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Chapter 6. 알을 깨고 나오다. - 2
오후 점심시간이 끝나고 바로 시작된 계주에서는 그 누구보다 백인하가 단연 주목을 받았다.
평소 까불거리며 되도 않는 농담이나 치고 다니는 녀석이지만 그의 재능은 진짜 중의 진짜. 바턴을 건네받자마자 자신보다 앞서있던 3학년 선배를 여유롭게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그의 모습에 ‘속도로는 이미 신영 최고가 아닌가’하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백인하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소년이 활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으니,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하, 저 아이가 그분의······.”
“앞으로 대한민국의 초인산업이 어찌될런지.”
“여러 의미로 기대되는데 그래.”
신입생의 패기를 보여준 계주가 끝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은 초인 항목이 차례차례 치러졌다.
그중 가장 시선이 집중된 것은 물론 반 대항 몬스터 헌팅. 외부에서 포획한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반 단위로 학생들을 묶어 실제 전투를 펼치게 하는 것으로, 몬스터에게 ‘살생 금지’라는 금제를 걸어놓았다고는 하나 실제로 상당히 위험한 장면이 전개될 여지가 높았다.
다만 그럼에도 실제로 적지에서 몬스터와 맞서 싸우는 초인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빼먹을 수 없는 과정이기도 했고, 신영에서 치러지는 대 몬스터 교육의 성과가 한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대회라고 할 수 있었다.
“설마 B급 몬스터를 포획해올 줄은 몰랐는데······.”
“다들 미리 연습한 대로 조별로 나뉘어 대처한다! 잡을 수 없는 몬스터는 없어!”
“공략 정보 지참하고 있지? 흩어져!”
“3시 방향 둘! 7시 방향 다섯! 대응해!”
신영에서 수학하며 몬스터 실습, 던전 실습, 자율과제까지 몇 번이고 거친 2학년, 3학년 선배들은 관록을 보여주듯 차분히 안정된 모습으로 대회를 치렀다.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이 그대로 졸업 후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광대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들의 능력, 동료와의 협동심을 강조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 몰아붙여!”
“이 바보가, 아직 체력이 한참 남은 놈을······ 튀어, 비늘 쏟아진다!”
“갑각늑대는 정수리를 가격당하면 비늘을 세워서 발사한다고, 분명히 예습해놓고!”
한편 아직 몬스터와의 실전 경험이 일천한 1학년들은 살기를 드러내는 몬스터들을 앞두고 침착하지 못해 실수를 연발했다.
곳곳에서 이탈자가 속출하고, 몬스터를 상대로 무기를 놓치고는 창백해져 바닥을 구르는 이도 있었다. 현직 초인인 능력자 관객들은 그것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거나 큰 목소리로 훈수를 두곤 했다.
“야야, 11시 방향 무너진다! 얘들아 몬스터 돌진 진형 짠다!”
“그래도 역시 신영은 신영이야, 도망치는 놈들은 안 나오잖아.”
“예비 엘리트들인데 가오가 있지 몬스터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겠어? 이야, 다들 힘내라!”
“거기! 야야, 그래도 소환마법은 놔두면 안 되지!”
“올해도 재밌네!”
사실 이 일련의 꽁트는 매년 반복되어 온 것으로, 본디 그 누구도 이제 입학한지 두 달이 갓 지난 학생들이 거칠게 날뛰는 몬스터를 상대로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학생들이 난다 긴다 하는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들은 아직 미성숙하고, 경험이 부족했으니까.
제아무리 사전에 대형을 연습하고 대회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몬스터들에 대한 예습을 마쳤다고는 해도 실전이 주는 공포감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몬스터 실습 때와는 달리 선생의 참관 없이 학생들만으로, 여럿이 똘똘 뭉쳐 한층 강화된 살기를 뿜어내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침착하게 대열을 갖춰!”
“쯧, 너흰 그냥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흡!”
“그래도 몹몰이용으로는 제격이네. 너희 거기 가만히 있어라!”
물론 신영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은지라 그런 가운데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제법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은 으레 그런 이들에게 꽂혔다. 거기에는 물론 강신혁도 포함되었다.
‘워 트롤 때도 느꼈지만.’
- 아우우우!
강신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용 너클로 1학년 C클래스에게 주어진 적 ? D급 몬스터 갑각늑대의 코를 정확히 타격해 물러나게 하며 생각했다.
‘나는 실전에 제법 강한 것 같아.’
워 트롤과의 조우 당시, 죽음이 목전에 닥쳐왔던 그때도 그는 적의 살기에 잠식되어 몸이 굳거나 하는 일 없이 바로 대처했다. 머리는 팽팽 회전하고 있었고, 육신은 생각대로 바로바로 움직였다.
그것은 어째설까. 영력 덕분일까, 희미하게 남은 전생의 노인의 기억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이 타고난 본성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그는 전면으로 달려드는 늑대의 몸통을 정확하게 걷어찼다. 동시에 옆에서 짓쳐드는 놈을 너클로 타격 후 밀어냈다.
쓸데없이 죽이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클래스의 대형에 접근해오는 모든 놈들을 걷어차고 밀어내는 데에 주력했다.
신체능력의 밸런스가 좋고 무술에 능해 동시에 다수의 적을 막아내는 능력을 지닌 강신혁은 제자리에서 우직하게 버티며 클래스의 방진을 두텁게 하는 역할. 놈들을 마무리 짓는 것은 이 반에서 가장 빠른 두 명의 몫이었다.
“여친이 있어서 그런가 역시 하체가 탄탄하네, 시뇩이!”
“아니라고 새꺄!”
“백인하 쟤는 멀쩡하게 생겨갖고 왜 저렇게 저질이야?”
“그건 나도 궁금하다.”
속도 관련 특성 중에서도 최상위 특성을 타고난 것으로 알려진 백인하와, 그에는 못 미치지만 높은 민첩 수치를 지닌 데다 신경을 강화하는 특성으로 순발력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카렌 스트링필드.
그 둘이 빠르게 움직이며 직접적인 마무리 타격을 담당하고 있었다. 속도는 곧 힘이고, D급 몬스터 정도로는 갑자기 나타나서 급소를 공격하는 둘 앞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 캥!
“읏차!”
“그쪽 네가 맡아!”
“오키!”
겉으로 보기엔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상황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만약 강신혁이 없었다면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지킬 인력이 부족해 백인하나 카렌이 더 무리를 해야 했겠지만 너클을 쥔 양손을 사방으로 뻗어내며 늑대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강신혁은 족히 탱커 3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니, 다른 아이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7인분쯤은 될지도 몰랐다.
“강신혁······ 개쩌네 진짜.”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저거?”
“마나 안 쓰고 있지? 근데 주먹에서 나는 소리는 왜 저렇게 무시무시한데?”
“야, 저 새끼한테 활약 다 뺏길 거야? 한심하게 굳어있지 말고 우리도 좀 싸우자, 싸워!”
굳건히 버티고 선 채 두 주먹으로 연신 늑대들을 두들겨 패는 강신혁의 존재감 덕일까, 1학년 C클래스는 다른 클래스보다 빠르게 제정신을 되찾고 그나마 활약할 수 있었다.
백인하는 이런 단체전에서 혼자 날뛰어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노골적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고, 결국 마지막 늑대의 목을 꺾은 것은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던 카렌 스트링필드였다.
“이걸로 끝!”
그녀가 늑대의 목을 짓밟으며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바로 부저가 울리고 1학년 C클래스의 기록이 전광판에 새겨졌다. 역대급까지는 아니어도 굉장한 수준의 하이스코어였다.
“예상시간보다 빨랐는데! 1학년 중에서는 우리가 제일 빠른가?”
“아니, 마법학과 I클래스에 밀렸어. 저 새끼들 반칙 쓴 거 아냐?”
학년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지닌 이들이 산재한 클래스이다보니 기사학과 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몬스터를 전멸시킬 수 있었지만 마법학과에는 이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I클래스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각자 특성에 따라 방어, 공격, 견제 등등 구사할 마법을 약속해놓고 차례대로 개방해, 몬스터들과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놈들의 80%를 날려버렸으니까. 실전의 긴장감이고 자시고 맛볼 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걔네는 그만큼 개개인의 능력 어필은 힘들걸. 단순히 빨리 잡느냐 못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니까.”
“암튼 우리 다 잘했어!”
“와 지쳤다. 크게 다친 사람 없냐? 곧 치료사 오니까 바로바로 거수해야 돼.”
“백인하 아까 보니 진짜 멋지더라. 저기서 주접만 안 떨면 진짜 좋을 텐데······.”
“카렌이 최고야. 아까 실수로 고백할 뻔함.”
우수한 성적을 거뒀음을 확신한 반 아이들이 활기차게 떠드는 가운데 강신혁은 다친 곳이 없는지 점검한 후 뒤로 물러나 한숨을 내쉬었다. 백인하가 자연스레 그 앞에 나타났다.
“시뇩이 멋졌어. 아주 날아다니던데.”
“네 얘기지?”
“아냐, 강신혁. 진짜 쩔던데? 우리 반이 중간에 무너지지 않은 건 너랑······ 좀 그렇지만 도우진 덕이었어.”
백인하의 말에 강신혁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젓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것인지 어느덧 카렌까지 그에게 다가와 한 마디 던졌다. 이번 대회의 에이스들이 나란히 그런 말을 하니 강신혁은 그제야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강신혁의 장기인 정교한 몸놀림과 치밀한 기교는 일대일에서도,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난전에서도 유감없이 빛난다. 그보다 신체능력이 앞서는 것도 아닌 늑대들이 한 번에 몇 마리가 덤벼들든 물러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물러나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인상 깊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우진이야······ 뭐, 마력이 많으니 활약했겠지.’
도우진은 본래 C+랭크에 상당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실 특성은 그 이상으로 뛰어나지만, 그것을 제대로 발현하면 페널티가 크기 때문에 평소엔 부속 스킬들만 응용하는 정도라고.
그러니 C클래스의 다른 녀석들은 오늘, 여태껏 마나도 못 다룬다며 무시하던 강신혁과, 제대로 특성의 힘을 이끌어내지도 않은 도우진보다도 못한 성과를 보였다는 얘기다.
“다들 제정신만 차리고 있었으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집단전은 처음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러는 시뇩이야말로 뭐가 그렇게 능숙해? 꼭 몬스터들과 싸우는데 익숙한 현직 초인이라도 된 것처럼.”
“능숙은 개뿔, 그냥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부터 차례대로 두들겼을 뿐인데.”
“······시뇩?”
“야, 이 자식이 멋대로 그렇게 부르는 거니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라.”
강신혁은 카렌의 입가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다급히 변명했지만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짓궂게 웃으며 강신혁에게 제안했다.
“아까 뇌제 님이랑 했던 얘기가 뭔지 알려주면 그 애칭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시뇩아.”
“뇌제!? 너 뇌제랑도 만났어!?”
“아, 진짜.”
이번엔 백인하가 떡밥을 물었다. 강신혁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녀석을 힘껏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다.
“별 거 아니었어. 그냥 오늘 경기 잘 봤다는 얘기였지.”
“뇌제 씩이나 되는 초 유명인이 너 한 명만 콕 집어 다가와 놓고 하는 말이 정말 그걸로 끝이었어?”
“그렇다니까. 자, 애들 부르는 것 같으니까 가자.”
“수상한데······.”
“진짜라고.”
강신혁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렌과 백인하의 등을 떠밀며 1학년 C클래스가 모인 곳으로 향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뇌제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모루라는 걸 알아보고 다가온 줄 알고 식겁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뇌제, 신은아는 강신혁을 빤히 바라보나 싶더니 갑자기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겠냐는 말을 했다.
세계 초인 랭킹 500위 안에 드는 하이랭커의 접근에 카렌은 정신줄을 놓아버렸고, 강신혁 역시 들킨 게 분명하다며 벌벌 떨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오전 경기를 봤어.’
‘강신혁이라······ 기억하고 있겠어.’
‘남은 경기도 기대하지.’
그녀는 그렇게 세 마디를 건네더니 다음에 보자며 쿨하게 떠나갈 뿐이었다!
그럴 거면 당최 둘만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있었는지, 그를 그렇게 뚫어지게 봤던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를 모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는데. 만약 그랬다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리가 없어.’
한결같이 차갑게 굳어있던 뇌제의 얼굴표정을 떠올리며 강신혁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한 표정, 딱딱한 말투. 그 여자가 정말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자신을 할부지라고 부르며 따르는 어린아이말투의 ‘은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자신을 모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왜 먼저 자신에게 접근한 것인가. 역시 그녀도 클레어처럼 영력을 느낄 수 있는 능력자일까? 같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인 만큼 그 가능성은 충분했다······. 클레어는 못 알아본 것 같지만.
“시뇨기, 왜 그래. 내일 신인전 땜에 그래?”
“응? 아니······ 어, 응. 그래. 그것 땜에.”
강신혁의 복잡한 얼굴을 본 백인하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뇌제에 대한 얘기를 더 해봤자 자폭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강신혁은 그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때마침 스틱이 울렸다. 꺼내서 확인해보니 내일 있을 신인전의 토너먼트 대진표가 전송되어 있었다. 16강전의 상대는······ 바로 도우진.
“하.”
고개를 드니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도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쓸데없이 뜨거운 녀석이라 생각하며 강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란만장했던 신영 체육대회 첫날이 어느덧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