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Chapter 1. 내 안에 할배 있다. - 3
야금술이라고 해봤자 지금 시간은 한밤중. 알고 있는 대장간도 없을 뿐더러 이 시간에 나간다고 그런 설비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야금술에 속하는 작업의 일부를 시도할 수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검의 날을 가는 일이었다.
“백인하 이 자식, 센스 있네.”
그의 방 한 켠에 커다란 봉투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두통약을 포함한 온갖 약과 더불어 큼지막한 숫돌도 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 중고 무구점에서 뜯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숫돌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어보던 강신혁은 이 정도면 검의 날을 세우기엔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새삼스레 놀랐다. 아마 이것도 되살아난 전생의 기억의 영향이리라. 새삼스레 쓴웃음이 나왔다. 다른 누가 보면 애송이가 장인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신살검이라고요?”
- 그렇습니다. 회원님께서 마지막으로 만드셨던 검, 바로 신살검입니다.
“볼품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요.”
강신혁은 관리자의 설명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반박했다.
신살검. 분명 단편적인 기억 속에 그 검을 만들었던 기억도 있었다. 모루가 죽기 직전의 기억은 유독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탓이다. 그래, 분명 야누스라는 사람에게 그것을 만들어주었다. 그 재료의 일부를 떼어내 은아라는 아이에게 선물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억 속의 검은 이렇게 낡고 금이 갔으며 이가 빠진 검은 아니었다.
- 시공의 폭풍에 떨어져 무수한 차원의 틈을 헤맨 결과, 검의 핵이 되는 드래곤 하트마저 잃고 쇠락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손으로 돌아왔으니, 영력을 담아 다시 벼리다 보면 언젠가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공의 폭풍이라니······ 큼, 이걸 다시 벼린다 이거죠.”
강신혁이 얻은 야금술의 숙련도는 F랭크. 그야 아직 제대로 망치를 잡은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명색이 신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검을 다시 벼린다니, 그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가.
-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혼이 기술을 기억하고 있으니, 야금술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동기화가 가속되어 전생의 경지를 되찾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영력을 다루는 능력 또한 함께 성장하겠지요.
“뭐 그걸 기대하고는 있는데.”
지금 그의 행동원리는 바로 자신이 새로 얻은 힘, 영력을 키우는 것이다. 동화율을 높이고 싶다든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고 싶다든가 하는 강렬한 의지는 솔직히 없었다. 단지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할 뿐.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관리자가 설명을 이었다. 기분 탓일까 거의 유혹하는 투로 들리는 말이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동기화가 완료되면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등급을 복구할 수 있으며, 로그인 보너스가 강화되며, 동시에 회원님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HP를 다시 쓸 수 있게 됩니다. HP는 히어로 유니버스에서의 활동과 영웅적인 활동 전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재화로, 회원님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그게······ 미안해요, 히어로 유니버스는 일단 잊고 싶어요.”
- 알겠습니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일부나마 되찾았기에 히어로 유니버스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그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자신을 수습하기에도 정신이 없어 차마 다른 것까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전생의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커뮤니티라니, 지금 다짜고짜 거기에 돌격하는 것은 폭탄을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다.
“그러니 일단 나 자신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싶네요. 외부와 접촉하는 건 그 다음이에요.”
- 영력의 본질을 깨닫고 있는 회원님께 10HP 보너스!
“그게 그렇게 돼요?”
그는 관리자의 메시지에 피식 웃으며 자신을 파악하는 작업, 즉 날 갈기에 돌입했다.
칼날을 가는 방법을 따로 익혀본 적은 없지만, 따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수건을 깔고, 숫돌을 놓은 후 그것을 물로 적셨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가 다 빠져버린 신살검을 들었다.
“······후우.”
이게 뭐라고 떨린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칼날을 붙들고 숫돌 위에 비스듬히 세웠다. 분명 처음 해보는 작업임에도 자세에는 오차가 없었다. 워낙 오랜 세월 반복되어 혼에 새겨져버린 동작이 자연스레 나왔다.
강신혁은 눈 깜짝할 사이 초인학교의 학생이 아닌 한 명의 대장장이가 되어 있었다. 그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워 스스로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 스윽, 스윽, 스윽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어긋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그는 검의 날을 갈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어색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몇 번 날을 갈다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검에 집중하자.’
검의 날을 가는 것은 그 검과 대화를 나누는 것. 대화중에 한눈을 팔 수는 없다. 자연스레 그런 마음가짐이 그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전생의 기억에서부터 흘러나온 마음가짐. 하지만 분명 자신에게도 있는 것이었다. 전생의 기억에 대해 갖던 위화감이 이 순간 아주 조금, 사라졌다.
- 스윽, 스윽, 스윽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의 날을 갈았다. 그런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 한없이 편안했다. 갑작스럽게 얻게 된 기억이며 특수능력,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한 당혹감마저도 어느덧 사라졌다.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필요 없는 것들은 사라지고, 온 세상에 오직 그와 한 자루의 검만이 남았다.
그것은 어딘가 멸망한 세상에서 혼자 쇳덩어리를 두들기던 대장장이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모루······? 모루, 맞나?
그러던 한 순간,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몸은 숫돌 위를 닦아내고 새로 물을 부으면서도 머리로는 한창 이 현상을 해석하려 노력하다 문득 깨달았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 사이에는 귓속말을 나눌 수 있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무시하자.’
그러나 실로 불행하게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구나! 할부지, 할부지!
- 츠쿠요 님의 귓속말 : 모루, 이리 오래도록 소첩을 방치하시다니 섭섭합니다. 허나 소첩, 당신께서 죽지 않고 살아계신 것만으로 모든 섭섭함과 미움을 털어냈으니 부디 노여워 마시고 응해주시길.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할부지 어디야!? 건강해? 살아있어? 할부지 대답 좀 해봐!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모루 할배애애애애애애애! 나 진짜 할배 죽은 줄 알았잖아아아아아아아!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아, 할배 나 신살검 다시 만들어줘! 그거 잃어버렸단 말이야 빨랑 다시 만들어줘! 모루 할배애애애애!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맞아······? 부탁이야, 할부지. 답 좀 해줘······!
- 미랑 님의 귓속말 : 놀랄 노자로군. 모루 그대 살아있었는가? 아니, 가만······ 혹 환생인가? 두 번의 생에서 모두 히어로 유니버스에의 접속을 성공했다니 이 무슨! 아니 그래도 설마······ 큼, 너무 이른 추측인가. 답이 가능해지는 대로 답 주시게. 기다리겠네.
- 슈퍼울트라은하계주먹1짱 님의 귓속말 : 와 겁나 오랜만이네 할아방! 어떻게 내 장갑 안 만들어주고 18년을 잠수를 타냐!
- 은아 님의 귓속말 : 흑, 할부지이이······ 답해줘어······.
“아 진짜!”
끝내 강신혁은 괴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 은아라는 녀석이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관리자 님, 이거 어떻게든 해주세요!”
- 귓속말 차단 기능과 로그아웃 위장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강신혁은 곧장 그 두 가지 기능을 활성화했다. 관리자는 그의 부탁대로 해주면서도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 처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히어로 유니버스 활동을 생각한다면, 나중에 메시지들을 천천히 읽어보시고 하나씩 답을 주시는 게 좋습니다. 회원님께서 맺은 인연은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알고 있어요. 다만 지금 제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에게 대응하는 게 더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마음 같아선 동기화가 완료될 때까지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지 않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조만간 히어로 유니버스와, 그리고 그것을 통해 과거의 모루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과 제대로 마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부담이 된다. 자신은 모르는 자신이 쌓아올린 관계라니! 자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관계를 해소할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강신혁은 씁, 입맛을 다시며 눈앞에 놓인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겠다, 일단 날이나 갈자.”
- 역시 회원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네요.
“그거 욕이죠.”
- 10HP 보너스!
“무슨 뜻이에요? 네?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귓속말을 차단하고 나니 다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신살검의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날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묻은 더러움을 털어내야 했는데,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비로소 검이 어느 정도 검 다운 모습을 찾았다.
- 우우웅
얼마나 그렇게 묵묵히 검을 다듬고 있었을까. 어느 한 순간 검이 진동했다. 강신혁의 손이 멈추었다. 착각인가? 아니, 아니었다. 진동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뚜렷한 의사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반가움, 그리움, 기쁨, 슬픔. 검에게서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강신혁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마도 이것이 영력이리라.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영력이 날을 가는 행위를 통해 신살검에 깃들어 있던 영력을 자극해, 서로의 근원을 하나로 잇고 있었다.
강신혁은 신살검이 자신에게 그래왔듯, 자신도 신살검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직감에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내가 너를 만들었니?’
- 우웅
강신혁이 검날을 갈며 조심스레 질문을 건넨 순간, 검이 긍정하듯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것은 분명히 영력이었다. 그 불안하고 희미한 빛에 어딘가 마음이 흔들렸다.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빛이 검으로 스며들었다. 검이 기쁜 듯 재차 미미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고 강신혁은 아주 잠깐 평정을 잃었으나, 이내 자신의 영력이 검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과연······ 이게 영력을 다룬다는 건가.’
순수한 기쁨의 마음이 들었다. 마력보다 상위차원의 힘이라는 영력을 다루는 방법을 깨닫게 되어서?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모든 힘을 잃고 힘들어하는 검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 스윽, 스윽, 스윽
강신혁은 계속해서 검을 갈며 그것에 말을 걸었다. 검은 기력이 별로 없는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했지만, 검이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강신혁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과 검이 근원의 영역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그때.
- 영력에 의해 신살검의 힘이 아주 약간 회복됩니다.
가이아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검이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잃었던 근원의 힘을 아주 약간이나마 되찾고 이전의 격을 회복한 것이다!
- 신살검이 D랭크에 해당하는 힘을 되찾습니다.
- 야금술이 F+랭크로 성장합니다.
- 영력이 F+랭크로 성장합니다.
- 신살검에 깃든 기억의 일부를 열람합니다.
“······어?”
날을 갈던 강신혁이 동작을 멈추었다. 어째 익숙한 상황 같은데, 하고 읊조리는 순간.
기억의 홍수가 재차 강신혁을 덮쳤다.
이번엔 명백한 타인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