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Chapter 1. 내 안에 할배 있다. - 5
- 꼬르르르륵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가 띵했다. 온몸의 피부가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기분. 고아원에서 자라면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복감이었다.
“이거······ 이거 왜 이러는 건가요. 관리자 님, 설명 좀······ 해줘요.”
강신혁은 화장실 빈칸에 굴러들어가듯 처박혀 변기 위에 주저앉은 채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관리자가 곧장 답해주었다.
- 짧은 시간에 영력을 급하게 끌어내 쓰느라 체력과 영력이 모두 고갈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영력과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다량 섭취하여 체력과 영력을 급속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그랬구나······.”
-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 게시판에는 영력이 풍부한 비상식량이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 로그인 보너스 2만 HP는 온전히 쓸 수 있으므로, 이것을 활용해 구매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또 나왔다, 히어로 유니버스. 당분간 그것을 피하고 싶었던 강신혁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냥 지구 음식으로는, 안 돼요?”
- 지구의 음식물에도 물론 영력이 포함되어 있지만 양이 적을 뿐더러 잘 정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분한 영력을 섭취하기 전에 신체적 한계가 찾아올 것입니다. 또한 영력이 좋은 음식을 제때 섭취해주면 영력이 보다 빠르게 성장합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아마도 영력의 영구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겠지. 다만 지금 그런 효율을 냉정하게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배는 미칠 듯이 고팠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확히 어디에 써야 할지도 알 수 없는 HP를 아끼겠다고 여기서 아사로 돌아가실 수는 없었기에 강신혁은 다급히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했다. 설마 어제의 결의가 이런 일로 무너질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 추천품목은 거래 게시판의 #141,787번째 거래 항목인 에이렌 젤리입니다. 영양소 대비 영력이 가장 높고 정순하여 영력의 빠른 회복, 빠른 성장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다만 판매자에게는 구매자의 ID가 알려집니다.
“괜찮아요, 구매해줘요······!”
이르든 늦든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다시 도전을 해야 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전생에 친구등록을 했던 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겠지.
뭣보다 지금은 찬 물 더운 물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공복감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 VIP 혜택으로 수수료가 면제됩니다! 대량구매로 인해 10% 할인이 적용됩니다. 에이렌 젤리 200개를 18,000HP에 구매하시겠습니까?
“부탁해요!”
강신혁은 본래 모루 ID가 보유하고 있던 HP를 쓰지 못하지만, 지구에서 새로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며 얻은 다른 세상 보너스라는 것으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방금 구매한 것으로 그가 얻은 HP의 대부분이 날아갔지만!
- 에이렌 젤리 200개 구매 완료. 에이렌 젤리 1개를 직접 수령합니다. 남은 에이렌 젤리 199개는 샵 인벤토리에 전송했습니다. 샵 인벤토리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 게시판에서 구매한 품목을 보관해둘 수 있는 아공간 인벤토리로, 원할 때 언제든 상품을 꺼낼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연달아 눈앞에 나타나고는 있었지만 아찔한 공복감에 눈앞까지 흐려지는 바람에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의 손에 잡힌 작은 스틱 형태의 물건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흣.”
포장을 까는 시간조차 고통스럽다. 그는 대충 포장을 찢어발기고 그 안의 보랏빛 젤리를 덥석 물었다.
그런데 그것을 크게 베어 물은 순간 입 안으로 상큼한 포도향이 번지며, 신기하게도 고통이 증발했다. 순식간에 제정신이 돌아온 강신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쯤 베어 문 젤리의 단면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거, 뭐······.”
- 에이렌 젤리는 영력과 영양소가 압축된 훌륭한 비상식량입니다. 한 개만으로 성인의 하루 필요 열량을 전부 섭취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현재 회원님이 보유하고 계신 영력을 모두 채우고도 남는 수준의 영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덤으로 맛도 훌륭합니다.
“와 미친. 추천 고마워요!”
- 급한 상황에도 감사를 잊지 않는 멋진 회원님께 10HP 보너스!
강신혁은 원래 젤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예외였다. 마치 달콤하고 식감도 풍부한 과일을 깨물어 먹는 느낌이었다.
그는 남은 젤리를 단숨에 해치워버리곤 입맛을 다셨다. 그도 능력자로서 육체를 단련한 만큼 배가 꽉 차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허기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목숨의 위기를 넘겼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히어로 유니버스 진짜 어마어마하긴 하네요······.”
- 물론입니다. 회원님께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동기화를 완료한다면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상위 차원의 물건을 입수하실 수도 있습니다. 동화율을 조금 높여 마이 룸 기능을 활성화한다면 보다 직접적인 방법도 시도할 수 있겠지요.
고작 젤리 하나였지만, 터무니없는 기적이 담겨있는 젤리였다. 작은 젤리 하나로 막대한 열량을 섭취할 수 있는 데다 즉각적인 포만감을 주고, 나아가 영력까지 회복시켜주다니. 만약 이것의 마력 버전이 있었더라면 진즉 지구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급한 상황을 넘겨 여유로워진 강신혁은 로그를 훑어보곤 자신이 1개가 아닌 200개의 에이렌 젤리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덕에 10% 할인을 적용받기는 했지만······.
“대량구매를 추천한 이유가 있는 거죠?”
- 물론입니다. 회원님의 영력은 무척 적습니다. 앞으로 영력을 구사하실 때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실 터, 에이렌 젤리를 구비해두는 것은 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끄응.”
반박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신혁이 영력을 쓰지 않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영력을 수련하려면 보다 적극적으로 영력을 소모해야 할 텐데 그때마다 이런 꼴에 처하지 않기 위해선 에이렌 젤리는 관리자의 말마따나 ‘필수’였다.
- 더욱이, 아까 말씀드렸듯 좋은 품질의 식품을 섭취할수록 영력의 성장 속도는 증가합니다. 200개의 에이렌 젤리를 모두 섭취할 즈음에는 회원님께서 어렵지 않게 D랭크의 영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D랭크······!”
영력 D랭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신영에서는, 기사학과 1학년의 평균이 마력 D랭크에 채 미치지 못했다.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인 신영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방금 겪어본 바 강신혁은 낮은 랭크의 영력으로도 순간이나마 C+랭크의 마력을 지닌 도우진을 압도했다. D랭크가 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단.
그런데 강신혁이 흥분하여 환호성을 터트리려던 그 순간, 관리자가 유독 크고 밝게 빛나는 메시지로 자신의 의사를 강조했다.
- 반복적으로 영력을 고갈시키는 것은 성장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신체가 여물지 않은 지금은 하루 10번 이상의 고갈은 위험합니다. 그것도 사이에 충분한 간격을 두어야 합니다.
“그럼 남은 젤리는 앞으로 20일에 걸쳐 먹으라는 얘기네요.”
- 영력이 성장하게 되면 젤리 하나로 영력을 완전회복 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젤리를 모두 소모하기까지 대략 2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에이렌 젤리만 있으면 영력을 쉽게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흥분했던 강신혁은 영력이 오르면 오를수록 성장조건이 빡세지겠다는 생각에 다시 침착해졌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2주 만에 영력을 D랭크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소식이었다.
‘호강에 겨웠지, 호강에. 침착하자, 강신혁. 기회가 온 거야. 서두를 필요 없이 차근차근 하면 돼.’
완전히 진정할 때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신살검의 칼날을 갈던 순간을 이미지하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느덧 그에게 싹튼 대장장이의 교양이, 미숙한 그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보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 훌륭합니다. 완전히 침착해지셨군요.
“고마워요.”
- 그러면 이제 히어로 유니버스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
그야 그렇겠지. 자신이 얻게 된 능력을 온전히 수습했고,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해 알아갈 마음도 먹었다.
그러면 다음 수순은 당연히 어제 화려하게 무시했던 친구들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다만 막상 시도하려니 관리자가 친절하게도 불러내준 모루의 친구목록이 너무나 방대하여 엄두가 나질 않았다. 솔직히 겁이 났다.
- 우선 어제 먼저 연락을 해온 친구들에게 답신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헤일로, 은아, 야누스, 츠쿠요, 미랑, 슈퍼울트라은하계주먹1짱 등등······ 이 녀석들 중에 스파이가 한 놈 섞여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먼저 연락을 준 친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특히 이 은아라는 사람은······ 으음, 전생의 나랑 깊은 관계였던 것 같은데.”
- 아마도 그렇습니다.
관리자가 태연하게 긍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짧은 순간 그에게 날아들었던 100여건이 넘는 귓속말 메시지 중 은아가 보낸 것만 절반 이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강신혁이 떠올린 얼마 되지 않는 전생의 기억 속에서도 은아가 등장하기도 했다.
“내가 모루 본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 많이 실망할 텐데.”
- 본인이 맞습니다. 단지 환생을 했을 뿐이죠.
“그래도······ 다르잖아요.”
- 예.
관리자는 솔직히 답했다.
- 은아 회원님과 감정을 교류했던 개체로서 판단하자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님은 회원님입니다. 분명 은아 회원님께선 무척 기뻐할 겁니다. 더구나······.
“더구나?”
- ······이건 직접 깨달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만난 지 하루밖엔 되지 않았지만 그의 질문엔 항상 시원하게 답해주던 관리자가 답을 회피했다. 강신혁은 관리자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지금부터 은아에게 연락하게 될 테니 곧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귓속말 기능······ 풀어주세요.”
- 귓속말 차단을 해제했습니다.
하루 동안 귓속말을 차단하고 있어서일까, 어제처럼 귓속말이 마구 밀려오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또 어제와 같은 꼴이 나겠지. 강신혁은 단단히 각오하고는, 은아라는 사람에게 보낼 귓속말을 작성했다.
- 모루입니다. 무척 황당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다른 세상에 환생했습니다. 전생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해 당신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게 밖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스스로 확인해도 개떡같은 문장이었지만 이 이상 나은 문장을 단시간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쩐지 관리자가 자신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은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 그러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은 제 전생입니다. 전 지금 17세의 남성이고,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게 되어 전생의 기억을 불완전하게 얻었을 뿐입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그럼 언젠가 완전히 기억하게 되는 거네!?
- 그건······.
답장을 작성하다 말고 관리자에게 확인하니 관리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강신혁은 다시 답장했다.
- 예, 그건 그렇습니다만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뭣보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이미 전생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영혼이 같은 거지? 기억도 완전히 되찾는 거지? 그럼 할부지네!
- 예? 아니 그게 아니라.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할부지할부지할부지! 보고 싶었어! 은아 할부지가 너무 보고 싶었어!
강신혁은 식겁하여 고개를 들었다.
“저기, 이 사람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 동의합니다. 관리자와 마음이 맞는 회원님께 10HP 보너스를 드립니다.
실드를 쳐줄 줄 알았던 관리자가 강신혁에게 동의하며 HP 보너스까지 줘버렸다.
강신혁은 그대로 은아의 귓속말을 차단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전생의 자신을 이렇게나 각별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해서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뭣보다 이 정신 나간 여자도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라면, 자신의 영력에 비견되는 능력을 다루고 있다는 뜻. 감히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는 조심스레 답장했다.
- 아무튼 죄송합니다. 아직 기억이 혼란스럽고 희미해서 은아 님께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요.
- 은아 님의 귓속말 : 이해해! 그러면 언제 다시 우리 은아라고 불러줄 거야?
아무래도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은데······. 강신혁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무난한 답장을 하기로 했다.
- 그······ 우선 친구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 날, 강신혁은 오후 수업을 통째로 빼먹고 화장실에 처박혀 히어로 유니버스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돌렸다.
경력 없는 올드비가 히어로 유니버스에 복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