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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하린과 아이리의 공방전은 일진일퇴 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불가능했다.
하린이 바람으로 이루어진 칼날이나 화살을 쏘아대면 아이리가 낫 족제비의 등가죽으로 막아내고, 아이리가 위협적으로 달려들면 하린은 공격을 멈추고 회피에만 전념하면서 거리를 벌린다.
이능력의 세계와는 상관없는 일반인이라 해도 처음 부분만 박진감이 넘치고, 중반 이후부터는 지루해서 하품이 나온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따분한 공방전이였다.
물론, 이 지루한 공방전에 답답해하는 것은 싸우고 있는 장본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가다간 어떤 세력이든지간에 누군가의 개입을 받게 될테고,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을 꺽어야 직성이 풀리는 두 여성은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한 승리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서로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동일한 초조함에, 아이리가 추적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풍사. 이렇게 지루한 공방전으로 시간을 끌다보면 누군가가 개입할게 뻔하다."
"……."
평소였다면 코웃음을 치며 어디서 헛수작이냐고 교섭따윈 없다는 듯이 공격을 퍼부었을 하린이였지만, 그녀 또한 페리샤로부터 '오늘치의 달성치' 를 이뤘으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이 자리에서 아이리와의 악연을 자신의 손으로 끝맺고 싶었다.
"그래서?"
하린이 교섭을 할 여지가 보이자, 아이리는 일부러 검의 끝을 아래로 내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서로 한가지씩 버리기로 하지. 나는 낫 족제비의 등가죽을 버리겠다. 대신 너는……."
"기동력을 포기해라?"
서로의 강점을 하나씩 버리자는 아이리의 제안.
처음엔 검을 던지지 않을까 싶어 경계하던 하린도 그녀가 검을 내리자 서로가 빨리 결착을 내고 싶어 다급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좋아. 그럼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일격에 승부를 내는거야."
그녀들은 흐지부지하게 자신들의 악연이 매듭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평소라면 이뤄지지 않을 교섭이 성사되었다.
아이리는 낫 족제비의 등가죽을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에 말아내면서 한쪽에다 멀찍이 내던졌고, 하린도 살짝 몸을 띄우고 있던 바람의 힘을 해체하며 땅에 착지하였다.
하지만, 이 교섭은 제 3자의 눈으로 보자면 아이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아이리는 낫 족제비의 등가죽이라는 물체를 내던졌지만, 하린은 자신의 이능력에서 기동성만 골라 빼내거나 봉인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방금전과 같이 거리를 벌리는 전술을 사용한다면 아이리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 거래가 모르는 사람들간의 결과물이였다면 당연히 이뤄지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악연이 깊은 만큼 하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이리는 그녀가 치사하게 자신의 말을 어길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교섭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서로의 한가지씩을 버리면서 단판 승부를 결정한 두 여성은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일 때를 포착하고 있었다.
삭!
순간, 손날을 세운 하린이 팔을 크게 휘두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손끝에 따라 유형화된 바람의 칼날이 쏘아져 나갔다.
탓!
그와 동시에 허리를 낮추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 아이리는 자신의 몸 절반을 가리는 바람의 칼날을 일본도로 쳐내며 앞으로 돌격하였으나, 하린은 팔을 빠르게 휘두르며 바람의 칼날들을 무수하게 쏘아냈다.
쉬익! 쉭! 스삭! 퍼펑!
일본도가 휘둘려지는 바람 소리와, 일본도가 베어낸 바람의 칼날을 이루고 있는 염동력이 사라지면서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소리들이 울려퍼졌다.
바람의 칼날을 막아내기 위해 너무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리였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하린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피잉!
"!!"
무언가가 발사되는 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아이리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가며 피가 살짝 튀어올랐다.
공격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권총처럼 손가락을 펼친 손가락이 보였다.
사악! 피잉!
바람의 칼날로 크게 공격하여 일본도로 맞받아치게 만들고 다른손으론 총알처럼 공기를 압축시킨 후, 핀 포인트 샷으로 빈틈을 공격한다.
평소와 달리 이도류를 사용하였다면 수월하게 막아냈겠지만, 안타깝게도 기습 공격을 하면서 날려보낸터라 지금가서 줍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픽! 치익!
"큭!"
칼날은 범위가 넓은만큼 맞받아쳐내기가 수월하지만, 귀신같이 빈틈을 노린 공격은 검을 휘두르면서 몸을 비틀어야만 했기에 제대로 적중된 부분은 없어도 그녀의 몸에는 조금씩 상처 자국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하린은 정말로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 아이리의 노력 덕분에 둘의 거리는 일반인 걸음걸이 기준으로 6~7보 수준만이 남게 되었다.
5등급의 신체 강화자라면 1~2초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
그 때, 아이리가 머리쪽을 갈라내려는듯이 날라오는 바람의 칼날을 맞베어내고, 영악하게도 옆구리를 공격하는 핀 포인트 공격을 알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옆구리! 이대로 달려든다!'
츠퍽!
"큭!"
아이리의 이능력은 신체 강화 5등급. 하린의 이능력은 염풍력 8등급.
하린이 정면 승부를 허락한 이유는 3단계의 격차라는 압도적인 힘의 상하관계 때문이였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힘에 의해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버린 아이리였지만,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든 덕분에 둘의 거리는 반으로 좁혀져나갔다.
"흥!"
하지만, 그녀가 부상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행동은 하린도 예상하고 있었다.
서로 견제와 공격의 역할을 맡고 있던 양 손을 모두 권총처럼 바꾼 그녀는 아이리의 양 다리, 그것도 한쪽은 무릎, 다른 한쪽은 발목을 노리며 압축된 공기를 발사시키려는 순간,
"걸렸구나!"
화악!
득의양양하게 웃어보인 아이리가 허벅지의 칼집처럼 생긴 곳에서 방금전에 내던진것과 똑같은 낫 족제비의 등가죽을 내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것을 두 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퍽! 퍽!
한 손으론 바람으로 이루어진 공격에 내성을 가진 낫 족제비의 등가죽을 휘두르며 두 다리를 향해 날라오는 공격을 막아내고, 남은 한 손으로는 하린의 한쪽 팔을 잘라내고자 일본도를 휘둘렀다.
아이리는 처음부터 이 한 수를 위해 일부러 서로의 한가지씩을 버리자고 한 것이고, 일부러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접근하려고 다가온 것이다.
그녀가 반응하고 도망칠 시간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씨익-
'웃어?!'
하지만, 자신의 팔이 날라갈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린은 오히려 웃음을 띄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스팟!
순간, 아이리의 귓가에서 누군가가 텔레포트하여 이동하는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기운이 물씬 풍기는 소총의 개머리판이 끼어들었다.
파가각! 스컥!
낫 족제비의 앞다리로 만들어진 일본도는 개머리판을 잘라내는데 1초가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고, 그 틈을 이용해 아이리의 검격에서 상체를 숙이며 회피한 하린은 주먹을 말아쥐며 상처입은 옆구리 부분을 향해 주먹을 꽂아넣었다.
퍼억!
푸슛--!
"커헉!"
구멍난 상처 부분에 하린의 주먹이 꽂아넣어지자 구멍에서 피가 솟구쳐 흘러나왔다.
아이리는 급한대로 무릎으로 올려쳐서 하린을 공격하려 하였지만, 하린은 그녀의 무릎을 두 손으로 붙잡고선 상체를 크게 비틀어 뒤쪽으로 강하게 내리 찍었다.
콰앙!
"카학……!"
두 번의 클린 히트를 맞고나서야 아이리는 자신이 하린과 상대하면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항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기억 상실에 걸려 언제 문제 요소가 될지 모르는 자신과 달리, 진우의 다른 노예들은 이라크에서 얻은 자원을 통해 파워 슈츠들이 모두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진우의 손에 걸린 기계들은 하나같이 성능들이 뛰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생김새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성능은 2배 이상이 된다.
현재 파워 슈츠의 힘을 빌린 하린의 근력은 4.5등급 수준의 신체 강화자.
거기다가 총탄이 오가는 싸움에서 염동력을 이용한 방어로 자신을 지켜야만 했었기에 아이리와 근접전에서 난투극을 벌일 정도는 아니지만 공격 하나 정도는 보고 피하거나 반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쫘아아악!
"꺄하아아악!"
아이리에게 연달아 공격을 가한 하린이였지만, 그녀는 절대 방심하지 않고 그녀의 허벅지와 무릎에다가 염풍력의 힘을 이용한 바람의 칼날로 베어내면서 발로 걷어차 반격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았다.
"이…이 비겁한 년……! 1:1 승부에서 이딴짓을……!"
아이리는 갑자기 소환된 데스 나이트가 휘두른 개머리판 때문에 하린을 베어내지 못하였고, 그녀의 반격을 받아 제대로 일어설 수 조차 없게 되었다.
"풋. 비겁? 이딴짓?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하린은 원래 데스 나이트를 소환시킬 의도는 없었다.
그녀가 정말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건다면 자신 또한 목숨을 걸고 승부에 임할 생각이였다.
하지만, 또다른 낫 족제비의 등가죽이 튀어나오면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불현듯이 남궁 신으로부터의 조언이 생각났다.
-이 마법진은 여러분들에게 등록된 데스 나이트라는 존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해줍니다. 그리고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해도 자신이 있는 곳으로 소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염두하셔서 전술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튀어나온 데스 나이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개머리판을 휘둘러서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 덕분에 아이리의 더러운 술책에 당해버리는 불상사는 없게 되었다.
"으아아아아!"
그 때, 아직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아이리가 상체의 힘만으로 하린을 향해 자신의 검을 투척하였지만, 아이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이런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기에 실드를 치면서 검의 속도를 늦추고 슬쩍 몸을 돌려 피하였다.
"조센징 따위가! 일본인에게 굴복한 조센징 따위가아아아!!"
아이리는 위대한 대일본제국의 사무라이인 자신이 조센징 따위에게 져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녀가 추하게 굴면 굴수록 하린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더럽네. 비겁한 수단을 쓴 주제에 패배까지 인정하지 못하다니. 사무라이? 네 머릿속의 있는 사무라이는 존재는 비열한 존재인가보지?"
"닥쳐! 너따위 미개한 조센징 따위가 사무라이 정신을 알리가 없다고!"
스팟-
더이상 말을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하린은 거친 전투를 치뤘는지 방탄복 여기저기가 찢어지면서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 고스란히 튀어나온 데스 나이트를 하나 더 소환하였고, 2명의 데스 나이트에게 그녀의 한쪽팔을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다리는 부상을 당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두 팔이 잡힌채로 땅바닥에 널부러진 아이리는 욕을 마구잡이로 질렀지만, 하린은 그녀의 욕을 무시하며 그녀의 배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가 난 옆구리 부분만을 발로 내리찍기 시작하였다.
콱!
"커헉!"
"아까부터 계속 조센징 존센징 조센징. 너희들 머릿속에는 그것밖에 없어?"
콱!
"카학!"
"왜? 세계를 상대로 패전한 굴욕감을 유일하게 자신들이 완벽하게 정복했었던 한국인을 깔아뭉개면서 자위라고 하고 싶었어?"
콱!
"까…하악……!"
"너희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었다면 오늘같은 침략도 일어나지 않았을거야."
콱!
"끄…끄륵……."
"그거 알아? 주인님께서 야스쿠니 신사를 창관으로 개조시킬 예정이라는걸 얼핏 들었어. 거기에 반항적인 일본인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서 공개 능욕쇼를 전 세계에 방송할 예정이라 하시더라고?"
콱!
"주…죽어버…려……."
"아, 물론 이 사실은 주인님이 페리샤랑 같이 일본 정복후의 이야기를 얼핏 들은거라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 일본 정복후의 즐거움을 위해 나 혼자만 알 생각이야. 그러니까 이 일은 떠벌이지 마? 뭐, 그런 기회가 오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 지!"
콰직!
말 끝을 잠깐 쉬며 힘있게 마무리를 짓고 아이리의 얼굴을 짓밟은 하린은, 아이리가 눈에 흰자를 올리며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꺽이는 모습을 확인하고선 후련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아~ 개운하네."
만약, 아이리와 정정당당한 승부를 통해 결판을 냈더라면 이러한 개운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더러운 수작을 부리고, 끝까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아이리의 비열한 모습을 박살을 내서 이토록 후려하면서도 개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하린양."
"아, 이실리아님!"
그렇게 개운함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하린은, 하늘에서 날라와 착지하는 이실리아의 목소리에 반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린양이 조종하던 데스 나이트들을 도와서 욱일승천 조직원들을 전멸시키고 이쪽으로 왔어요. 아이리와 1:1 대결을 펼치길래 일부러 나서지 않았는데 섭섭한건 아니죠?"
"아녜요. 오히려 제 힘으로 악연을 매듭짓게 되어서 기쁜걸요. 아참, 저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엄마에게 재롱부려야 할 나이에 국가 이능력자로서의 훈련을 받아왔던 하린은 마치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듯이 이실리아의 한 쪽 팔에 안겨들어왔고, 마치 친모녀같은 훈훈한 분위기가 두 여성 사이에서 풍겨나왔다.
그렇게 하린의 부탁을 듣게 된 이실리아는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하린은 어떻게 안될까요? 라는 질문과 함께 귀여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예. 그 부분은 제가 진우씨에게 말씀드려 볼께요. 아마 그 분도 흥미로워하실 것 같네요."
아무리 너그러운(?!) 진우의 마음이라 해도 한계가 있는 법.
다행히 하린의 부탁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오히려 즐거워 할법한 부탁이였다.
그렇게 퇴각 준비를 위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 하린은, 기절한 아이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먹잇감을 둔 육식동물처럼 혀를 날름 거렸다.
============================ 작품 후기 ============================
조아라에서 가장 리플이 많이 달린다는 정각 12시 새 글! 제가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쓰고 싶은 글은 아주 많습니다.
일단 던전물 하나, 영지물이나 판타지 소설 하나, 예전에 쓰던 무쌍연희 맹장전 리마스터판, 루나틱돈은...던전물 소설 쓰니까 그걸로 땜빵.
그리고 앞으로의 소설 방식은 먼치킨이 아니라 성장형으로 갈 예정입니다.
물론, 착실한 성장만 하면 너무 길고 지루하니까 어느정도의 약속된 기연을 통해 깽판도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지요.
현재는 던전물 관련 설정을 잡고 있는 중입니다.
나중에 대충 뼈대만 잡으면 공개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