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Chapter 4. 드러나는 송곳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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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6시, 강신혁은 정확히 2시간 수면을 취하고 일어나 보존식 두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본래 초인인지라 일반인보다 적게 자도 피로가 모두 회복되는데, 증혈 버프의 영향으로 지금은 수면시간이 거기서 더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 츠쿠요 님의 귓속말 : 질긴 것······. 아직 스스로 아이디를 지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요.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모루 영감, 건강한가. 아니, 이제 영감이 아니었던가.
- 시카투스 님의 귓속말 : 슬슬 생존신고 좀 하지? 환생인가 뭔가 하고는 무기 안 만들어, 아저씨? 나 프로즌 드레이크한테 씌울 굴레 하나만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잘잤엉? 은아는 지금 깼어!
히어로 유니버스의 친구들이 밤사이 보낸 메시지가 또 쌓여있어 그것들을 대충 훑고, 자신과 비슷한 타이밍에 깨어난 것으로 보이는 은아에게 우선적으로 답장을 해두었다. 그 외에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에게는 전부 답신을 했다.
‘이 츠쿠요라는 여자는 전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직 동기화가 덜 되어 그가 알지 못할 뿐이지 전생의 모루와 은아 이상으로 깊은 관계였던 걸까?
다만 그러든 말든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기에 일단 그녀는 무시하기로 했다. 대응을 해도 같은 말만 날아오니 무시가 답이었다.
반면 스마트폰 대용 휴대 단말······ 스틱 쪽은 더 간단했다. 백인하로부터 잡담이 몇 건, 그리고 클레어로부터 문자가 한 건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바텐더 누나 : 뉴욕 도착. 보상금 입금됐다던데 확인했니?]
[나 : (이모티콘)]
[나 : 다음에 한국 들어오심 제가 커피 쏨]
답장은 금방 왔다. 서울은 새벽이어도 뉴욕은 오후일 테니까 그도 당연했다.
[바텐더 누나 : ㅋ]
[바텐더 누나 : 나 캔커피 안 마시는데]
[나 : 아예 카페를 통째로 사다 드림ㅋㅋㅋ 그런데 폰보다 히어로 유니버스 귓속말이 더 편하지 않아요?]
일단 둘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친구등록을 해놓은 상태다. 어찌 보면 지당한 그의 의문에 클레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바텐더 누나 : 그건 서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서 싫어]
[바텐더 누나 : 은아랑도 어지간하면 통화하거나 문자로 해]
[나 : 글쿠나······]
[바텐더 누나 : 근데 게이트 안에선 폰 안 터지니까 귓속말이 좀 편하긴 하지]
[바텐더 누나 : 그래봤자 구조요청할 상대는 은아밖에 없지만]
[바텐더 누나 : 나 밥 먹으러 간다 너도 식사 거르지 마]
[나 : 넵]
역시 외모와 성격의 갭이 심하다니까······. 강신혁은 사랑과 존경을 담은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클레어와의 대화를 마쳤다.
“좋았어.”
기분 좋은 대화로 기운이 났다. 그는 스틱을 집어넣고는 다시 본격적인 단련을 개시했다.
최대한 중간에 휴식을 넣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허기가 몰려올 때마다 보존식을 꾸역꾸역 먹다보니 곧 어제처럼 영력이 멋대로 폭주하며 심층의식을 끌어냈지만, 이번엔 야금술을 하고 싶다느니 도피하고 싶다느니 하는 헛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으로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후우욱.”
무아지경에 빠져 영력수련을 병행하며 단련하다 보니 자연히 영력이 고갈되는 타이밍도 찾아왔다.
그럴 땐 보존식 대신 에이렌 젤리를 먹어 영력까지 보충했다. 특식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행히도 영력이 성장하며 총량이 많아진 지금은 영력의 자연회복량도 성장한 덕에 소모가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백인하 : 시뇩이 지금 단련함?]
[나 : ㅇㅇ개인실]
에이렌 젤리를 먹는 사이 날아든 백인하의 문자에 짧게 답을 해주고 다시 단련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보존식을 다섯 개쯤 더 까먹고, 에이렌 젤리를 하나 더 먹은 시점에 간신히 웨이트 트레이닝이 끝났다.
“후우, 후우우······.”
그는 바벨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마음 같아선 힘이 C-랭크로 오르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 붙들고 있고 싶었지만 스테이터스를 올리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던가? 여태까지는 년 단위로 꿈꾸던 일이던 것을!
아직 증혈의 효과가 끝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강신혁은 스스로를 설득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늘의 두 번째 수련으로 넘어갔다. 바로 아룡환무 수련이었다.
“후.”
에밀 볼튼이 준비해준 훈련용 무구 중 가장 먼저 장창을 들었다. 장창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익힌 모든 종류의 무기를 번갈아가며 수련할 셈이었다.
아룡환무의 수련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전날 워 트롤을 상대로 펼치며 몸에 익혔던 검무를 신살검과의 영적인 연결 없이, 다른 병장기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 무술 수련에 초월적인 도움을 주는 특성 ‘깨어난 아룡’이 있으니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둘째는 여의주를 빼앗긴 이무기(A-)가 깨어난 아룡(A+)으로 진화하면서 새로 추가된 능력, 무기 강화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손에 쥔 무기의 성능을 강화한다.’는 사항에 대해서.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들면 변화가 없어.’
강신혁은 자신이 쥐고 있는 장창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순히 손에 쥔 무기가 아니라, 뚜렷한 본인의 의지를 담아야만 강화되는 것이 분명했다.
‘이 능력의 온오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돼. 지금까지는 필요한 타이밍에 바로바로 발동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곤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무기 성능이 강화되는 정도도 뚜렷이 파악하고 싶었다. 자신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은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니까.
“······시작하자.”
강신혁은 짧은 한 순간, 전날 펼쳤던 검무를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 움직임을 고스란히 창으로 옮겨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닌 뜻이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며, 천천히, 허공의 한 점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어느덧 창에는 기어가는 지렁이 같은 문양이 나타나 있었다.
@@@
오후가 되어 백인하가 단련실을 찾아왔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헐.”
“왜 왔냐.”
그때 강신혁은 창에서 쌍검, 단검, 봉, 망치에 이어 채찍술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신살검무(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를 다른 무기술에 적용하는 부분은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무기강화 특성은 제법 컨트롤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시뇩이 너 이거 진짜 들 수 있어?”
“엉.”
강신혁은 잠시 채찍을 내려놓고 바벨을 들어보였다. 백인하는 그 바벨의 무게를 체크해보고는 허, 하는 탄성을 발했다.
물론 백인하는 그 바벨을 여유롭게 들 수 있었지만 그건 그가 신영의 1학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엘리트이기 때문이고, 대다수 1학년생에겐 마나를 써서 몸을 강화해야만 간신히 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마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친구가 들다니!
“진짜 산삼이라도 주워 먹은 거 아냐? 어떻게 단기간에 이렇게 세져?”
“성장했다고 했잖아.”
“어떻게 성장한 건지 힌트라도 좀 줘봐.”
그 말에 강신혁은 말없이 검을 들더니 그것을 백인하에게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검신에 새겨지는 기이한 문양. 몇 시간 동안 훈련하며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무기 강화 특성이 드러났다.
“와우.”
백인하는 그것을 보며 바로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바로 알아보는 것만 해도 역시 이 녀석은 범상치 않았다.
“그거 혹시 스킬이야?”
“아니, 특성. 특성이 강화됐다고 말했잖아.”
“미친, 이건 강화가 아니라 진화 수준 아냐?”
“비슷하지.”
“와 진심 돌았네!”
특성이 진화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케이스는 지극히 적었다.
다만 처음부터 강한 특성을 얻는 경우보다, 약했던 특성이 진화하는 경우가 보다 강하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다. 똑같은 A랭크 특성이라도 처음부터 A였던 것보다, 진화해서 A가 된 특성이 더 강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떤데?”
“A+.”
“대박이네!”
백인하가 환호하며 강신혁을 껴안으려 들었으나 강신혁은 노골적으로 질색하며 그것을 피했다. 백인하는 그래도 좋다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역시 우리 시뇩이가 한 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이러다 막 마력까지 각성하는 거 아냐?”
“흥.”
마력은 아니고 영력이긴 하지만 이미 각성했는데!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코웃음을 쳤지만 속으로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강신혁은 기겁하며 은근슬쩍 그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도 백인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혼자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성이 진화하면서 스테이터스까지 단숨에 올랐구나. 게다가 특성으로 무기가 강화되는 거면 마력이 없어도 몬스터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겠네. 가만, 그러면 더 강한 무기를 들수록 유리해지나?”
“아마.”
깨어난 아룡으로 인한 무기강화는 영력으로 인한 강화를 대충 얼버무리기에 딱 좋은 능력이었다.
일단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니 사람들은 거기에 집중하게 되지 않겠는가. 영력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그걸로 전부 속여 넘길 자신이 있다.
“그럼 진짜 신인전 나갈 만하네. 내년엔 나랑 투왕전에서 붙겠는데?”
“그땐 아마 내가 다 이길 거다.”
“자신감 쩌네.”
강신혁의 말을 허풍이라 비웃기엔 그의 태도가 너무 담담했다. 백인하는 이 친구가 감추고 있는 게 뭔가 더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강신혁이 말해주고 싶을 때 스스로 말해주길 기다리기로 했다.
“맞다, 시뇩아. 말해주려던 게 있어서 온 거였는데.”
“뭔데?”
“이번 체육대회에 뇌제가 온대!”
“······왜?”
반문하는 강신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인트로만 듣는데 벌써부터 불안했다.
“협회 측 대표로 오는 거지. 게다가 뇌제도 신영 출신이잖아.”
“그러냐······.”
“미리 말해둔다. 뇌제는 내가 찜했으니까 시뇩이 넌 포기해라.”
“인하야.”
강신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합을 넣는 백인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강신혁과 만나고 처음으로 듣는 상냥한 목소리에 백인하는 조금 긴장했다.
“어, 어?”
“파이팅이다.”
강신혁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백인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 톨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백인하는 당황하면서도 굳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내가 뇌제 꼬셔서 차기 협회장 함 해본다 내가!”
“그래그래.”
백인하는 그 이후로도 체육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 강신혁에게 쫓겨났다. 귀중한 증혈 버프를 그 이상 낭비할 수는 없었다.
“뇌제가 온다고······.”
백인하를 쫓아 보낸 후 강신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리 그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수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클레어 누나가 곧 들킬 거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신혁은 지금도 30분 단위로 날아드는 은아로부터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인상을 썼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들켰을 경우, 그 후로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 숨겨보자.”
나중엔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조차 수습하기 바쁜 지금은 그녀에게 정체를 드러내봤자 귀찮아질 뿐이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믿고 있는 지금조차 이렇게 귀찮게 구는데!
······하지만 정말 숨길 수 있을까? 클레어한테도 한 방에 들켰는데 자신을 할부지라고 부르며 따르는 은아에게서 숨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정말 숨겨야 할까? 그 뇌제가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데······ 아니, 아니아니.
“에이, 수련이나 하자.”
강신혁은 은아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직 신살검무를 다른 무기를 통해 발현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오전에 비해서는 명백히 발전해 있었다. 깨어난 아룡은 적어도 무술을 단련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가장 뛰어난 특성이니까!
채찍에서 망치로, 다시 검으로, 창으로.
보존식, 보존식, 에이렌 젤리, 보존식.
도끼로, 채찍으로, 단검으로, 검으로.
에이렌 젤리, 보존식, 보존식, 보존식, 에이렌 젤리.
- 우우웅
그렇게 잡념을 잊으려 집중하고 또 집중하던 한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무기가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음?”
강신혁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손에 신살검을 쥐고 있었다. 그에게서 뻗어난 영력이 신살검을 깊이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검과 말 그대로 하나가 된 느낌,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 신살검이 도끼에 담긴 힘을 모두 소화하는 데 성공하여 C랭크로 성장합니다.
- 신살검이 흡수한 도끼가 품고 있는 기억의 일부를 열람합니다.
“어······?”
타이밍을 맞춰 나타나는 메시지에 강신혁이 탄성을 흘린 바로 그 순간.
도끼가 품고 있던 강렬한 근원의 이미지가 강신혁의 뇌리를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