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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Chapter 4. 드러나는 송곳 - 2

강신혁이 반 아이들에게 며칠 전과는 다른 의미로 깊은 인상을 남긴 괴물생태 강의가 끝난 후, 종례 시간이 되어 담임이 반에 들어왔다.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다들 정숙하도록.”

1학년 C클래스의 담임, 시아라 베르트랑. 역시나 외국인이면서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이 초인 강국이 아니었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그녀는 올해 40세의 나이로 국제초인랭킹 5천위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S급의 초인으로, 프랑스의 초인으로 활약하며 유명세를 떨쳤으나 지금은 이렇게 한국으로 넘어와 신영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수업실력도 좋은데다, 많은 마나를 품고 있는 초인의 노화는 느린 탓에 아직까지 전성기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어 학생은 물론 다른 선생들로부터도 인기 만점이었다.

“쌤도 어제 싸웠죠!”

“쌤 찍힌 영상 돌던데 존나 멋짐.”

“저도 채찍으로 때려주······.”

“조용!”

교탁을 가볍게 내리쳐 분별없이 까부는 학생들을 닥치게 만든 후, 그녀는 담담히 수업용 메인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 체육대회에 대한 공지였다.

“같은 내용의 자료가 전송되겠지만 여기서 일단 확인해두세요. 대회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뉩니다. 3학년까지의 모든 클래스를 묶어 반으로 나눈 청백 단체전,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모든 클래스 중 단 하나의 우승팀을 선발하는 반 대항전, 마지막으로 개인평가에 반영되는 개인전.”

“와 미친 드뎌.”

“다 불태운다. 내가 개인 MVP 따고 만다.”

“네 다음 D랭크 능력자~”

학생들이 소란을 떠는 가운데 다시 한 번 교탁을 내리쳐 학생들을 침묵시킨 담임이 말을 이었다.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모든 학생은 단체전, 대항전에 각각 한 종목 이상 반드시 참가해야 하며, 개인전은 지원자를 위주로 진행됩니다. 개인전은 예선에서부터 엄격한 평가가 이루어지므로, 어쭙잖은 실력으로 참가했다간 오히려 평가에 마이너스를 받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도록.”

과연 신영, 체육대회조차 안심하고 즐길 수 없는 나이트메어 난이도였다.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스크린을 살폈다.

선생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가 흥미를 가진 것은 오직 개인전뿐이었다. 개인전은 그 특성상 대개 1대1 결투의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그중에도 종류가 제법 갈렸다.

‘마법학과 기사학과 가리지 않고 전 학년이 참가 가능한 투왕전, 각각 기사학과와 마법학과의 최고를 가리는 기사왕전과 마도왕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올해 입학한 신입생만이 참가할 수 있는 신인전! 신입생에게는 가장 문턱이 낮은 대회이면서, 그런 만큼 피 터지는 결투의 장이기도 하다. 그때 스틱이 울렸다.

[백인하 : 시뇩이 신인전 나갈 거야?]

[나 : 엉. 너는?]

그렇다. 개인전에 참여한다면 백인하와 싸울 가능성도 생긴다. S급 특성을 보유한데다 현 시점에서 A랭크 수준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 중의 괴물. 아무리 지금 자신이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지만 백인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백인하 : 난 투왕전. 투왕전 나가면 신인전에는 지원 못하니까 시뇩이랑은 못 싸우겠네.]

[나 : 돌았네, 투왕전······.]

그러니 돌아온 백인하의 답변에 분명 안심해야 할 텐데, 강신혁은 안도에 앞서 굴욕감을 느꼈다.

신인전은 분명 신입생 중에 최고를 가리는 대회다. 하지만 백인하는 이미 신입생이 아닌 학교 전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야가 달랐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후우, 한숨을 토해내며 답했다.

[나 : 투왕전 우승해라. 난 신인전 우승할 테니까.]

[백인하 : 내가 다 이김. 시뇩이도 다 이겨라]

[나 : 엉 나도 다 이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그가 앞서 달리고 있는 사람을 질투하며 달리려 해도 금세 넘어질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두 다리로 대지를 단단히 딛고 일어서는 데에 집중하자. 달리는 것은 걸음이 안정된 뒤에 해도 충분하다. 그는 재차 다짐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법 진정이 되었다.

“단체전과 대항전 참가목록은 월요일 종례 때 집계하겠습니다. 개인전 참가희망자는 마찬가지로 월요일 방과 후까지 나를 찾아오도록. 이상입니다. 스틱으로 전송되는 자료를 모두 꼼꼼히 읽어보고 결정하도록.”

“쌤 저! 저 신인전!”

“저 투왕전 나가요 투왕전! 우승트로피 쌤한테 바치면서 청혼하면 받아주심?”

“서류를, 갖춰서, 찾아오도록.”

종례가 끝나자마자 소란을 떠는 학생들의 머리를 일일이 출석부로 가격해 격추시키는 담임의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바를 뜯어 물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부터 곧장 식량을 확보해 기숙사에 처박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날아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강신혁 학생.”

“옙.”

엉겨 붙는 학생들을 처리하고 이제 막 서류를 챙기고 있던 시아라 베르트랑이 그를 부른 것이다.

혹시 종례가 끝나자마자 에너지바를 꺼낸 게 잘못이었나? 설마 평가에 마이너스가 들어가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입학한지 두 달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봤던 미소다.

“설마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줄은, 감탄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모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어, 옙.”

그분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아마 아티팩트 제작 동아리의 이만우를 말하는 것이겠지. 설마 제법 특별한 사람이었나? 원래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러나 강신혁이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 담임은 이미 서류를 챙겨 자리를 나서고 있었다. 쫓아가서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요한 일이라면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백인하 : 우리 쌤을 낚다니 너 혹시 레알 연상 킬러······.]

[나 : 아니 너 지랄 진짜.]

@@@

강신혁은 신살검 한 자루만 달랑 멘 채 초인상가에 들러 보존식량을 구입했다.

초인이 게이트 안에서 장기간 활동하게 될 때를 대비해 개발된 그 보존식은 비교적 싼 값에, 작은 크기로, 한 끼 열량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맛도 있으면서 영력까지 보충해주는 에이렌 젤리와 비교하면 하찮을 따름이지만 강신혁이 쓸 수 있는 HP도 얼마 없는 이상, 현금으로 때울 수 있는 부분은 현금으로 처리하는 게 좋았다. 특히 워 트롤의 처치 보상금이 입금된 지금이라면 더더욱!

[강신혁 님의 계좌에 229,105,55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처음 강신혁이 그 문자를 봤을 땐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왜 들어온 것인지는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 액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억2천9백만원이라니!

혹시 단위를 잘못 읽은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맞았다. 정말로 억을 넘는 돈이 강신혁의 계좌에 꽂힌 것이다!

그래도 도저히 못 믿겠어서 인터넷으로 몬스터 사체의 시세를 조사해봤다. 일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몬스터 사체라고 모두 팔리는 것이 아니고, 팔리는 놈들은 따로 있다는 것.

F급 몬스터는 대개 돈이 안 되고 E급부터 조금씩 돈이 되기 시작하는데, 종류별로 차이는 나지만 팔리는 놈들만 골라서 말하자면 대개 10만원 언저리.

D급은 종류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최소 30만원에서 최고 500만원.

C급은 최소가 200만원에, 최고가 3,000만원.

그리고 대망의 B급은 최저가 깔끔하게 1,000만원인데, 최고가는 무려 4억! 심지어 워 트롤은 B급 중에서도 희귀 개체인지라 그 4억에 근사한 값을 보인다고!

‘다만 그 값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심장을 떼어내 버렸으니까.’

그래서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게 정상인데, 강신혁이 잡은 워 트롤은 변종이라는 판정이 났기 때문에 심장을 제외한 육체도 가격이 뛰어 결국 이만한 돈이 입금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과 며칠 전까지 몇 만원에 목을 매던 강신혁이 순식간에 부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진짜 부자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액수고, 연금술사의 포션까지 마시고 워 트롤을 상대로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기에 벌 수 있었던 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회가 깊은 것은 사실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버티기엔 충분할 거야. 이제 품위유지비 안 아껴도 된다······!’

환희하는 동시에 깨달았다. 어째서 무수한 인간이 초인을 꿈꾸는지. 어째서 낮은 등급의 초인들이 그렇게나 기를 쓰고 승급을 위해 애쓰는지.

급수가 달라질 때마다 몬스터를 상대해 버는 돈의 단위가 달라지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에 집착하고 싶지도 않지만, 돈이 많으면 여러모로 편해.’

지금도 그렇다. 보존식이 싸다고는 해도 그건 초인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일반 학생이 대량으로 확보하기엔 조금 부담이 가는 금액이었으니까. 그런데 돈이 있으니까 어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돈은 시간의 낭비를 줄여주고, 보다 편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고, 보다 뛰어난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강신혁이 보다 빨리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 그보다는 많은 HP를 확보하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HP로는 현금으로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의 상위호환이 되는 물품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VIP 제한이 조금만 더 풀리면, 각 스테이터스의 성장을 촉진하는 제품을 직접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강신혁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관리자의 말에는 그도 십분 동의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 게시판에는 정말이지 없는 것이 없었으니까. 특히 초인의 전투와 성장을 보조해주는 물품은 기가 막힐 정도로 충실하다는 것을 그도 요 며칠 뼈저리게 알았다.

“저도 알고 있어요. HP를 확보하면서 회원등급의 제한까지 푸는 일······ 즉 동화율을 높이는 데 힘을 쓰라는 얘기죠?”

- 바로 그렇습니다. 몬스터를 사냥해도 HP를 확보하며 회원등급을 올릴 수 있지만 현재 회원님의 신분으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제아무리 그가 예비 초인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예비.

양성학교 학생의 신분으로는 방출형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괴물과 싸우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 안에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 지속형 게이트(흔히 던전이라고 불렀다.)에 들어가려 해도 어디서 아무도 모르는 지속형 게이트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은 굉장히 귀찮은 절차를 밟고 진입 신청을 해야 했다.

“바로 그러니까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동기화가 완료될 때까지, 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초인이 될 때까지 버티게 해줄 현실의 돈이.”

- ······과연, 납득했습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회원님의 모습에 감동한 관리자의 10HP 보너스!

“이쯤에서 한 번 줄 것 같더라니. 고마워요.”

모든 회원들이 이렇게 자주 서비스를 받고 있는 걸까, 강신혁은 문득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즐거웠으니까. 얼마 안 되는 액수라고는 해도, 듣기 좋은 메시지였다.

“······좋아, 그러면.”

자신을 앞으로 만 이틀간 버티게 해줄 충분한 양의 보존식을 구입한 강신혁은 그대로 기숙사로 향했다.

이미 개인 단련실 신청서는 내두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즉 지금부터 일요일까지 통째로 하나의 방을 빌리기 위한 신청서를.

“강신혁 학생, 보존식까지 챙겨온 걸 보면 준비는 확실히 된 것 같네.”

단련실 앞에 에밀 볼튼이 서 있었다. 그에게는 강신혁이 따로 부탁한 것이 있었다.

“옙, 볼튼 선생님. 수면도 최소한도로 줄일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최근 눈에 띄는 성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그걸 온전히 수습하려는 모양이지.”

“옙.”

증혈 버프의 효과를 온전히 뽑아내기 위함이지만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더구나 에밀 볼튼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단기간에 폭증한 신체 스테이터스에 적응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음. 좋아. 부탁했던 것들은 안에 있으니 들어가서 확인해보도록 해.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대련 한 번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현역 랭커로 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에밀 볼튼과의 대련이라면 오히려 이쪽이 매달려야 할 정도다. 강신혁은 에밀 볼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단련실 안으로 들어섰다.

큰 방의 한 켠에는 체력단련을 위한 기구가, 다른 한 켠에는 온갖 훈련용 무구들이 놓인 것이 보였다. 에밀 볼튼이 확실하게 준비해준 것이다.

“······좋아.”

강신혁은 심호흡을 한 후 보존식 더미를 바닥에 쌓곤 그중 하나를 입에 물었다. 맛이 없었지만 꾹 눌러 참고 그것을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그 후 챙겨온 신살검을 일단 벽에 기대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녀석이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검술 수련은 잠시 후에 할 거야.”

- 우우웅

“그래, 이번 주말 내내 질리도록 할 거다.”

- 우웅

신살검은 그저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강신혁은 피식 웃으며 검신을 몇 번 더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영력을 깨닫고 이 검에 자아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무래도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신살검에게 말을 걸 때가 많아졌다. 강신혁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런 꼴을 보이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무튼······ 시작해볼까.”

강신혁은 곧장 체력단련을 시작했다. 무술 단련도 영력 수련도 물론 중요하지만, 뭣보다도 힘을 C-랭크로 성장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으니까!

그는 평소보다 중량을 수십 킬로그램 이상 늘려 웨이트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이것도 가벼워.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늘어난 힘만도 장난이 아니었구나.’

이제 D+에 이른 자신도 이런 감상을 느끼는데 과연 C, B, A랭크의 힘을 지니고 있는 초인들은 어떨 것인가. 더구나 그 힘을 마나로 강화까지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쯤 되면 인간의 힘으로 건물을 들어 올리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초인, 인간을 초월한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태까진 상상도 못하던 경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 실감했다. 이대로 노력하면 자신도 언젠가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좋아······ 진짜 제대로 하자.’

그는 근육에 심한 부하가 느껴질 때까지 중량을 늘렸다. 마나를 품은 초인의 재생력은 장난이 아니기에 일반인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과격한 방식의 트레이닝도 얼마든지 소화해낼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수련하기에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마나를 다루지 못했던 이전의 강신혁은 꿈도 꾸지 못했던 방법. 하지만 영력을 다루게 된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몸을 순환하며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영력이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더구나 증혈 버프까지 있으니 정말 무서울 것이 없었다.

“훅, 후욱······!”

강신혁은 그 순간부터 미친 듯이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바벨의 무게가 무거워져갔지만 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력이 빠르게 순환을 하며 그의 근원을 자극하기 시작했다는 것.

‘고통스럽다.’

‘편해지고 싶어.’

‘팔이 아프다.’

‘하지만 즐거워.’

‘고통이 나를 성장시켜주고 있으니까.’

몸으로는 꾸준히 바벨을 들어 올리면서, 그의 정신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를 관조했다. 운동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보다 편하게, 솔직하게 스스로와 마주할 수 있었다.

‘수년간 체력단련을 거듭했지만 개미 눈꼽만큼 성장했을 뿐인데 과연 이런다고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은 달라. 노력한 것 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어. 반드시.’

‘포기하고 싶어.’

‘아니, 나는 지금 나아가고 있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그저 쇠를 두드리고 싶어.’

‘그건, 도피다.’

잠깐만. 도피? 쇠를 두드리는 게 도피라고? 그건 체력단련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좋은 수단인데?

강신혁은 문득 바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력의 흐름이 뚝 끊겼다. 지금 그는 다른 누가 끼어들 틈도 없이 오직 자기자신과 마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 그가 떠올린 생각들도 모두 자기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도피라니······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혹시 모루의 기억인가? 강신혁은 가만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시 영력을 뻗어봤지만 스스로에게 깊이 몰입해있지 않은 탓인지 아까와 같은 본능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동기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가.’

아까부터 멸망한 세상에서 홀로 망치로 쇠를 두드리던 노인의 모습이 자꾸 뇌리에 아른거렸다.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현실을 잊으려 대장일에 몰두했던 노인의 모습이······.

“미안한데.”

강신혁은 그 노인의 등을 향해 가만히 말을 걸었다.

“이젠 사정이 달라졌어.”

모루의 세상은 망했지만, 이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야금술은 도피였지만, 강신혁에게 야금술은 도피가 아니다.

강신혁이 사는 곳은 메르바가 아닌 지구다.

“그러니 안심해. 난 도피할 생각은 없으니까.”

모루가 자신의 전생임을 인정한 강신혁이 모루를 달래는 것은 아마도 자기위안의 한 종류겠지.

하지만 아마 이것도 모루와 동기화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강신혁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아. 나아간다.’

모루는 도피하던 끝에 능력을 얻었다지만.

강신혁은 그 능력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음, 역시 자신은 아직 중2병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래도 좋지만.

“으랏차.”

강신혁은 다시 양손으로 바벨을 잡았다. 한층 무게가 더해진 바벨을, 근육이 파열될 것만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힘껏 들어올렸다.

‘언젠가 메르바를 다시······.’

순간 짧은 상념이 뇌리에 떠올랐지만, 그도 이내 강신혁의 기합과 함께 흩어졌다.

남은 밤 내내 그는 그렇게 단련에 매진했다. 긴 밤, 그의 기합성만이 단련실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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