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Chapter 7. 새로운 신인왕 - 1
- 깡! 깡! 깡!
대장장이는 오늘도 모루 위의 쇳덩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 게시판을 통해 다른 세상의 금속을 구할 수 있게 된 후로, 그곳에서 구매한 금속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중이었다.
- 깡! 깡! 깡!
그런 잡다한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쓸데없는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창조의 열망과 기대감만이 남게 된다. 절대로 흩어낼 수 없을 것만 같던 분노조차도 날려버릴 수 있었다.
대장장이는 그것을 도피라 자조했으나 동시에 자신에게 허락된 안식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얻은 새로운 삶을 즐기는 방법을 어설프게나마 찾아가고 있었다.
- 미랑 님의 귓속말 : 모루, 그대는 왜 그 귀한 무구들을 헐값에 판매하려는 겐가? 가끔은 그것이 너무 미안할 때가 있다네.
무아지경에 빠져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을까.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로부터 갑자기 그런 물음이 날아들어, 대장장이는 제법 놀라하며 대꾸했다.
- 그게 헐값이라니, 나는 점점 가격을 올려서 내놓고 있네만······ 사실 지금도 너무 비싼 것이 아닐까 저어되지만 그래도 재료값을 충당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어서.
- 미랑 님의 귓속말 : 자네는 감히 그 가치를 절하당해선 안 되는 귀인이라 생각하기에 무례함을 알면서도 내 충고하지. 이대로는 문제가 있어. 자네의 작품들은 마땅히 그 가치에 맞는 가격에 거래되어야만 해. 그렇지 않고선 곧 주제모르는 것들이 신병이기를 들고 설치게 될 거야.
- 주제모르는 것들이라. 이런 말은 부끄럽지만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은 다들 재능을 인정받은 천재가 아닌가.
- 미랑 님의 귓속말 :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모루······. 물론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특출난 재주를 가진 이들이네. 하지만 그들의 인성을 모두 보장할 수는 없지.
- 허나 그것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겠나.
- 미랑 님의 귓속말 : 만약 그런 이들이, 자네의 작품을 헐값에 사들여 다른 이들에게 마구 퍼트린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 문제를 생각해야 하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대장장이는 곧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근사하고, 거대한 방패. 막연히 히어로 유니버스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멋진 용사를 떠올리며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방패를 제대로 존중할 줄도 모르는 이의 손에 들리게 된다면? 지키는 자가 아닌, 해치는 자가 이것을 들게 된다면?
- 그것은······ 문제가 있겠군.
- 미랑 님의 귓속말 : 물론 그대가 스스로 만든 무구에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하등 없네. 그대는 생산자일 뿐이니까. 허나 힘의 균형을 위해, 올바른 분배를 위해 그대가 만든 무구에 보다 높은 값을 책정할 필요는 분명 있다고 생각하네.
- 자네는 무척이나 멀리 보는군.
- 미랑 님의 귓속말 : 무얼.
분명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텐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 미랑 님의 귓속말 : 그저 헐값에 보물을 업어가는 무뢰배들의 모습에 배알이 꼴렸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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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창밖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기상, 하지만 그만큼 개운했다. 아마 단순히 오래 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동기화가 가속됩니다. 동화율 4.5%
자리에서 일어난 강신혁은 잠시 가만히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이전 얻었던 기억에 비하면 한결 밝아진 모루의 기억이 그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감정을 일부나마 다스리는 데 성공하여 한결 차분해진 노인의 기억. 그것이 어제 그렇게나 들떴던 자신의 마음조차 다스려주는 듯하여 기분이 묘했다.
사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과연 전생은 전생이다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동기화가 가속되며 모루의 기억을 얻은 이유다. 그가 무언가를 했던가? 아니,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 영력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침대맡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져있던 강신혁의 모습을 본 관리자가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 회원님께선 영력을 다방면에서 구사하며 끝내는 극적인 성장을 이루셨습니다. 영력은 근원의 힘이며 혼의 힘. 그것이 성장했으니 회원님의 혼 깊숙이 잠든 기억이 깨어나게 된 것이죠.
“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이제는 영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었기에 관리자의 설명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었다.
- 큐우우우······.
“이 녀석 덕분이라는 얘기죠.”
그는 어젯밤 자켓과 쿠션을 이용해 급하게 만든 이부자리에서 배를 까놓은 채 자고 있는 오닉스를 보며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비록 자신이 만든 강철창을 먹어치운 놈이지만 지금은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동아리방에서 몰래 철괴라도 가져올까요.”
- 동화율이 5%에 이르면 마이 룸 개방과 함께 1차 해방이 이루어집니다. 저 꼬마 불가사리가 먹을 만한 금속이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얼마 안 남았네요. 마음 같아선 그대로 동아리방에 처박히고 싶은 심정인데.”
오늘은 수요일, 즉 평일이지만 체육대회 다음날이라고 학교가 통 크게 휴일로 지정해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강신혁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스틱을 집었다. 마침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신은아 : 오전 11시, 지정한 장소에서.]
[신은아 : (링크)]
우선은 이 만남을 해결해야한다는 것이다.
어제 그에게 접근해온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 그 두 번째.
바로 초인협회와의 만남을.
‘협회를 만나는 건 좋은데 왜 바쁘신 몸인 뇌제가 직접 움직이냔 말이지······.’
물론 그가 모루라는 건 들통 나지 않은 것 같지만 여러모로 그가 뇌제에게 주목받고 있는 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강신혁은 단단히 각오를 마쳤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들키지 않도록 노력해볼 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협회의 지원을 얻어낸다. 그것이 오늘 뇌제를 만나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사실 뱅가드를 호쾌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 협회와의 만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어제 관리자와도 얘기한 부분이지만 사실 뱅가드가 대여해준다는 아티팩트들이 내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야. 그 외 다른 부분은 협회에서도 얼마든지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들이고, 무엇보다도.’
협회만이 지니고 있는 메리트가 있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초인,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일을 꽉 틀어쥐고 통제하는 기관!
만약 이들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강신혁은 학생이기에 받고 있는 제약의 일부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신영이라는 장소는 성장을 위한 수련원이면서, 동시에 그의 자유를 억누르는 교도소이기도 했으니까.
“후, 그럼 나가볼까요.”
강신혁은 간단하게 씻은 후 얼마 없는 평상복 중 그나마 가장 점잖은 것을 골라 입은 후, 신살검을 허리춤에 차고는 자고 있는 오닉스를 일별한 후 방을 나섰다. 이대로 방에 놔둬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이미 펫이라는 시스템으로 자신과 묶인 이상 괜찮으리라 믿었다.
뇌제 신은아가 제시한 만남의 장소는 신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강신혁에게도 제법 익숙한 거리, 바로 초인상가였다.
‘여긴 언제 와도 묘하네.’
서울에서 초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초인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 곳. 설령 청와대가 몬스터 손에 떨어져도 이곳 초인상가는 무사하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강신혁은 그 초인상가 내에서도 제법 비밀스러운 골목에 자리한 카페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기척이 확연하게 줄어들어, 특수한 종류의 결계가 적용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구석진 가게 안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카운터에 중성적인 외모의 젊은 점원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점내는 좁았지만 고풍스러운 장식이 군데군데 걸려있어 제법 분위기가 있었고, 한쪽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약속이 있으신가요?”
“네, 여기.”
강신혁은 스틱의 링크를 열어 홀로그램으로 된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냈다. 점원이 굉장히 세련된 바코드 리더기 같은 것을 들어 그것을 스캔하더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곧 강신혁의 스틱에 [2층 09실]이라는 문자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리더기로 문양을 읽어낸 것으로 일종의 신호가 보내져, 출입허가가 떨어진 모양이다. ······다만 굉장히 요란을 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 원래 이런 곳이에요?”
“역시 처음이셨군요.”
점원은 키득 웃더니 비밀 얘기라는 듯 강신혁의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말해주었다.
“다들 폼 잡고 싶어서 이럴 뿐이에요.”
“그렇구나. 저도 그럴 것 같더라고요.”
강신혁은 점원과 미소를 교환하곤, 오더를 넣은 후 곧장 계단을 올랐다. 09실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재차 스틱이 진동하더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아······.”
뇌제, 신은아는 그 안에서 혼자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클레어가 함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었지만 아니었다.
“안녕.”
그녀는 강신혁의 모습을 확인하곤 찻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얼음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서늘하고, 완벽한 미모의 주인. 흑단 같은 머릿결에선 흠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앞머리에 장식된 황금빛 헤어핀이 그나마 애교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찬란한 황금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금안이 강신혁을 주시하며 그를 자연스레 위축되게 만들었지만 그는 클레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것을 어떻게든 이겨냈다.
“안녕하세요.”
“내가 다시 보자고 했었지.”
“네.”
도무지 생각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말하는 신은아.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강신혁의 입장에선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어. ······설마 그게 그 다음날 바로 개화할 줄은 몰랐지만.”
“아티팩트 덕분이었습니다.”
“신영이 창립되고 수십 년, 신인전에서 우승을 거둔 모든 이가 너보다 좋은 아티팩트를 갖고 있었어. 겸손도 적당히 해둬.”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강신혁이 순순히 앉자 신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는 굉장히 뛰어나고, 앞으로 더욱 강해질 거야. 그런 너를 후원하고 싶어.”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걸 다들 좋아하나 봐요.”
“뱅가드?”
“네.”
“쯧.”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볼 겸 던진 말에 신은아가 곧장 반응했다. 다만 혀를 차는 것이 뱅가드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거기에 응했어?”
“아뇨.”
“후······ 흡.”
가벼운 안도의 한숨. 직후 정신을 차린 듯 그녀가 다급히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마침 그때 문을 노크하는 이가 있었다. 점원이 강신혁 몫의 음료를 들고 온 것이다. 휘핑크림이 많이많이 올라간 카페모카였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점원은 강신혁과 마주앉은 뇌제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보이곤 나갔다. 하긴 그녀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 이미 한 번 봤을 테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크흠.”
점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신은아가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표정에서 변화는 찾기 힘들었지만 멀쩡한 자신의 헤어핀을 괜스레 더듬는 모습에서 그녀가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실례했어.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이상하게 네가······ 음, 조금 편하게 느껴져서.”
“편하게 대해주시면 저야 감사한 일인데요.”
실은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 커피 잔을 붙잡는 강신혁의 손이 동요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진다니, 그가 모루라는 증거도 없이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래······ 그럼 얘기를 계속하지.”
다행히도 강신혁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듯, 신은아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입장을 분명히 해두고 싶어. 우린 너를 구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
“그러면 원하시는 건······.”
“단 두 가지. 졸업할 때까지 다른 길드에 소속되지 않는 것, 국적을 바꾸지 않는 것.”
“······그게 조건이라고요? 끝인가요?”
“그래. 우리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면서, 협회에 대한 네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 판단해. 그거면 충분해.”
나머진 종이로 확인하라는 듯 신은아가 손짓했다. 그 안에는 정확히 강신혁이 원하던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다달이 협회의 이름으로 지원금이 나오며, 신청 시 C급에서 C+급까지의 아티팩트들을 대여할 수 있고(뱅가드는 무려 B급까지였다.), 협회 소속 초인의 허가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미낙찰 게이트의 탐사가 허락되고, 나아가 원한다면 비밀리에 새로운 신분을 얻어 활동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E등급까지라고는 하나 협회에서 보관하는 기밀에 대한 열람권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말도 안 되게 이쪽에만 유리한 조건이었다.
“협회에 소속되는 것도 아닌데 이만한 혜택을 준다니······.”
“다른 대형 길드의 지원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진 않아. 그들도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게이트를 탐사하곤 하니까. 단지 협회는, 보다 수월히 보다 자유로이, 보다 많은 활동이 가능하지.”
“만약 제가 이런 혜택을 받아 챙긴 후, 졸업하고 다른 길드에 가입해버리면?”
“탓하지 않아. 너 좋을 대로 하면 돼. 단지 내가 지금 너를 이 자리로 불러낸 건 네가.”
그녀는 홍차를 마저 마신 후 작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협회가 바라는 인재이면서, 협회를 원하는 인재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 만약 그게 틀렸다면 나 스스로를 탓하면 될 일이야.”
“그렇군요.”
협회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을 했지만, 아마 이것은 강신혁에 대한 테스트이기도 할 것이다. 능력이 있다고 초인협회에 아무나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일 터, 앞으로 3년간 그의 활동을 지켜보며 협회에 적합한 인재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것이겠지.
다만 강신혁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뛰어난 활약을 하면 어차피 주목은 받게 되어있다. 협회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른 많은 길드,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주시하겠지.
여차할 상황에 의지할 세력을 고른다고 할 때, 협회는 다른 무엇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튼튼한 뒷배였다.
“한 가지만 더 말해주자면.”
이미 강신혁이 판단을 마친 것을 모르는 신은아가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힘을 바르게 쓰고 싶다면, 협회가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거야.”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곳에 대한 의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굳건한 신념을 지닌 이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과 말투.
할부지, 할부지 하고 애교를 피우는 어린아이 같기만 했던 ‘은아’와 지금 강신혁의 눈앞에 있는 뇌제 신은아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그 갭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강신혁은 뇌제를 ‘은아’와는 아예 별개의 인물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힘을 바르게 쓴다. 그것 하나만은 처음부터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부모님을 잃은 그날, 턱밑까지 차오른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던 어린 강신혁을 구한 이는 다름 아닌 협회 소속의 초인이었으니까.
‘많은 특권과 의무를 동시에 지는 사람들. 위험한 게이트 사태에 가장 먼저 나서야 하는 사람들. 그 어떤 길드보다도 많은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 ······정확히 내가 바라는 그대로야.’
스스로 강해지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강신혁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모루와 강신혁이 가장 근본적인 영역에서 일치하는 감정.
바로 몬스터에 대한 증오.
그는 몬스터를 상대하고자 강해지려는 것이다. 부도 명예도 그 부산물에 불과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뇌제 님.”
“······앞으론 선배라고 불러도 좋아.”
강신혁이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하는 말에 머뭇거리길 잠시, 신은아는 그렇게 답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위해 맞잡은 뇌제의 손은, 첫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