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Chapter 11. 환룡, 바람을 타고 - 1 >
B+급 이레귤러 게이트로 끌려 들어온 와중에 어찌어찌 기책을 발휘해 적의 둥지를 하나 부수고 자신의 등급을 한 단계 끌어올렸더니, 놀랍게도 게이트의 등급이 상승해버렸다.
무슨 얘기인지 누구도 못 알아듣겠지만 이 일을 겪은 강신혁 본인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강신혁은 보다 좁게, 보다 끈적하게, 보다 답답하게 변화하는 게이트 내벽의 모습을 보며 그저 기가 막혀 한숨을 토해냈다. 관리자가 그를 대신해 침착한 메시지로 해설했다.
- 이레귤러 게이트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회원님의 활약으로 두 몬스터 세력 중 하나가 눈에 띄게 우세해진 까닭이겠지요.
“그건 살아남으려면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후회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능력자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게이트의 등급 역시 B+와 A-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법인 데! 마치 이 공간이 의지를 갖고 강신혁을 죽이려 드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다고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다. 아무도 모르는 이레귤러 게이트 안에서 죽으려고 여태까지 그렇게 노력해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급성장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느슨해지던 정신이 바짝 조이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건 고마울 정도지. 그는 빠득, 이를 갈며 변화해가는 게이트 내벽을 노려보며 관리자에게 물었다.
"관리자님, 제가 HP로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게 있을까요?”
- 있습니다. 스킬 스톤입니다.
거래 게시판에 스킬 스톤도 올라온단 말인가! 강신혁의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관리자가 빠르게 해설했다.
- 그중에서도 지금 상황에 시급한 것은 바로 독 내성을 갖게 해주는 ‘레지스트 포이즌(Resist Poison)’입니다. 회원님의 스테이터스는 거미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으나 독에 당할 경우 C-랭크의 재생력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독 내성이 더해 진다면 매번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살게요.”
- 희귀도 B급의 레지스트 포이즌이 200만 HP에 올라와 있습니다. 구매하시겠습니까?
역시나 터무니없이 비싸다. 그렇지만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곧장 그것을 구매해, 부쉈다. 녹색의 돌은 산산이 부수어지며 무수한 녹빛의 결정을 흩뿌리더니 자연스레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다행히 160만 HP(VIP 할인가가 적용되었다.)가 허공에 붕 뜨는 일은 없었다.
- 내성 스킬 [레지스트 포이즌(B)]을 익혔습니다. 재생력의 영향으로 [레지스트 포이즌(B)]의 희귀도가 상승해 [레지스트 포이즌(+)]이 되었습니다.
스킬을 익히는 와중 재생력 덕에 스킬의 등급이 오르기까지 했다. 스킬과의 상성이 빼어나게 훌륭하면 가끔씩 습득 과정에서 스킬의 희귀도가 오르는 경우가 있다던데 아무래도 거기에 당첨된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성 스킬은 재생력의 영향을 받는 걸까? 스무스하게 스킬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재생력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안도하고 있자니 관리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 다음으로는 액세서리를 추천합니다. 독 내성을 부여해주는 액세서리 중 가장 싸게 올라온 것이 130만 HP로…….
"아뇨, 독 내성에만 HP를 투자해선 던전을 돌파할 수 없을 거예요.”
- 하지만 회원님,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지만, 독 내성은 HP를 쓰지 않고도 따로 성장시킬 방법이 있잖아요.”
- 내성을 성장시킨다니, 지금 말씀이십니까?
관리자의 메시지에서는 곤혹스러운 감정마저 느껴졌지만, 강신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날 앞발을 들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손등을 노렸다.
그제야 관리자는 강신혁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독에 중독되려고 하는 것이다!
- 자해하시려는 겁니까!?
경악한 관리자의 메시지에 강신혁은 반박했다.
“성장하려는 거예요.”
- 회원님…….
스킬은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성장한다. 독 내성은 독에 저항할수록 성장한다.
F랭크의 스킬을 들고 바로 실전에 나서는 것보다는, 할 수 있다면 스킬 랭크를 조금이라도 높여놓는 게 유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용기를 지닌 회원님께 500HP 보너스.
“흐, 제법 격려가 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날을 들이대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윽, 그는 거침 없이 자신의 손등을 베었다.
- 맹독에 중독되었습니다.
“끄……."
- 회원님, 괜찮으십니까?
“독 기운이…… 제법 빨리 도네요.”
- 뀨우…….."
강신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하며 오닉스를 끌어안고 안전한 곳을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피부를 옅게 베인 정도라 상처 자체는 금세 회복되었지만 문제는 그와 함께 체내로 침투한 독 기운.
베놈 블레이드 맨티스의 독은 톡식 웹 쓰로워의 독과 비등한 수준이니, 이 독에 중독되고도 태연히 움직일 정도가 되면 더는 독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리라.
‘머리가 어지러워. 몸도 뜨겁고…….'
아까 암사마귀의 독에 당했을 땐 바로 해독약을 먹고 조치를 취한 덕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 독은 마치 그의 피를 불태우는 듯한 느낌을, 몸이 저릿저릿한 느낌과 함께 강한 현기증을 주었다.
만약 톡식 웹 쓰로워의 독도 이와 비슷하다면, 전투 중에 독에 당했을 때 치명적인 빈틈을 만들어내고 말 터였다.
- 회원님.
“괜, 찮아요.”
한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어지러움에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던 그는 어느덧 체내의 기운이 독에 저항하는 것을 느꼈다.
피다. 빠르게 순환하는 피에 담긴 힘이 체내로 파고드는 독을 뽑아내 산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마치 재생력이 레지스트 포이즌의 힘을 업어 진화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후우우우.......'
강신혁은 필사적으로 그것에 집중했다. 자신의 내부 깊숙이 침잠하여, 근원의 힘을 깨워 그것을 돕게 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그는 끝내 승기를 잡았다.
재생력만 있었어도, 영력만 있었어도, 물론 레지스트 포이즌만 있었어도 이 정도의 맹독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힘이 조화를 이루어 대응한 덕에 어떻게든 독을 몰아낼 수 있었다.
- 해독되었습니다. 레지스트 포이즌 스킬이 F+랭크로 성장합니다.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강신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독을 몰아낸 재생력은 그 기세를 몰아 짧은 시간 독에 의해 상처 입은 강신혁의 육신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재생력의 왕성한 활동에 따라 강렬한 허기를 느낀 강신혁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보존식량과 에이렌 젤리를 입 안에 욱여넣고는 다시 칼날을 들었다.
“적이 오면 말해줄 수 있죠?”
- 본래 관리자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습니다만…… 회원님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부탁해요.”
- ……관리자는 언제까지고 회원님의 편입니다.
관리자로부터 날아든 메시지에 씩 웃으며 그는 다시 날로 손등을 그었다.
재차 그를 덮쳐온 독 기운이 아까처럼 마냥 강렬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
- 해독되었습니다. 레지스트 포이즌 스킬이 D랭크로 성장합니다. 재생력이 C랭크로 성장합니다.
더 이상은 독에 당해도 머리가 어지럽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재생력까지 또 한 번 성장했으니, 이대로라면 독을 뿜어내는 놈들을 상대로도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판단이 든 시점에서 강신혁은 비로소 수련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흉내 내기 두루마리의 지속 시간은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HP를 쓰죠. 혹시 영력을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은 있나요?”
- 영력은 히어로 유니버스에도 제대로 다루는 이가 적습니다. 영력을 상승시켜주는 아이템 혹은 아티팩트라면 회원님 외에는 아마 누구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강신혁은 관리자의 메시지에서 숨은 뜻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이 공동 안에서 주운 부서진 구슬, 그것이 영력을 뿜어내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구슬의 나머지 반쪽이 이 게이트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그대로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니 의미가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힘. 힘은 어떨까요. 액세서리나 장비 같은 거.”
- 힘을 한 단계 성장시켜주는 오우거 파워 건틀렛이 300만 HP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마력 혹은 영력의 유무에 따라 힘을 더 상승시킬 수도 있는 고전적이고도 훌륭한 아티팩트입니다. 만약 독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이걸 바로 회원님께 추천드렸을 텐데…….
“……장비는 포기할게요, 그냥 포션을 사죠.”
A랭크까지에 한해 각 스테이터스를 30분간 한 단계 올려주는 하급 스테이터스 포션은 VIP 1차 개방이 진행된 지금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는 기본 품목으로, 병당 10만 HP였다.
놀랍게도 강신혁은 예전엔 비싸게만 느껴졌던 이 포션이 상당한 염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 스테이터스 포션은 하루에 하나밖에 쓰지 못하며 중복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럼 민첩 포션은 중급이 있으니까 살 필요 없겠네요. 힘이랑 체력을 하나씩.”
VIP 특별 할인가를 적용해 병당 8만 HP에 포션을 확보한 강신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진함을 느꼈다.
어쩌면 관리자가 아까 독 내성 아이템만을 추천했던 것은 그 외에 할 수 있는 준비가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관리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 회원님, 한 알 먹으면 30분 동안 힘을 한 단계 올려주는 폭주환이 세 알에 한 세트로 100만 HP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회원 등급에 따른 거래제한이 걸린 희귀상품으로, 구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물건입니다.
단순 가격으로 따져 스테이터스 포션의 세 배를 호가하는 가격. 하지만 관리자가 괜한 것을 추천했을 리는 없다.
아마도 하루에 하나밖에 쓰지 못한다는 포션의 제한과는 관계가 없는 아이템일 테고……. 그것뿐만이 아닐 터.
“그거 혹시 두 알 중첩해서 먹을 수도 있어요?”
- 세 알을 중첩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유지시간이 3분으로 줄어들뿐더러 후유증이 극심해집니다.
“뭐죠, 그 클레어 누나가 엄청나게 좋아할 것 같은 중2병 설정은……."
강신혁은 아이템이 지닌 페널티에 투덜거리면서도 그것을 샀다. 위기 상황에서 이것을 쓰면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줄 것 같았으니까!
VIP 할인은 실로 위대하여, 그것까지 사고도 114만 HP가 남았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껴둬야 했다. 흉내 내기 두루마리의 효과가 끊기면 다시 사야 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
- 뀨
칼날 앞발을 꼬나쥐고 일어서는 강신혁의 어깨 위로 올라온 오닉스가 칼날로 화한 가시를 날카롭게 세우며 전의를 고취시켰다.
제 나름 밥값을 하겠다는 듯했으나 아무리 봐도 아직 녀석에게 정면에서 싸울 능력은 없어보였다. 그는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는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전투가 벌어지질 않았다. 언제까지고.
두 시간이 지나 두루마리의 효과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강신혁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사마귀는 물론이고 거미도 발견할 수가 없는데.”
- 뀨우…….
더구나 게이트가 변이하며 내부 구조가 완전히 변화한 탓에 이젠 칼날 앞발에서 얻어낸 기억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 새로운 두루마리를 두 개 더 살 수는 있지만, 그 두 개를 다 쓸 때까지 게이트 안을 헤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그것을 상상한 강신혁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기척을 드러내고 다니면 거미가 나타날까? 차라리 그렇게 하면…… 아니.”
칼날 앞발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톡식 웹 쓰로워는 적이 만만치 않다 싶으면 곧장 증원을 부르는 몬스터다.
더욱이 이 게이트는 변이를 겪으면 그런 거미들에게 더욱 적합하게 구조가 바뀌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강신혁이 강해졌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적에게 덤비는 것은 만용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신혁은 우선 두루마리를 사 다시 은신을 재차 적용했다. 간신히 정신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적을 찾을 수 있는 아이템은 있나요?”
- 존재합니다만, 다른 회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품목인지라 지금은 재고가 없습니다. 더욱이 탐색 계열의 아티팩트는 가격이 너무 비싸고, 탐색 스킬의 스킬 스톤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결국 제 힘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네요.”
- 죄송합니다.
“아뇨, 히어로 유니버스 덕은 충분히 봤으니까요. 이건 어떻게든 혼자 해보죠.”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돌아다녀도 소득이 없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어떻게 하면 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적이 다니는 길을 알아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가진 능력 가운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답은 금방 나왔다. 영력뿐이었다. 애초에 그가 칼날 앞발을 통해 사마귀 둥지를 알아내게 된 것도 영력 덕분이 아니었던가.
물론 지금 그의 눈앞에 거미 사체 따위는 없지만, 어쩌면 거미보다 더 이 게이트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라면 눈앞에 있었다. 계속 그의 눈앞에 있었다.
‘실패하면 정말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래.
어쩌면 아까 같은 기적의 성장을 한 번 더 겪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신혁은 재차 심호흡하며 손을 들어, 게이트 내벽에 뻗었다.
기분 탓인지 맥박 치는 듯한 고동이 느껴지는 벽을 대상으로…….
그는 온힘을 다해 영력을 끌어올려, 소통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