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Chapter 8. 히로익 실드, 절망의 성벽 - 2 >
강신혁은 우선 상황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히로익 실드를 되찾으라는 퀘스트인 이상 저 실드를 성벽이라며 차지하고 있는 녀석들이 자신의 적이겠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보주를…… 물의 보주를 돌려줘!”
“빌어먹을 생존연합 놈들! 비열한 술수로 우리 오르드의 보물을 훔쳐가다니!”
“이 세상에선 힘이 곧 질서다! 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약해서 빼앗기는 것도 죄악이다!”
“오르드? 하, 먼 과거에 멸망한 나라의 패잔병 따위가 우리 성채에 도전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 전부 다 죽여 버려!”
없었다. 적어도 이 전장에서 선악은 명확했다!
강신혁은 전장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고함이나 절규를 몇 개 주워듣는 것만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성벽을 차지한 ‘생존연합’이 ‘오르드’라는 이름의 무리로부터 물의 보주라는 이름의 보물을 빼앗았고, 그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덤벼들었지만 성벽을 넘지 못해 처절하게 깨지고 있는 상황.
강신혁은 자신이 오르드와 협력해야 함을 깨닫고 우선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저기 특이한 옷을 입은 놈이 보인다.”
“뭔가 잔뜩 가지고 있는데! 빼앗아, 빼앗고 죽여라!”
“아니, 죽이고 빼앗아!”
성벽 위에 있던 자들 중 눈썰미가 좋은 이가 있었는지, 강신혁의 모습을 발견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하긴 중세 이하의 고전양식의 갑옷이나 천 옷 따위를 입은 이들 속에서 강신혁 혼자 세련된 현대복장을 갖추고 있었으니 여태껏 관심을 받지 않았던 것이 기적일 터다.
“죽여!”
성벽 위에서 쏘아내진 화살이 강신혁을 노리고 국지성 호우처럼 집중해 쏟아져 내렸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그저 아득한 심정을 느꼈다.
전장이니 눈먼 공격을 당하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의 몸에 지닌 것을 노리고 명확히 그를 노린 화살을 쏘아낼 줄이야.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회원님의 세상과는 다른 양식, 관습을 지닌 외계인이지요.
“외계인과의 첫 접촉이 이 모양이라니 그것 참 아쉽네…… 요!”
강신혁은 신살검을 뽑아들며 영력을 주입해, 허공에 흩뿌리듯이 휘둘러 신살검무의 궤적을 그렸다.
차기 마도왕으로 일컬어지던 미츠이 유타의 마법화살도 없애버렸던 그것이 평범한 화살조차 막아내지 못할 리 없다. 그저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의 전면을 가득 메웠던 화살들이 일제히 박살 나 흩어졌다!
강신혁은 검을 거두며 잽싸게 뒤로 빠졌다.
“능력자다!”
“화살을 모조리 피하다니…… 감히 우리 성채를 모욕해? 성벽의 마포를 가동해! 놈을 죽이고 가지고 있던 것을 모조리 가져와!”
성벽의 마포라 함은 곧 히로익 실드가 가지고 있는 특수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방패에 가해지는 타격을 에너지로 전환, 한 점에 모아 발사하는 반격기의 일종인데, 본래 적을 움찔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던 그것이 거대화가 되고 보니 일대를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살상병기로 화한 것!
“저건 못 막겠죠?”
- 피하셔야 합니다.
강신혁은 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신체를 활성화시킨 후 전속력으로 물러났다. 직후 그가 있던 자리를 강타한 마포에 의해 지면에 사람 열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죽어라!”
성벽 아래에서 오르드의 병사들과 싸우고 있던 생존연합의 전사들이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강신혁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날이 시퍼런 검이며 창을 보며 순간 경직되었던 강신혁은, 그 검이 일제히 자신의 목이며 가슴 등의 치명적인 부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낯빛을 굳혔다.
"......흣!"
“컥!”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병장기를 거침없이 쳐내고 습격자들과 자신의 간격을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절제된 검격은 짧은 궤적 안에 세 명의 목을 깔끔하게 추려냈다.
뒤에서 덤벼들었던 세 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차디찬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을 본 자들 전원이 흠칫해 뒤로 물러날 만큼 유려한 솜씨였다.
- 죄송합니다, 회원님. 설마 이런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관리자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퀘스트를 받은 순간? 아니, 초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강신혁은 사람의 목숨을 거둘 각오를 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몬스터가, 초인이 나타난 이래 세상에는 무력의 질서가 자리 잡았다. 더욱이 인류의 적은 비단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각성한 후 힘을 휘두르는 데 취한 나머지 욕망에 몸을 맡겨 폭주하는 악인들이 있었고, 원래부터 악인이었던 이가 각성하여 더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그 악인들을 규합해 세상을 전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초인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들과 맞부딪히게 될 것이고,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도 해야 할 터였다. 신영에서도 인간을 적으로 상대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설마 이런 형식으로 처음 살인을 겪게 될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잘 됐어.’
그 어떤 이유도 없이 물건을 빼앗겠다고 죽이려고 덤벼드는 상대라면 인간에 대한 살의만으로 움직이는 몬스터와 하등 다를 것이 없고, 강신혁 역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벨 수 있었으니까.
"......."
아니, 하지만 아니었다. 제아무리 시답잖은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해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고 사고하며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을 죽이는 순간의 느낌은 정말 못 견디도록 더러웠다.
“후우……."
- 뀨우?
강신혁은 잠시 그 자리에서 호흡을 골랐다. 검을 붙든 손이 떨리니 검날도 허공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론 전장에 있던 다른 이들은 강신혁이 보인 위용에 경악해 미처 그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 회원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젠 정말 괜찮아요.”
- 뀨웃, 뀨뀨!
“그래, 고맙다. 그래도 신살검은 안 줄 거야.”
- 뀨우.......
강신혁은 속에서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내며 서둘러 전장에서 물러났다. 남은 모든 영력을 최대한도로 끌어내 다리에 집중시켜, 이전 카렌 스트링필드와 2인3각을 했던 때를 되새기며 빠르게 내달렸다. 적들은 감히 그의 모습을 잡아내지도 못했다.
성벽 위에서는 아직까지 강신혁을 보며 뭐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정작 밑에서 강신혁의 칼부림을 본 이들은 감히 그에게 접근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를 놓아주었다. 덤볐다간 그대로 죽게 되었을 테니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러나! 일단 퇴각해!”
그때쯤 오르드의 병사들도 이대론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퇴각을 개시했다. 생존연합은 끝까지 화살을 쏘아내며 그들을 괴롭혔지만 적극적으로 쫓아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성벽 밑에서 싸우는 이들보다는 안전한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아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강신혁이 저들 같았어도 이런 압도적인 지리적 이점을 일부러 버리고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주제를 깨달아라, 더러운 놈들아!”
“똑똑히 들어라! 일을 하지 못하는 것들을 버리고 생존연합에 투항하겠다면 받아주지, 여자들을 모두 바치면 말이야!”
생존연합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며 퇴각해오는 병사들을, 강신혁은 전장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곳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기다렸다.
연합군의 성채는 깊숙한 계곡의 안쪽에 위치해있었고 그로부터 나오는 길은 외길이었기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퇴각해오는 이들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음?"
“아, 저 사람!"
사상자를 수습해 거지꼴로 퇴각해오던 병사들은 곧 강신혁의 모습을 발견하곤 소리를 질렀다. 하긴 무시하기엔 그의 현대식 복장이나 등에 멘 가방, 결정적으로 그의 어깨에 올라앉은 오닉스의 모습이 너무나 독특했다.
“아까 비열한 연합놈들과 싸울 때 나타났던 사람이야!”
“나도 봤어. 이 녀석은 정말 갑자기 나타났어.”
“연합놈들을 단칼에 셋이나 베어버리는 걸 봤지. 일단 연합 소속은 아니야.”
다행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생존연합과 달리 다짜고짜 강신혁을 공격하려 들지는 않았다는 것. 강신혁은 아예 마음을 놓지는 않았으나, 그들을 과하게 경계하지는 않기로 했다.
곧 멀쩡한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대표로 앞에 나서 강신혁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래. 목적이 일치할 것 같았거든.”
그러고 보면 말이 통하는구나, 강신혁은 그들에게 대꾸를 하다 말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관리자가 메시지를 보내 히어로 유니버스가 제공하는 기능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강신혁은 자신의 외국어 성적을 위해서라도 차후에 그 얘기에 대해 자세히 묻기로 결심했다.
“목적이라니……."
강신혁을 보고 가장 앞에 나서 말을 걸었던 병사가 그의 말을 듣고는 말끝을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강신혁은 병사 무리 안쪽에 있던, 투구를 깊게 눌러쓴 병사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즉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얘기였다.
“흠, 좋다.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도록 하지.”
병사는 아이컨택트 따위는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강신혁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동하지. 이곳은 놈들의 권역이야.”
“좋아.”
그들은 계곡을 완전히 벗어난 고원지대, 물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땅에서 멈추어 섰다. 강신혁은 그곳에 제대로 갖추어진 막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패잔병이라더니!
“그 표정을 보면 정말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지.”
“전혀 몰라.”
“좋다. 이쪽으로.”
막사에 도착한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하는 가운데 병사는 강신혁을 가장 큰 막사로 이끌었다. 역시나, 아까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던 병사를 포함한 세 명이 더 그 뒤를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얘기를 해볼까. 내 이름은…… 지크다. 이 병사들을 이끌고 있지. 직함 따위는 없다. 상급자가 방금 전투에서 죽었으니까.”
“나는 강……."
정체를 감추고 있는 우두머리와 연신 아이컨택트를 하며 스스로는 티가 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병사, 지크의 말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름을 대려던 강신혁은, 그러나 다음 순간 제 입을 닫고 말았다.
“모루. 모루라고 부르면 돼.”
“모루? 굉장히 특이한 이름인데, 혹시 가명인가?”
“막 지어낸 이름은 결코 아냐. 인식코드 같은 거지."
- 회원님께 300HP 보너스!
대체 무엇을 오해한 것인지 몰라도 관리자는 강신혁이 스스로를 모루로 칭했다는 것에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모루가 만든 방패를 회수하기 위해 모루의 마이 룸을 통해 온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은 뭔가 아니지 않은 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 그는 모루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루…… 그래, 알겠다.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넌 대체 어떻게 그 전장에 갑자기 나타났으며, 우리와 목적이 일치한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지?”
“특수한 마법을 이용했어. 내가 원하던 것이 있는 장소로 보내주는 마법이지.”
“마법……?”
- 회원님의 예술적인 설명에 감탄한 관리자의 50HP 보너스!
그는 눈썹을 찌푸리는 지크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도 너희가 절망의 성벽이라고 부르던 그 성벽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건 전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절망의 성벽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방패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 결코 돌파된 적이 없고, 대륙 멸망의 위기에서도 결국 그것을 성채로 삼아 안에 틀어박혔던 생존연합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스스로를 오르드라 칭하는 이 패잔병 무리와 생존연합이라는 무리의 낯빛이 달랐던 것은 그 이유였던가. 강신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방패가 맞아. 다른 세상에서, 그건 사람이 들 수 있는 크기의 방패였어.”
“……그 말은?”
뒤에서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던 진짜 우두머리가 목소리를 냈다. 여전히 투구로 가리고 있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랐으나 강신혁은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그에게 대꾸했다.
“난 다른 세상에서 왔어. 그 방패를 회수하는 것이 내 목적이고.”
“다른 세상이라, 아버님께 들어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몬스터 외에도 다른 세상에서 직접 넘어오는 이가 있을 줄은! ……아니, 회수라고?”
“그래. ……그건 내가 만든 물건이거든.”
양심의 가책은 지금은 일단 무시한다. 그는 모루로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왔다라…… 회수할 방법은 있고?”
“그건 지금부터 궁리해봐야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가 연합이라고 부르는 놈들을 해결해야 방패를 회수할 길이 열린다는 거야.”
“납득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신을 꽁꽁 감추고 있음에도 미처 감출 수 없는 품격, 그 위세는 분명 그가 사람의 위에 서는 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밀란 반 오르드, 망국 오르드의…… 왕자다.”
“말했지만, 모루야.”
“우린 오르드의 국보이자, 우리의 생명줄인 물의 보주를 놈들에게 빼앗겼다. 우린 반드시 그것을 놈들로부터 되찾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목적은 같은 셈이다.”
이미 전장에서 울려 퍼지던 양측의 고함만으로도 거기까지는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강신혁은 그저 망국의 왕자가 내민 건틀렛에 감싸인 손을 맞잡으며 한 마디 했다.
“동맹?”
“동맹.”
제법 쿨한 녀석일세, 생각하며 그와 맞잡은 손을 놓는 강신혁에게 밀란이 물었다.
“그래서 혹시 뭔가 구체적인 안은 없나? 아까도 봤다시피 우리는 저 성벽을 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 성벽, 방패의 제작자인 네가 공략법을 내줬으면 좋겠군.”
“성벽을 만든 기억은 없고 공성전을 해본 경험은 더더욱 없지만, 공략법이라면 하나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일단 묻는데 너희 궁병 없지?”
“궁병의 양성은 힘들다. ……극소수 살아남았었지만 전부 죽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지.”
강신혁은 자신이 멘 배낭을 힐끗했다.
그의 투창기…… 그러니까, 힘이 센 이가 창을 걸어 던지면 족히 수백 미터는 날아가게 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파괴적인 원거리 병기를 보며 말했다.
“너희 화덕은 좀 있어?”
그렇게 해서 강신혁은, 아니.
모루는 첫 번째 차원 퀘스트의 단추를 끼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