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55화
레이븐이 자취를 감추었다.
거대 마탑의 수장이 갑작스레 말도 없이 어떠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 라졌다지만,금색 별 마탑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간다. 레이븐은 언제 나 자신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수많 은 간부진을 모집하였고,직원들을 뽑았으며,또한 유능한 비서를 두었 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비상시의 대
책이 잘 되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든 일을 제이나에 게 떠넘긴 채 도주해 버렸다는 의미 이다.
레이븐의 비서,제이나는 서천영의 비서,로서진에게 한풀이를 했다.
“아니 글쎄. 평상시에도 저한테 이 것저것 다 떠넘기거든요? 심지어는 자기 저녁에 시켜먹을 치킨 좀 대시 주문해달라고도 그랬다니까요. 참나, 내가 비서지 자기 노예인 줄 알아. 완전 어이없거든요.”
“아하하……
묘하게 제이나의 말수가 많아졌다.
원래 그녀는 상당히 진중하고,냉정 하고,필요한 말만 딱딱 골라서 하 는 타입이었다. 그런 제이나가 자신 에게 신세 한탄을 하자 로서진은 이 상황이 꽤나 당혹스러우면서도,재 미있다고 생각했다. 언제 그녀의 이 런 모습을 보겠는가.
“으음. 근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 서요……
지금껏 서천영이 금색 별 마탑에 모습을 비춘 적이 얼마나 되던가. 그는 항상 타지에 나가 있다.
물론,타지에 얌전히 나가 있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천영은 타지에서 항상 ‘사고 덩어리’를 문
채로 마탑에다가 보내버린다. 그럼, 그걸 해결하는 것은 오릇이 제이나 의 몫이었으며 현재는 로서진의 몫 이다.
“에휴……. 이래서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 비서직이 극한직업이라고 그 랬는데……
“그러게요……
그래도,그만둘 수가 없다. 로서진 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힘들고,체력의 한계를 보는 것만 같은 직업이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힘든 적이 더 있던가.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뭔가 달랐다.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진심 으로 원해서 하는 일. 좋아하기 때 문에 하는 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체력 이 방전되어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무한동력,그것은 로서진을 위해 쓰 는 단어일 것이다.
“그래도,오랜만에 이렇게 나오니 저는 좋은 걸요.”
“에휴. 맨날 파견 나가봐요. 이것도 재미없어요.”
로서진과 제이나는 나란히 기차에 탑승한 상태였다. 로서진은 시선을 창밖으로 맞췄다. 흘러가는 구름조
차,꽤나 아름답게 보였다. 하늘이 높았다.
가을인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저나 로서진 씨나 대리로 끌려가는 거거든요. 막 좋아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제이나의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로서진 은 굳이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 저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마법학술논문발표회라 고 하는데. 저희 마탑에서는 마법사 가 한 명도 안 가도 괜찮은 건가 요?”
로서진 역시 마법사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마법학술논문발표회라고 하 면,금색 별 마탑을 포함해 13개의 마탑 및 마법학회와 각 국가의 국립 마법연구소에서 초빙된 마법사들이 모여서 발표를 하는 곳. 그런 자리 에,금색 별 마탑에서는 그저 비서 2명만을 보냈을 뿐이다.
“로서진 씨,저희가 누구에요?”
“금색 별 마탑주의 비서와 서천영 의 비서요.”
“그렇죠?”
“……그렇네요.”
절대 평범한 사람의 비서가 아니
다. 그냥 비서가 아니라,굉장한 힘 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서이다. 얼마 전 서천영이 자신의 정체를 세 상에 드러내었다.
천 년 만에 다시 등장한 드래곤, 서천영. 그리고 그의 비서 로서진.
안 그래도 로서진의 이름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서천영이 정체를 커밍아웃 해 버리자 로서진은 그가 드래곤이 었다는 사실에 당황할 틈도 없이 한 바탕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정말 어렸을 때 잠깐 만났던 친구 에게까지 ‘우리 친했었지? 오랜만에 술이나 마실까?’라고 전화가 왔을
정도로 사방팔방에서 연락이 왔다. 참고로 그 친구와는 7살 때 헤어졌 다. 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는 소리이다.
“게다가 저희 둘 다,마법사 출신 이었으니. 아무 문제 될 건 없죠.”
그 말대로였다. 제이나는 물론 로 서진까지 이 논문에 대해 완벽히 이 해한 채였다. 서천영이 보내온 이 파격적인 논문은 아무리 비서인 그 녀들이 발표한다 해도,문제 될 게 없었다. 아마 그곳에 모인 마법사들 은 그저 발표 내용만 듣고선 아예 넋이 나가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마탑주님은 갑자기 왜 자리
를 비우신 거죠?”
원래 같았으면 레이븐이 직접 나서 서 논문발표회에 직접 나서기도 하 였다. 그럴 예정이기도 했고.
하지만 레이븐은 정말 갑작스레 자 취를 감춰버렸다. 비록 금색 별 마 탑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 다지만 이런 경우는 자주 없었기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가끔 있어요. 마탑이고 뭐고,엄청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요.”
“발표회 같은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요?”
“네. ……아마,꽤 중요하다고 생각
제이나는 그렇게 말하며,은은한 미소를 품었다. 로서진은 왠지 그녀 의 그런 모습이 낯설면서도,친숙하 다고 느껴졌다. 비유하자면,마치 저 표정이 제이나의 원래 모습인 것처 럼.
로서진은 알 수 있었다. 제이나는 레이븐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레 사라졌지만,사실은 엄청 굉장한 사건을 모조리 해결하였으며 무사히 돌아와서 또 되지도 않는 자 랑질을 해댈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그랬거든요. 제가 엄청…… 어렸을 때부터.”
“……그렇군요.”
지금 제이나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로서진은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었다. 서천영을 처음 바라 본 그 순간 느끼게 되었던 그 감정 과도 비슷할까. 알 수는 없지만,그 녀는 어쩐지 확실할 수 있었다.
‘그 얼음 같은 제이나 씨도 결국은 한 명의 여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이나는 불현듯 뺨을 살짝 치며 정신을 차렸다.
“나 참. 이상한 얘기는 그만하고, 발표회 준비나 마저 해야죠.”
순간 로서진은 ‘지금 다른 이야기 꺼낸 게 누군데’라는 표정을 지었지 만 제이나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결국 로서진은 그저 피식 웃고선 논문을 꺼냈다. 총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서류철에는 어떤 식으로 발표 하면 좋을지,어떤 부분에서 어떤 유머를 넣으면 좋을지 등등이 적혀 있었다.
물론 로서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 그녀는 이런 분야에서 베테랑 이니까. 하지만 제이나가 아직 신참 인 로서진에게 좀 신참다운 면모 좀
보이라며 끼워 넣어주었다.
“그나저나,학술논문발표회는 매년 위치가 바뀌지 않나요?”
“그렇죠.”
“작년 발표회는 꼭 참여하고 싶었 는데.”
작년의 발표회는 ‘리젠버 항구’에 서 진행했다고 한다. 새하얀 절벽과 푸르른 바다,거센 파도가 매력적인 항구로 유명한 곳. 죽기 전에 꼭 한 번쯤 가봐야 될 명소로 손꼽히는 장 소이기도 했다.
“올해에는 어디에요?”
“‘루이스틴 시티’라는 곳이에요. 꿈
도 희망도 낭만도 없는,그저 칙칙 한 도시죠.”
“아,거기라면……
로서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대번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거의 산업화가 완료되어 자 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하늘은 온통 우중충 한 구름으로 뒤덮여있는 데다가 도 시의 건물들 또한 개성 하나 없이 높이 솟아올라 있을 뿐이다. 오로지 실용만을 추구하여,아름다움과 문 화를 모두 배제시킨 도시.
“사실,마법과 딱 맞는 도시이긴
“그건 그래요.”
그런 도시는 어쩐지 피곤하다. 왠 지,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것 같다 는 느낌이 새록새록 돋는 로서진이 었다.
꽤 잘 사는 놈의 저택이라고 하면, 다 이 꼴이었다.
어설픈 호위,어설픈 마법방벽,적 당히 화려한 무기에 적당히 화려한
의상. 그 모든 것을 ‘외부의 침입’으 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았다지 만,아무런 소용도 없다. 적어도,웨 지스턴이 보기엔 그랬다.
비쩍 마른 중년의 사내는 콧수염을 파들파들 떨며 바닥에 무너졌다. 흔 들리는 눈동자를 간신히 들어 붉은 번개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한 사내 를 쳐다본다. 그는 애써 입을 열었 다.
“사,살려만 주면……
“뭐든 주겠다고?”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였다. 이 제는 슬슬 질렸다.
“그래! 이,이야기가 잘 통하는군! 자네,원하는 게 뭐지? 난 뭐든 들 어줄 수 있어.”
웨지스턴이 씨익 웃었다. 중년 사 내는 역시나 웨지스턴의 목표가 자 신의 돈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시름 덜었다는 둣 안심한 얼굴로 뒤바뀌 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뭐든 주겠네. 책상 아래의 비밀장 치를 건들면,금고가 나온다네. 거기 서 얼마든지 골라보게나.”
그 말에,웨지스턴은 고개를 저었 다.
“아니,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뭐? 그게 무슨……
“네 목숨. 그게 필요해.”
“어..?”
서걱!
웨지스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중 년 사내는,목이 잘려져 나가는 순 간까지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끝에 묻은 피를 털어낸 웨지스턴 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저택을 향해 쳐들어오다가,마법 장벽에 의 해 튕겨져 나간다. 이 저택 자체에
걸려있는 보안 방벽이건만,정작 자 신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쳐내면 서 막아야 할 대상은 쳐내지 못하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장벽이었다.
그러면서 쓸데없이 마정석은 많이 들고 비싸기만 해도,그야말로 돈 지랄이라는 단어로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웨지스턴은 중년 사내의 품에서 돈 몇 다발을 꺼내서 집었다. 그에게 이미 돈이란 의미도 없는 것. 하지 만,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려면 소량 일지라도 돈은 필요했다.
꾸깃꾸깃해진 지폐를 들고서, 웨지 스턴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도,오늘 저녁 메뉴를 스테이크로 할지 고민 중인가. 나
느,
검을 들어 중년 사내의 가슴팍을 살짝 찢는다. 그러자,총 7개의 원 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마법진 형태 의 문신이 드러났다. 일곱 다리의 연결자를 상징하는 마크. 굳이 확인 할 필요도 없이 그의 기억은 정확했 다.
하지만 일을 하나 끝마치고 이렇게 확인을 해줘야 ‘죄책감’이 좀 덜어 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족하군.’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살인을 했던 죄책감을,살인으로 지 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지울 수 없으니까,덮는다. 또 다른 살인을 저질러서. 그렇게 덮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덮을 수 있도록.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웨지스턴은 기억의 도서관을 뒤적 이다가,아주 가까운 곳에서 큰 행 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마법학술논문발표회를 하는군. 거기에 목표물이 꽤 많이 모인다.’
웨지스턴은 무법자에다가,범법자 이다. 이미 앞뒤 가릴 필요 없이 어 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는 상태라 는 의미이다. 하지만,그는 그러지 않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입에 거품 을 문 채로 기절해 있는 경호원들이 보인다. 비록 큰 상처를 입은 자들 도 있다지만,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웨지스턴은 더 이상 무의미 한 살인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의미 없는 행동일지 라도.
웨지스턴은 그렇게 행동했다.
“목표지는……. ‘루이스틴 시티’인 가.”
목표를 정했으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웨지스턴은 그렇게 조용히,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뒤늦 게 호화저택에 들이닥친 기사들은 이미 사건이 끝나버린 대저택을 보 며 허탈한 표정만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