!?”
온갖 정보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와 미처 정리를 할 수도 없었다. 강신혁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는 와중에 어떻게든 이미지를 통제하고자 애썼다.
모든 거미의 정보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거미가 다니는 길, 거미가 많이 모여 있는 곳. 무수한 거미의 흔적이 겹친 것만으로 정보를 한정해 받아들이면……!
뭐라 감히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비명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며, 무수히 쏟아지는 이미지를 가다듬고 또 가다듬어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체계화된 정보로 정리했다.
그것은 마치 울퉁불퉁한 고철에 열을 가해 녹이고 두드려 하나의 검신으로 벼려내는 야금술과도 비슷한 작업.
당장이라도 손을 벗어나 튕겨나갈 것처럼 날뛰는 금속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 진정시킨다. 하나의 예술품으로 빚어낸다. 그 과정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던 금속은 이윽고 최강의 무기가 된다.
‘됐, 어……!’
얼마나 그렇게 정보의 연단을 이어갔을까, 비로소 강신혁의 뇌리에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신, 아니 깔끔하게 정리된 정보가 새겨졌다.
이레귤러 게이트의 구조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길이, 거미들이 목표로 하는 것과 놈들이 태어나는 산실까지도 그 모두가 간단명료한 지도로 압축되어 그의 머릿속에 남았다.
이제 더는 이 이레귤러 게이트가 적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거미들의 이동규모, 그들의 이동속도와 활동구역까지도 파악했는데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강신혁은 벽에서 손을 떼어내 연결을 끊어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읽지 못했던 것이 있다. 게이트의 변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변이한 거미의 산실이다.
복잡한 내부 구조가 더해진 것 같은데 그 부분에 집약된 마나가 너무나 강렬해 거기까지는 미처 영력으로 파고들 수 없었던 탓이다.
‘가만히 놔두면 위험하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강신혁은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거기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해치워야 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포션을 마시고 모두 한꺼번에 상대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루에 포션을 마실 수 있는 한도는 각 스테이터스 당 1회. 유지시간은 30분. 당연하지만 그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물론 다수의 적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 정말 읽어내신 겁니까?
“네. 어떻게든.”
여태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관리자의 메시지에 강신혁이 솔직하게 대꾸하자, 관리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놀랍다는 뜻을 표했다.
- 영력을 이렇게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분은 회원님뿐일 겁니다.
“하지만 영력이 소통의 힘이라고 했던 건 관리자님인데요.”
- 대개 그것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한정되게 마련입니다. 검이면 검, 몬스터면 몬스터, 혹은 자기 자신과의 소통밖에는 이루지 못하는 이도 있지요. 그러나 회원님께선 마치 한계란 없는 것처럼 만물과 소통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삶을 겪고 계시기 때문일까요, 혹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요. 관리자는 그저 놀랍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관리자에게서 이렇게 길고 열정적인 메시지가 날아온 것은 오랜만이 아닐까, 강신혁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자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그저 이렇게만 대꾸하고 말았다.
“제가 정말 맞았는지 지금부터 확인하러 가죠.”
강신혁은 70만 HP 조금 넘게 남아있던 데서 다시 10만 HP를 차출해 ‘벨크로 테이프’를 구매했다. 신발에 붙여놓기만 하면 어디에든 쉽게 달라붙었다 떼어낼 수 있게 해주는 물품으로, 이게 있으면 천장을 달라붙어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 괜찮으십니까?
“좀 어지럽지만 할 만해요. 벽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거미들의 감각도 어느 정도 익힌 덕에.”
- 뀨우우우…….
“넌 참아.”
그는 오닉스가 떨어지지 않게 품에 집어넣은 후, 가장 근처에 있던 천장의 구멍 통로 안으로 몸을 굽혀 들어갔다.
A-등급으로 진화하며 완전히 거미들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변한 이 게이트는 거미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내부 통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강신혁이 이용하고 있었지만.
‘은신은 유지되고 있고. 좋아.’
내부통로를 기어 다니는 거미들은 대개 소수일 테니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놈들이 주기적으로 신호를 주고 받는다는 것.
이 통로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그 순간 끝장이었다.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한 후여야만 했다.
- 딸깍 딸깍
통로 안을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으면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거미의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강신혁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강적. 교차하는 통로에서 거미가 자신의 코앞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심장소리로 은신이 풀리지는 않겠지.’
그런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할 만큼 맥박이 크게 뛰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안정시키려 몇 번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거미들은 시각과 후각 모두 뛰어나지 않다. 오직 촉각에 의지해 적을 탐색하고 공격한다. 따라서…… 그가 침착하게 기척을 감추고 이동하기만 한다면, 절대로 들킬 일은 없다.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안일했던 걸까, 또다시 교차하는 통로에서 나타난 거미 한 마리가 문득 입에 달린 더듬이다리를 딸깍거리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치 뭔가를 더듬어 찾는 듯한 모습에 강신혁은 한껏 숨을 죽였다.
- 딸깍딸깍
거미가 조금씩 강신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얻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일단 이놈을 죽이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떠야 하나? 하지만 통로 안에서는 금세 포위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물러나려고 괜한 움직임을 만들었다간 그때야말로 확실하게 들킬 텐데……!
'......이걸로 어떻게든!’
다급한 상황, 강신혁은 손아귀에 바람을 만들어내 쏘아 날렸다. 거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통로의 반대쪽에 착탄시켜 미약한 소음과 진동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숙련도가 F랭크였기에 미약한 수준으로밖엔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이지만.
‘영력의 소모 없이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
속성의 힘을 다루는 능력자들은 마력을 구사한다던데, 아무래도 가벼운 산들바람 정도는 아무런 소모 없이 구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영력을 주입하면 보다 강한 바람, 공격력을 품은 바람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나 F랭크 수준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 딸깍딸깍딸깍
한편 그의 의도 자체는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는지, 거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격하게 반응하며 진동이 일어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강신혁은 놈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최대한 빨리 기어 그 자리를 피했다.
- 뀨우
“조금만 더 참아.”
강신혁은 무척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통로를 거침없이 진행했다. 몇 번인가 더 거미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그는 윈드 마스터리의 새로운 활용법을 깨우쳤다. 그것은 바로 바람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거나 중간에서 끊어내는 것으로 그의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었다.
본래 그의 미약한 숙련도로는 택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오닉스의 은신을 같이 적용받고 있는 상황. 바람의 베일이 덧대어진 은신은 보다 완숙해졌고 은밀해졌다.
- ......회원님, 곧 게이트의 ‘핵’에 도달합니다.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관리자로부터 날아든 메시지에 강신혁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제가 읽어낸 정보는 정확했던 모양이네요.”
- 전투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더는 속일 수 없습니다.
“네, 그러니까…… 이쯤이려나.”
많은 거미들이 지금도 부산스럽게 이동하고 있는 통로의 중앙부. 다시 한 번 벽을 짚고 소통을 시도한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여기가 제일 취약하다.
“오닉스, 인벤토리에 숨어있어 ”
- 뀨!
오닉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동안 그래도 뭘 많이 먹여놨다고 제법 충성도가 오른 것일까, 어떻게든 곁에서 그를 돕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는 오닉스의 반짝이는 검은 눈망울을 보며 픽 웃곤 녀석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좋아, 그럼 날 꽉 붙들고 있어.”
- 뀨웃!
강신혁은 조심스레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칼날 앞발을 꺼내 쥐고는, 영력을 집중시키며 자신의 특성을 임의로 발동시켰다.
몇 차례인가의 실전을 겪으며 손에 익은 사마귀의 예리한 칼날, 그 위를 한 마리 용이 내달렸다. 강신혁의 눈도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간다……!”
이미 은신은 풀렸다. 주위에 있던 거미들이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딸깍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그때, 강신혁은 있는 힘을 다해 천장에 칼날을 박아 넣으며 바람의 칼날을 쏘아냈다!
윈드 마스터리의 영향을 받아 족히 두 배 이상으로 강화된 바람의 칼날을!
- 콰아아아아앙!
-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 키이이이이이이이이!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완벽히 구조상의 취약점을 공략당한 탓에 균열이 금세 이곳저곳으로 내달려, 정교하게 조성되었던 거미들의 통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큿!”
강신혁은 잔해와 함께 떨어지는 과정에서 몸을 뒤집으며 발을 디딜 곳을 찾았다. 자연히 통로 아래 드러난 공간이 그의 한눈에…… 한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너무나 거대한 공동이었으니까.
“미친……."
이미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마귀 알이 가득했던 공동도 나름 대단했지만 그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신영의 본관이 통째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 깊고, 어둡고, 거대한 공동 안을 무수한 알집이 가득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이란!
- 키이이이이이!
- 키이이이!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암사마귀 한 마리만이 들어가 있었던 사마귀들의 둥지와는 달리 이곳에는 무수한 숫자의 거미도 또한 함께 있었다.
여기저기서 생포해온 몬스터들이 거미줄에 칭칭 감싸인 채 녹아내려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미들의 양식이 되었고, 이미 에너지를 다 빨려 빈껍데기만 남은 몬스터의 사체도 한구석에 그득히 쌓여있었다. 아마도 게이트의 변이 전 ‘사마귀의 무덤’이란 명칭은 여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 키이이이이이이!
그나마 긍정적인 사실이 있다면 방금 강신혁이 효과적으로 통로를 폭파, 무너트린 덕에 알집 일부와 그것을 지키고 있던 거미들이 짜부라져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
외부에 나가있던 거미들도 내부 공동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무너져 접근할 수 없게 되었을 테니 일석이조였다.
그러나 강신혁은 망막을 가득 채우는 HP 획득 메시지를 보면서도 순순히 웃을 수 없었다. 수백 마리, 아니 그 이상으로 보이는 거미가 모두 강신혁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 딸깍딸깍
- 키이이이이
- 딸깍
찢어진 북을 두드리고, 녹이 슨 바이올린을 억지로 켜는 듯한 불협화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길한 붉은 눈이 자신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저들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던가? 그렇다, 자신이었다.
- 하급 힘 포션을 복용합니다. 30분간 힘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하급 체력 포션을 복용합니다. 30분간 체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중급 민첩 포션을 복용합니다. 30분간 민첩이 두 단계 상승합니다.
강신혁은 미리 준비했던 포션을 전부 마셔버렸다. 이로써 힘과 체력은 A-랭크에, 민첩은 A랭크에 올랐다. 적어도 게이트의 전력과 싸울 최저한의 준비는 갖추었다는 얘기다.
- 키이이이이이!
- 딸깍 딸깍
“좋아, 이제 해보자고.”
어차피 통로를 무너트린 시점에서 퇴로는 없어진 셈. 이젠 놈들을 상대하며 어떻게든 게이트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신혁은 이를 빠득 갈고, 애써 겁 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칼날 앞발을 쥐었다.
그때 문득 들어 올린 시선 저 너머로, 이 넓은 공동 끝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거미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는 거대 마법진,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알 하나.
‘저거구나.’
자신이 유일하게 읽어내지 못했던 것. 아마도 이 게이트의 핵심.
하지만 저기에 이르려면 일단 이 거미들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
침입자를 제거하겠다는 일념으로 몰려들고 있는 수백 마리의 거미를.
- 딸깍딸깍
- 딸깍
“어디 내가 여기서 죽어줄까 보냐……!”
그는 영력 회복 포션을 입에 물고, 칼날 앞발에 최대한의 영력을 불어넣으며, 자신을 노리고 무수히 쇄도해오는 거미들의 독 거미줄을 향해 있는 힘껏 그것을 휘둘렀다.
전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