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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그랜드 아크님!"
"응?"
조용히 진우…아니, 치우가 돌아오는것을 기다리던 그랜드 아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전망 좋은 옥상 위에서 자신이 만든 폐허를 구경하다가 고개를 쏙 내밀며 건물 아래쪽을 내려보았다.
"오, 코벤이군. 낯선 이국 땅에서 수고 많았네."
"고맙습…이 아니라! 정말로 그랜드 아크께서 리피님의 암살을 명령하신것이 맞습니까!?"
암살자가 있다고 예상한 건물의 옥상에서 아무런 흔적조차 찾지 못한 코벤은, 옥상에서 보이는 리피의 저택이 무너지는 모습에 허겁지겁 돌아오는 도중에 그랜드 아크의 곁에서 여러가지 잡일을 수행하는 비서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그랜드 아크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그녀는 코벤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였고, 비밀 엄수를 위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였던 코벤은 모든 설명을 듣게 되자 경악하고 말았다.
평소 그가 얼마나 정복욕에 불타오르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런 그의 이상과 호기에 공감하여 악의 하수인이라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아크로스에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시대가 전쟁이 일상다반사였던 중세 시대도 아니고, 정복을 위해 자식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에는 온갖 수라장을 거쳐온 그로서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맞다."
"……!"
짧은 말이였지만, 그랜드 아크 특유의 힘있는 목소리로 긍정하니 그 무게가 남달랐다.
"어째서 굳이 그런 짓을 하신겁니까?!"
"외부로 분출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내부의 혈기 왕성한 힘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지. 딸의 목숨 하나로 최소 유럽의 절반을 지배할 수 있고, 내부로 들끓는 힘 또한 외부로 분출이 가능해지니 리피의 목숨값으론 값싼 편이지 않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정복욕으로 들끓는 그랜드 아크의 눈빛에 코벤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그래서 뭔가. 혹시 겨우 그거 따지려고 온건가?"
딸의 목숨을 '겨우' 라고 치부하는 냉혹한 말투와 목소리에, 그는 결국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네도 나이를 먹었는지 꽤나 마음이 여려졌군. 명색이 '악의 조직' 의 간부면서 이 정도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게 아닐까 싶은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내 부하가 된 이상, 잠자코 따르라는 우회적인 발언에, 더이상의 논쟁은 의미가…아니, 그의 심기를 거스리는 자살 행위임을 깨닫은 코벤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아꼈다.
"헌데, 그랜드 아크께선 이렇게 가만히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손을 써놨으니 슬슬 지금쯤이면 전 세계로 나의 정보가 밖으로 퍼져나갈거다. 게다가 지금은 그딴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야. 지금까지 나와 1:1로 이토록 흥분시켜준 남자를 만나게 되었거든."
"??"
그랜드 아크의 차림새가 매우 더러워져 있어서, 처음엔 깔고 앉은 저 시체들이 마지막 발악한거라 생각했었던 코벤은 그가 말한 '남자' 라는 부분에서 어째서인지 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도 알고 있을텐데? 손 진우라고."
"!!"
그가 자신과 막스를 가지고 놀때부터 범상치 않은 능력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세계 유일의 신체 강화 10등급의 이능력자인 그랜드 아크가 인정한 맞수까지 강한 인물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코벤은 그의 이름이 들려오자 토끼눈이 되어 놀란 감정을 여실없이 드러냈다.
"아니, 지금은 치우 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너도 슬슬 빠져나가라. 이 곳은 나와 그의……."
그 때, 말을 하다 멈춘 그랜드 아크는 자신쪽으로 날라오듯이 빠르게 다가오는 작은 물체를 발견하였고, 그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찼다.
부우웅-- 콰앙!
"전장이 될테니까! 크하하하하핫!"
그랜드 아크의 정면에 있는, 거의 부서지기 직전인 건물 위로 점프하여 힘있게 착지하면서 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등장한 '치우' 의 모습에, 그랜드 아크는 광소를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악귀같은 가면과, 검붉은 갑옷을 입으면서 환두대도를 들고 있는 진우…아니, 치후의 모습에, 그랜드 아크는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붉은색 계통으로 가는건가? 나름 괜찮은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똥좀 치우느라 늦었다."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사와 함께 재회한 두 남자는, 마치 친한 친구 사이처럼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치우로군?"
"응?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너 사이코 메트리 능력도 있었냐?"
"우리들이 싸웠을때 휩쓸렸던 한국의 이능력자들이 쫄래쫄래 와서 알려주더군.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곱게 보내주었지."
"쯧. 그 모습이 뭐냐고 놀랄때 '치우' 라고 멋지게 말하면서 분위기 잡을라캤는데."
누가 보면 간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나누는것처럼, 싸우고자 하는 의지라곤 1%도 들어가 있지 않는 목소리에 코벤은 대체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그 검…혹시 유물인가?"
그랜드 아크는 심상치 않는 기운을 내뿜는 용광검의 모습에 검의 정체를 물어왔고, 어차피 숨긴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것이 없기에 순순히 가르켜주었다.
"그래. 네 녀석하고 주먹으로 싸우다보면 쉽게 끝이 안 날테니까."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평범한 유물은 아니겠지. 승리의 기념품으로 그 가면과 함께 내가 가져가주지."
"주인은 줄 생각도 안하는데 혼자서 씹지랄의 제왕이 뭔지 보여주시는구만. 기념품으로 네 놈 모가지를 따갈테니까 목 미리 씻어두라고."
"후하하하하하! 역시 네 녀석하고 같이 있으면 1분 1초가 지루하지 않아서 좋단 말씀이야!"
지금까지 자신을 대하는 이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격식을 차리기에 답답하게 느껴졌었는데, 눈 앞의 젊은 동양인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영혼의 지기를 만난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 없었다.
"진…아니, 치우. 다시 한번 생각해라.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지구 전체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지구를 정복한 후에 너와 내가 자웅을 겨누면 되는거 아닌가?"
그랜드 아크는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두려웠다.
치우라는, 자신의 호적수를 만났다는게 너무나 기쁘고, 호적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땐 마치 세상 전체를 다 가진 환희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인 후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호승심을 안겨다준 호적수가 죽은 후에는?
다시는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것에 미칠듯한 박탈감과 허무감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예견된 미래' 에 그랜드 아크는 처음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으로서, 나 외의 라이벌을 남겨두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걸 좋아하거든. 안그래도 능력이 강한데 강한 조직까지 처음부터 주어져 봐. 무슨 재미로 세계 정복을 하겠냐?"
"후우우……."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에, 그랜드 아크는 한 숨을 내쉬면서 아쉬워하였다.
"정녕 이렇게 되고 마는건가. 어쩔 수 없지. 너를 죽인 후에 기다릴 박탈감과 허무함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즐기는 수 밖에."
"아까부터 내가 죽는다는 전체하에서 자꾸 씨부렁거리는것 같은데, 너 자꾸 그러다가 훅가면 쪽팔려서 저승으로 갈 수는 있겠냐?"
"큭큭큭! 걱정마라. 설마 천하의 이 몸이 멋대가리 없게 맨 손으로만 다녔을것 같나?"
쉬이이익---!
"응?"
"오는군. 역시 텔레포트로 보내면 빠르고 쉽다니까."
위쪽에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올리자, 무언가 검은 기둥같은것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쿠웅!!
아니, 정정한다. 검은 기둥같은것이 아니라, 기둥이 맞다.
그랜드 아크의 옆 건물을 파괴하면서 착지(추락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한 검은 기둥의 모습에, 그랜드 아크는 시체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너진 건물쪽으로 느긋하게 걸어나갔다.
"이 녀석을 만들때 주변에서 만류하더군. 신체 강화 10등급이나 되면서 무슨 무기가 필요하냐고 말이야."
저벅 저벅-
"하지만, 아무리 빠르고 강력해도 주먹만으로 해결하기 힘든것들이 존재하지. 귀찮게 멀리서 깔짝 거리는 놈도 있고, 내 주먹으로도 한방에 깨지지 않는 괴수의 외피로 만든 파워 슈츠도 존재하지. 그런 놈들은 빠르고 간결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무기가 필요했다."
탁!
기둥에는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안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구멍이 끝과 끝 부분까지 일정 간격으로 띄엄띄엄 나있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가장 아래쪽 구멍에 오른손가락을 집어넣은 그랜드 아크는 높이가 5m는 되어보이고 사람의 몸통 굵기만한 검은색 기둥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부우웅!
쏴아아아아!!
맹렬하게 휘둘려진 검은색 기둥에 의해, 작은 돌조각들이 나뒹굴 정도로의 강풍이 퍼져나갔고, 그랜드 아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듯이 올리며 기둥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소개하지. 카테가트 해협에서 등장한 아수라 등급의 괴수, 터틀 드래곤의 등껍질로 만든 나의 전용 무기다. 딱히 이름은 짓지 않았다만, 성능 시험을 위해 한번 사용했을 뿐인데 적들이 '분쇄기' 라고 부르더군. 한번 휘두르면 여기에 닿는 모든것들이 분해된다고 말이야."
"호오……? 꽤 고생좀 했겠는데?"
"등껍질이 내 전력을 퍼부어도 쪼개지지 않을 정도라서, 얼굴이 들락날락 거리는 구멍으로 직접 들어가면서 힘들게 놈을 해치웠지. EU 놈들이 도중에 낚아채가려던걸 진짜 힘들게 회수해서 그런지 내 물건이라는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드는 놈이다."
자신의 무기, '분쇄기' 를 소개한 그랜드 아크는 슬슬 굳은 몸을 풀기 시작하였고, 진우 또한 어깨를 풀면서 목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코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떠라. 지금부터는 주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질테니까."
"예, 옛!"
두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난동을 부리려 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란 코벤은 전력으로 그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더이상 사투를 막는 방해물이 없어졌음을 확인한 두 남자는 상대방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그럼 시작할까?"
"우리 나라에는 싸움에 관한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지. 싸움을 할때 이것만 지킨다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사자성어야."
갑자기 진우가 사자성어를 말하려 하자, 그랜드 아크의 고개가 갸웃거리려던 찰나,
"선빵필승!!"
기습적으로 빠르게 달려오자 그랜드 아크는 본능적으로 기둥을 대각선으로 휘두르면서 그의 돌진을 막으려 하였으나, 낮게 점프하여 기둥 위로 올라탄 진우는 기둥 위를 내달리며 그랜드 아크의 머리통을 향해 용광검을 휘둘렀다.
"흐읍!"
부우우웅!
하지만, 그랜드 아크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 기둥을 힘껏 위쪽으로 가볍게 휘두르면서 진우의 몸을 날려보냈다.
상당히 무거워보이는 기둥을 한 손으로, 그것도 매우 가볍게 휘두르니 그대로 반대편으로 날려보내진 그는 착지하면서 기습에 실패하였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칫. 덩치에 맞지 않게 눈치 빠르긴."
"흐하하하하! 선빵필승이라!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 사자성어인걸?"
검기를 늘린다던가, 폭뢰탄을 만든다던가 기습 공격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상대방이 기습 공격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일부러 검의 능력을 제한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랜드 아크가 용광검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게끔 만든 진우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