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아이디 정보를 로드합니다.
인류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끔찍하게.
차원침략자들은 강했고, 많았고, 지독했으며, 잔인했다. 인류의 터전 메르바에 처음으로 게이트가 열리고 500년―장대한 세계수호전쟁의 끝은 비참한 몰락이었다.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은 메르바의 인류는 지하 벙커로 기어들어, 그저 침묵 속에서 그들에게 이윽고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단어는 용납할 수 없는 모독이고 치욕이었다.
- 깡! 깡! 깡!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은 오늘도 쇠를 두드리고 있는가.
희망 한 톨 남지 않은 세상에서, 어째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가.
행성 메르바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의 대장장이는 스스로도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손만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이 망치를 쥐고 있었다.
- 깡! 깡! 깡!
침략자들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몬스터들을 피해 세상을 헤매다 운이 좋게도 보존식량이 많이 쌓인 지하 벙커에 들어오게 된 것이 5년 전, 그의 나이 50살이 되었을 때.
그 벙커 안에는 대장간이 있었고, 식량을 까먹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망치를 들었다.
무기를 만들어봤자 그것을 쥐고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전사가 남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것은 도피였고, 무의미한 잠꼬대였다.
“이걸로······ 완성이다.”
하지만 몇 개째일까, 오늘도 무가치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여기면서도 방금 자신이 빚어낸 장검을 내심 뿌듯하게 살피던 그때.
- 역사에 남을 명품 제작에 성공! 히어로 유니버스 접속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 새로운 접속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ID를 작성해주세요!
감히 희망이라 불러선 안 될 기적이 그를 찾아왔다.
“이건······?”
대장장이는 난데없이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에 적힌 글귀를 보며 경악했다.
희미하게 들어본 것도 같았다. 손에서 불을 뿜어내거나 무기에 검기를 두르거나 하는 능력자들은, 일반인은 볼 수도 없는 신비로운 시스템에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능력자도 아닌 자신에게 나타나다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떠올린 그때,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인지 창에 새로운 글귀가 새겨졌다.
- 히어로 유니버스는 가이아 시스템의 상위에 있는 시스템입니다! 무술, 마법, 그 외의 초능력, 제작 등등 각 분야에서 우주제일의 잠재력을 지닌 이들에게만 접속이 허락되는 우주제일의 커뮤니티입니다!
“내가 우주제일? 이 볼품없는 대장간에 갇혀 검이나 만들어내는 내가······?”
- 그렇습니다. 당신은 우주에 새로 태어난 대장장이의 희망입니다. 다른 무수한 세계가 영혼의 기술을 잊고 마력을 활용한 아티팩트에만 매달리는 지금, 당신과 같이 영력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탄생한 것은 우주의 축복입니다.
대장장이는 이 정체모를 이가 하는 얘기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력이라니? 자신은 그저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쇳덩이를 두들기고 있었을 뿐인데.
- 영력은 혼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혼을 다루는 힘. 결코 누구에게나 허락된 힘은 아닙니다. 당신은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ID를 만들어주세요.
“아, ID라니.”
- ID ‘아아이디라니’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자,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러니까······ ID라는 건 신분증 같은 걸 말하는 것이겠지?”
- 저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시스템 메시지입니다. 관리자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ID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의 당신을 나타낼 이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허, 나를 나타낸다니······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도 얼마 없는데.”
-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은 무수한 우주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그 무수한 우주에서도 고르고 고른 영웅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여전히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끝내 자신이 미쳐 환각을 보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설령 이 현상이 진짜라 한들, 멸망이 예정된 인류의 미래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모루······ 모루가 좋겠소.”
- ID ‘모루’로 하시겠습니까?
“그렇소.”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면 어떤가. 대장장이는 처음부터 도피하고 있었을 뿐이고, 눈앞에 새로이 나타난 ‘히어로 유니버스’는 그의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 모루 님, 히어로 유니버스 접속을 환영합니다. 수많은 영웅과의 교류 속에서, 당신의 영혼이 보다 찬란히 빛나길 빕니다. 첫 로그인 보너스로 100HP(Hero Point)를 드립니다!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보다 많은 HP를 모아 각종 정보와 재화를 구매하세요!
“나도······ 나도 잘 부탁하오.”
- 관리자에게 상냥한 당신에게 보너스로 10HP를 드립니다! 사회생활 좀 해보셨군요!
“하······ 하하하.”
대장장이는 새로운 도피처를 찾았고, 도피처는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해주었다.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도피처에 대장장이는 몰두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을 때, 대장장이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모루 할배, 모루 할배.
- 뭔 일이냐.
대장장이······ ‘모루’는 히어로 유니버스를 통해 알게 된 친구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귓속말이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친구등록을 한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시지 기능이었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검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
- 그러니까 무슨 검 말이냐.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만들어줄 수 있는지부터 말해봐.
- 지금은 쉬고 있으니 내가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바로 만들어주마.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신살(神殺)검. 종류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기왕이면 장검으로.
- 꺼져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처음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를 히어로 유니버스의 시스템 중 하나인 거래게시판에 등록했고,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관리자의 말이 맞았던 것인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기에 관심을 보였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그러지 말고 하나 만들어줘.
- 만들 수도 없는 걸 어떻게 만들겠느냐. 꺼지라고 했다.
어차피 이곳에 놔둬봤자 쓸 일도 없는 무기들이라 여긴 그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팔았고, 그 대가로 HP라는 것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의외로 굉장했다. 벙커 안의 식량은 앞으로 2~3년 치밖엔 남아있지 않았는데, HP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거래게시판에 올려놓은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 벙커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레시피는 있어. 아무렴 내가 모루 할배를 맨땅에 헤엄치게 하겠어? 하긴 할배라면 맨땅에서 헤엄치다가도 흙으로 검 하나 빚어낼 것 같긴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력을 담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루라는 사람 자체에 호기심을 가진 무수한 세상의 영웅들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며,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모루는 물론 그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내가 재료까지 보내줄게! 만들어주면 보상도 진짜 두둑이 줄게!
- 돈은 차고 넘치도록 있다만.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그건 알지만! 그래도 제발!
- ······만들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한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우와 역시 모루 할배야! 사랑해! 진심 개사랑함!
-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나 해라.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알았어! 나 검 완성될 때까지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있을게!
- ······그래도 밥은 먹고 있어라.
사실 이런 의뢰는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하 벙커에는 야금술의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았던 데다 질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의 사정을 금세 파악한 히어로 유니버스의 다른 회원들이 다른 세상의 재료를 보내주며 자신이 원하는 병장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던 것이다.
다른 세상의 재료를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모루에게 있어서도 지극히 자극적이고도 재밌는 일이었다. 그는 의뢰를 거절하지 않았으며, 완성품에 만족한 사람들은 그가 부탁하지도 않은 고액의 보수(HP)를 턱턱 안겨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을 죽일 수 있을 만한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은 처음이었지만.
“이것도 운명인가······. 마지막에 참 거창한 의뢰를 받는구만.”
- 야누스 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아, 매번 고맙소.”
- 친절하고 상냥한 말에 감동한 관리자의 10HP 보너스!
“자네야말로 매번 친절하군.”
매번 메시지로밖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관리자와의 관계는 무척 양호했다.
이제와선 10HP 따위에 연연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모루는 애초에 그런 이유로 관리자에게 존대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자신을 히어로 유니버스로 이끌어준 관리자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허어. 신살검의 재료라더니, 정말 생전 보지도 못한 것들만 가득이군······ 다만 전부 터무니없이 귀하다는 것만은 알겠어. 야누스 놈, 정말 뭐하는 놈인지.”
- 야누스 님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지닌 무인이십니다. 그런 무인이니 모루 님께 이끌린 것이겠지요.
모루의 혼잣말에 관리자가 답해주었다. 그렇다면 자유게시판에서 야누스가 매일 늘어놓던 허풍이 실은 허풍이 아니란 말인가? 태풍을 갈랐다느니, 화산 분화를 멈추었다느니, 드래곤을 베어 죽였다느니······.
- 전부 사실입니다.
“허, 그놈 얼굴 한 번 보고 싶구만.”
- 회원 등급이 조금만 더 오르면 가능하십니다! 이번 납품으로 VIP가 되시는 것이 확정적으로 명백합니다! 20년 만에 그 정도 회원등급에 이른 건 회원님뿐입니다.
“······영광이구려.”
아마 거래게시판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거액의 HP를 벌어들인 탓이겠지. 하지만 VIP라고 해도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아마······ 확실히, VIP에 오르기 전 자신은 죽을 테니까.
사실 그는 요즘 들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드는 것이다.
- 거래게시판에서 판매하는 엘릭서를 구매하시면 됩니다. 젊어지실 거예요. 회원님께서 모은 HP를 모두 투자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걱정해주어 고맙소, 관리자.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오.”
- ······.
관리자가 침묵했다. 아마 모루의 심정을 읽어낸 것이리라.
······그래. 도피가 예상보다 길어지기는 했지만, 모루는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이 이상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이젠 그것도 지쳤다.
- 히어로 유니버스가 즐겁지 않으십니까?
잠시의 침묵 후 다시 눈앞에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모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즐겁소. 너무 즐거워서 문제지. 내가 멸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걸 깜빡 잊게 될 것 같으니······ 그래서 문제요.”
- 회원님······.
저물어버린 이 세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자신의 이 재능이 조금만 더 일찍 개화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물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죄책감에 스스로의 목을 졸랐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엘릭서라는 것으로 젊음을 손에 넣고, 히어로 유니버스의 힘으로 다른 세상에 넘어가다니······. 그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겠지만, 동시에 모루 스스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도피였다.
이젠 충분했다. 그는 세상과 함께 저물고자 했다.
- 회원님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존중하겠습니다.
“언제나 고맙소.”
- 눈물 나게 상냥한 회원님께 감동한 관리자의 10HP 보너스!
“하하하하, 자네는 항상 보너스가 헤퍼.”
그런데 모루가 웃음과 함께 신살검의 재료를 갈무리해 모루로 향하던 순간, 가장 최근에 사귄 어린 친구로부터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할부지.
- 으응? 무슨 일이니, 우리 은아.
- 은아 님의 귓속말 : 실은 있지, 은아 이제 일곱 살 생일이다!
불과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인정받아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한 사상 초유의 천재. 그 빛나는 재능은 확실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모두가 조심스레 대하고 마는 아이. 신입회원 [은아]였다.
- 어이고 그랬어? 우리 은아가 벌써 일곱 살이구나. 그럼 이 할애비가 멋진 선물을 해줘야겠는데.
- 은아 님의 귓속말 : 정말? 진짜루? 할부지가 직접 만들어줄 거야?
- 그럼, 물론이지.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인지도, 어떤 가정에 살고 있는 아이인지도 모른다. 모루가 아는 것은 단지 실명으로 추측되는 아이의 ID와 성별뿐.
하지만 모루는 이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까마득한 옛날 먼저 떠나보낸 자신의 어린 딸아이가 생각나 도저히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히히 신난다, 친구들한테 할부지가 만들어줬다고 자랑해야지!
-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한 얘기는 하면 안 된다, 알지?
- 은아 님의 귓속말 : 웅!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할부지가 만들어줬다고 할 거다!
- 허허, 녀석.
모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에게 큰 정을 쏟아 붓고 있었고, 아이 또한 모루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다. 이 세상을 뜨는 데 있어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
‘못난 놈, 은아는 네 딸이 아니다.’
직후 모루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놓고 그새 미련을 품다니.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은아의 생일선물을 만들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담아주고, 자신은 떠나자. 그게 맞는 것이다.
“어디······ 그래, 이 정돈 따로 떼어 써도 되겠군.”
모루는 야누스가 준 레시피를 확인한 후, 그가 준 재료 주머니에서 유독 빛나는 노란 보석의 귀퉁이를 떼어냈다. 거기에 부족한 것들을 거래게시판에서 추가로 구매하기까지 했다.
-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 은아.
- 은아 님의 귓속말 : 웅, 나 착한 아이 하고 있을게!
- 오냐, 착하다.
모루는 그렇게 해서 마지막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물은 두 가지, 야누스의 신살검과 은아의 헤어핀이었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할배 빨리! 빨리!
- 시끄럽다 이놈아,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리고 네놈이 준 보석이 좀 남았으니 떼서 다른 데다 쓰마.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뭐!? 그거 보통 보석 아닌데 진짜 존나 귀한 건데 그걸 누구 주게!
작업하는 과정은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나처럼 모루 위에 놓인 쇠를 두들기고 있으면, 히어로 유니버스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 계속해서 귓속말을 걸어왔으니까.
- 은아 줄 거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아, 은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건 안 필요해?
- 그거면 충분하다.
그는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채 규칙적으로 쇠를 내려치며, 그것과 함께 호흡했다. 걸려온 귓속말에 답하는 것 빼고는 다른 데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모루 영감 있나.
- 헤일로. 오랜만이군.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의뢰, 가능하겠나? 거인을 붙들 족쇄가 필요해.
- 미안하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게 있어.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으음. 그럼 다음에 부탁하지. 영감의 솜씨가 필요해.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작업이 될 터, 다른 친구의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겠지. 모루는 내심 미안했지만 그 얘기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친구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 츠쿠요 님의 귓속말 : 모루, VIP 등급까지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당신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가 흐르는 것이 천 년만 같답니다.
- 늙은이 얼굴이 뭐 그리 보고 싶다고 그러는가.
- 츠쿠요 님의 귓속말 : 당신의 영혼이 이토록 밝고 찬란한데 누가 감히 당신을 늙은이라 할까요!
- 허허, 참 특이한 처자라니까.
돌이켜보면 지난 20년간 참으로 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유쾌한 인연도, 다소 불쾌한 인연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인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모루에게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가는 길 적적하지는 않으리라. 단지 자신이 사라져도 그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나 오늘 생일! 그동안 진짜 착한 아이 하고 있었는데! 진짜루 착한 아이 하고 있었는데!
- 오냐, 안 그래도 할애비가 마침 우리 은아 선물 다 만든 참이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와! 할부지 사랑해!
- 허허, 할애비도 우리 은아 많이 사랑한다. 지금 선물 보내주마.
그렇게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다행히도 늦기 전에 작업이 모두 끝났다.
신살검은 가드에 노란 보석이 박힌 검은 금속의 검으로 완성되었다.
헤어핀은 은색의 십자가 중앙에 노란 보석이 박힌 것으로 무척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가히 필생의 역작이라 해도 좋을 성과였다.
“좋아······ 그럼 선물 전송. 어이쿠우!”
성공적으로 작업을 마친 모루는 두 가지 물건을 각각 주인에게 선물로 전송했다. 신기하게도 정확히 그 타이밍에 그의 몸에 남아있던 힘이 모두 빠졌다.
아니, 작업을 마칠 때까지 몸이 버텨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 회원님, 생각엔 변함이 없으십니까?
“관리자······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주는가. 고맙소.”
- ······10HP, 보너스.
다 죽게 된 순간에 HP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모루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그동안······ 덕분에 무척 즐거웠소. 고맙소······.”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왔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슬슬 눈이 감겼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모루는 가만히 관리자가 남긴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그것을 읽지 못했다.
- VIP등급이 되었습니다. 마이 룸 기능 오픈, 로그인 보너스 기능 오픈. 아이디 정보가 혼에 새겨집니다.
- 새로운 곳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그로부터 18년 후, 메르바와는 다른 세상 지구.
대한민국의 초인양성학교 [신영]의 신입생, 17세 소년 강신혁이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했다.
- ID를 확인합니다. 기존의 아이디가 존재합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ID [모루]로 접속합니다. VIP 회원님의 재접속을 환영합니다!
- 다른 세상에서 로그인하셨습니다! 다른 세상 로그인 보너스로 10,000HP 획득! 첫 업적입니다, 10,000HP가 추가됩니다!
- 아이디 정보를 로드합니다. 충격이 있을 수 있으니 대비하세요!
“······뭐라고요? 으아아아아아아악!”
ID 모루의 부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