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 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113화 (112/219)

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13화

천영이 잡은 방은 총 두 개. 여자 세 명은 3인실을 쓰고 천영은 노클 텐과 함께 2인실을 쓸 예정이었다. 여자들이 모두 저들의 방으로 우르 르 몰려가자 그것을 탄히 바라보던 노클텐이 말했다.

“참나…… 아주 신났어.”

“그러게.”

그녀들이 뭘 하든 관심은 없었지만

유렌과 멜레인은 유독 백화연을 좋 아했다. 아마 지금도,우르르 몰려가 서 공중 목욕탕이든 어디든 들어가 서 백화연을 달달 볶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니까,당연한 걸까.’

서천영은 그때의 일을 상기해낸다. 흑기사의 등장,그 유례없는 강함에 도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돌 진하던 그 모습을. 그것은 어찌보면 정의의 용사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천영은 조금 다르게 생각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 어서 안달 난,그냥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단 말이지.’

처음에 천영을 마주했을 때도 그렇 다. 그래,사람이라면 물론 오지에서 어린 아이를 보면 구해주고 싶은 마 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화연은 그런 것 치고는 천영에게 너무 지극한 애정을 쏟아 부었다.

“……백화연의 본성이 착한 것도 있겠지만,그건 그냥 네가 좋아서 그러는 것 같던데?”

“응? 나를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 어.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글쎄? 뭐,첫눈에 반한다던가,그 런 게 아닐까.”

노클렌의 그 말에 천영이 얼굴을

찌뿌리며 말했다.

“이 얼굴을 보고 누가 나한테 첫눈 에 반한다고? 말이 돼?”

그러자 노클렌이 오히려 어처구니 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한다.

“엄청 많을 걸?”

“……아니,그 문제가 아니잖아.”

대화가 불리하게 흘러갈 것 같자, 천영은 맥을 끊어버렸다.

“하여튼.”

“……하여튼은 무슨.”

옆에서 듣고 있던 바시락이 피식 웃었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귀찮

다는 티를 팍팍 내며 책을 읽고 있 었다.

“너희 방으로 좀 꺼져.”

“여기가 편해.”

“지낸지 얼마나 됐다고 편해?”

“바사삭 형이 지내는 방이라 특히 편한 것 같아.”

“……내 이름은 바시락이야.”

“미안,부시락 형.”

으드드득

바시락이 이를 거세게 갈자 지켜보 고 있던 몾거김과 노클텐은 괜히 저 들이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무려 마수왕을 단신으로 물리친 괴 물같은 마법사이다. 화를 내면,어떤 식으로 낼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바시락은 짜증스러운 한숨 만 내뱉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비록 마탑에서 서천영과 같이 지낸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지만,말장난 이 시작되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뼈가 사무치도록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시가 답이라고 생각하던 바 시락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맞다,천영 너 이번 논문 발표회 에 제출할 문서는 다 작성했냐?”

“응? 뭐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천영이 되묻자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며 바시락이 한심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년마다 하는 논문 발표회 있잖 아. 그거.”

“아,아! 맞네.”

금색 별 마탑을 포함한,13개의 마 탑과 각 국가의 대표 마법사들이 1 년에 한번 대모임을 갖는 시기가 있 다. 그것이 바로 1년 동안 연구했던 마법을 발표하는 논문 발표회. 그리 고 그런 발표회에 자신의 논문이 실 리는 것은 정말 가문에 길이길이 남

을 영광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나, 금색 별 마탑에서는 달랐다.

그들이 대충 하는 말이 곧 논문에 실릴만한 업적이었고,그들이 심심 하다며 책상에다가 끼적여놓은 공식 은 곧 학회가 발칵 뒤집혀질만한 새 로운 발견이었다. 할 일이 없어서 만들어본 물건은 사람들이 탐내는 아티팩트가 되고 슬쩍 어루만진 마 법 스크롤은 백만불의 가치를 가진 예비 생명줄이 된다.

이런 식이다보니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다지 자신의 마법이 발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찮아했다. 그런

걸 굳이 발표해서 뭐하나? 재미도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정해진 것이 바로 ‘금색 별 마탑 제비뽑기 제도’이다.

룰은 간단하다. 그냥 제비에 자신 의 이름을 넣고 마탑주 레이븐이 뽑 는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뽑히게 되면 논문을 제출해야만 한 다. 거기엔 마탑주 레이븐이라 할지 라도 예외는 없다.

“……다른 마탑에서는 발표회 때 자기 이름 몇 글자 올려보겠다고 난 리법석인데 역시 금색 별 마탑은 다 르군요.”

돗거김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천 영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짜 증난다는 듯 머리를 마구마구 헤집 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이번 제비뽑기에 하필이면 재수도 없게 서천영이 걸렸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완전 잊고 있었어.”

“……너,발표회 일주일도 안 남은 건 알지?”

“응,지금부터 대충 작성해서 전송 하지 뭐.”

그러자 노클렌과 꽂거김이 어이없 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논문

에 실을 정도면 미리 연구해둔 마법 같은 거 있어야하지 않아?”

“게다가 미리 연구를 해놨다고 해 도,그것을 완벽하게 정리해서 나열 해둔 다음 결과물을 제시해야하고, 또한……

꽂거김이 뭐라뭐라 중얼거리기 시 작하자 천영이 뭐 어떠냐는 식으로 답했다.

“지금부터 하나 생각하면 되지 뭐……

그 천하태평한 말에 결국 노클텐과

꽂거김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그들 은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이지 않은 가?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다.

천영은 인벤토리에서 종이더미를 꺼내다가 문득 쓰다 만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어,이건……

맨 위에 제목만 떡하니 적혀있는 그것은 유텐에게 건네주기 위한 서 천영 특제 김치찌개 레시피였다. 그 것을 빤히 바라보던 서천영은 볼을 긁적이다가 피식 웃었다.

“에휴,이거부터 먼저 작성해야지.”

“그게 뭔데?”

“내가 살아가는 ‘희망’이지.”

"뭐?"

뜬구름 잡는 소리에 바시락이 되묻 자 천영이 대충 답했다.

“김치찌개.”

“……아,그 저번에 그거?”

“오,오오! 김치찌개?”

바시락과 노클텐이 반색하여 눈을 빛내자 몾거김 역시 호기심을 가졌 다.

‘희망? 김치찌개라고? 처음 들어보 는데. 새로운 마법인가? 아니면 다 른 무언가?’

천영은 펜 뚜껑을 입으로 문 채 대충 끄적끄적 무언가를 써내려갔 다. 머리카락을 꼬며 고민하기도 하 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기도 하며 한참이나 종이에다가 알 수 없 는 단어를 적고 있자 듯거김은 그것 에 관심을 가졌다.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가 쓰 는 논문이라.’

그러고선,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 는다.

‘드디어 건수가 생겼군.’

그리고 그런 듯거김의 눈빛을 보며 바시락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저 아저씨 탐욕이 얼굴에 다 드러 난단 말이지……

그래서 일부러 귀중품이나 비싼 물 건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저렇게 대놓고 서천영의 논문을 노 리고 있으니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쫓아낼까 하고 고민하던 바시락은 이내 눈을 감았 다. 저건 서천영의 마법 논문도 아 니고 고작 김치찌개의 레시피다. 저 런 거 도둑맞아봐야 서천영은 눈 하 나 깜짝하지도 않을 거다.

무엇보다도.

‘귀찮아……

결국 바시락은 귀찮다는 이유로 꽂 거김의 만행을 방치해버렸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천영은 백화연을 데리고 마수왕의 성에 도 착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마수 왕에 의해 지배당하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멀리 도망쳐버린 모양. 이곳 은 아마 한동안 몬스터의 발길이 닿 지 않을 것이다.

엄청나네.”

백화연이 지옥불을 바라보며 그렇 게 중얼거렸다.

불이 무언가를 태우면 기본적으로 연기가 발생하기 마련. 하지만 지옥 불이 무언가를 태우면 그 존재 자체 를 소멸시켜버리기에 연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 접 보니 신기한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멍하니 불타는 고성을 올려다보고 있자 천영이 어깨를 풀며 말했다.

“들어가자.”

“응.”

불꽃의 색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새카만 색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에 의해 고성은 지금도 계속해서 불타 고 있었지만 건물이 크게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백화연이 그 점에 대해 의구심을 갖자 천영이 말했다.

“이 성은 말하자면 성냥개비야.”

“성냥,개비?”

“응,불에 잘 타는데 막 쉽게 사라 지진 않거든. 그래도 나름 지옥불을 다루던 놈이 지내던 성인데 설마 지 옥불에 잘 타는 성을 지어놨을까.

자기 성이라고 애지중지했던 모양이 야.”

지옥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하지 만 지옥불이라도 태우지 못하는 것 이 있었으니 그것은 흔히 ‘지옥’이 라고 불리는 차원의 물건이다. 지옥 불이 모든 것을 태우면 과연 지옥이 남아나겠는가? 마수왕의 성은 그런 지옥의 물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아무리 지옥의 물건으로 지어 진 성이라고 해도 영원히 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불타고 있 으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태울 것이 사라져 불이 자연히 꺼지겠지만 그 과정까지 과연 몇 십 또는 몇 백

년이 걸리겠는가. 언제까지고 바시 락이 자신의 마나를 쥐어짜내며 껑 껑거릴 필요 없이 그냥 불을 꺼버리 면 되는 문제다.

백화연은 앞장서서 성에 다가가는 서천영을 가만히 뒤쫓았다. 다른 동 료들은 모두 두고 온 상태. 그녀는 슬쩍 물었다.

“왜 나만 데려온 거야?”

그에 서천영이 답한다.

“키 큰 사람이 필요해서.”

백화연 식으로 알아듣자면 그냥 아 무 말이나 내뱉었다고 해석된다.

지옥불에 뛰어드는데 키 큰 사람이 뭣하러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천영 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지옥불의 빛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미한 미소가 지 어져 있음을 얼핏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좋아해주는 만큼 믿 고 있어서 말이야.”

천영은 그렇게 말한 뒤 성큼 걸어 서 다음 성의 주변에 쳐져있는 결계 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결계는 설명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지옥불

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 진 것이었으나 천영에게는 별 문제 가 되지 않았다. 그저 결계에 손바 닥을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지름 2m남짓한 원형 공간이 뻥 뚫렸다.

그 다음 망설임 없이 지옥불 사이 로 걸어 들어가자 백화연이 걱정스 럽다는 둣 말했다.

“지옥불에 닿으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해.”

“그건 그렇지.”

무려 지옥불이다. 그런 것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천하태평한 자세라 니. 백화연이 안절부절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영은 지옥불의 사이를 평범한 길을 걷는 것처럼 지 나쳐 가더니 분홍색 입술을 달싹였 다.

“비켜.”

그러자 화륵 소리가 나며 지옥불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길을 트기 시작했다. 정확히 서천영과 백화연 두 명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 이로.

“이,이게 무슨…… 이것도 마 법……?”

이런 마법은 생전 처음 본다. 아무

리 마법에 대해 문외안인 백화연이 라도 마법의 발동조건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주문과 수인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맺는 일종의 계약이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도 사전 준비동작 없이 마법을 발동 시킬 수는 없다. 쉽게 설명하자면 프로그래머가 컴퓨터 없이는 아무것 도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서천영은 컴 퓨터 없이 프로그래밍을 선보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지옥불이 우리를 비켜가고 있 어.’

천영은 살랑살랑 가벼운 발걸음으 로 성의 내부로 들어갔다. 아무리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는 지옥불이라지만 그 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 했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마치 천영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흠.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는 몇 시간째 오른손에 자연의 마나를 밀집시키고 있었다. 잠시 뒤 에 치를 큰 거사를 위하여. 하지만 아직 서천영의 힘이 부족해 이것만 으로도 부족해보였다. 서천영은 앞 서가며 성채의 기둥이나 무너지기 쉬운 곳에 ‘폭발 부적’을 하나씩 부

착했다. 이것은 일정 충격을 받으면 무너져 중앙으로 모일 것이다.

“그건 왜?”

“후후,조금 이따 알려줄게.”

지옥불을 끄는데 폭발이 무슨 관련 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의 심하지 않고 말없이 천영의 뒷모습 을 쫓았다. 비록 키도 작고 가녀린 몸이지만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괜 스레 그의 뒷모습이 굉장히 거대해 보인다. 드넓은 바다,끝없이 펼쳐진 초원,아득한 우주를 보고 있는 것 처럼.

성의 내부를 둘러보던 천영은 눈살

을 찌푸렸다.

“쓸데없이 넓네."

챙겨온 부적을 확인한다. 약간 아 슬아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죄다 불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다행이 챙겨갈 건 있어 보이네.”

“응?”

그 중얼거림에 백화연이 의문을 표 하자 천영이 당연한 거 아니냐며 고 개를 갸웃했다.

“여기 이제 빈집이잖아. 뒤처리도 형이 나한테 알아서 하라고 했고. 그럼 물건 몇 개 슬쩍 해도 되는 거잖아. 흐흐흐.”

백화연은 30초 전에 느꼈던 이미 지가 또다시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 꼈다.

천영은 정말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듯 성 내부를 구 석구석 돌아다니며 부적을 붙이면서 물건을 챙겼다. 대부분의 물건은 타 고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지옥의 물 질로 만든 물건이나 아주 희귀한 금 속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그대로였 다.

불붙은 검을 집어든 천영이 후〜 하고 불자 기적처럼 불꽃이 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화연은 멍하 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옥불이…… 저렇게 간단히 꺼지 는 불이던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천영은 그 것을 백화연에게 건넸다.

“선물.”

“으응,고마워.”

백화연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자 천영이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이제 공범자야 우린.”

그 뒤로도 한참이나 천영은 성의

내부를 탈탈 털었다. 지하실에 보관 되어있던 값비싼 그림이나 조각상 등등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심지어 는 인벤토리가 부족해지자 내부가 더 넓은 마법 가방까지 꺼내서 그 안에 물건을 꾸역꾸역 쑤셔 박았다.

“후우,간만에 착한 일 했더니 뿌 듯해.”

“……이게 착한 일이야?”

“당연하지! 하마터면 이런 위대한 예술품들이 한낱 젓더미로 변한 것 을 구해줬잖아. 착한 일이 아니고 뭐야?”

“그으래

그녀는 잔뜩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영이 싱글벙글 신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백화연 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천영의 머리를 쓰다듬 기 위해 손을 뻗다가 우뚝 멈췄다.

‘……스물여덟이라고 했는데.’

처음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무 시했다. 하지만 바시락까지 나서서 천영의 나이를 증명해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차마 자신보다 도 나이가 많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 듬을 자신은 없었다.

백화연이 손을 뻗은 채 몸을 우뚝

멈춰서있자 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그녀를 을려다보았다.

“뭐 해?”

그 순간 백화연은 이성의 끈을 날 려버리고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 고 말았다.

“으,으옥, 잠깐만!”

‘귀여워…….,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천영은 이미 멀찍이 도망친 상태였다. 그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이 단단히도 엉켰는지 결국 정리하 는 것을 포기하고 대충 뒤로 틀어서

묶어버렸다.

서천영은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말 했다.

“……휴. 어쨌든 여기까지 따라왔 으니까. 좋은 구경하나 시켜줄게.”

가방까지 전부 챙겨서 성 밖으로 나간 천영은 백화연을 조금 멀리 멸 어진 산등성이까지 데려갔다. 그 다 음 성과 산등성이의 거리를 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뭘 하려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

흡,숨을 크게 들이마신 천영은 발 을 힘차게 구르며 하늘 높이 도약했 다. 백화연의 시선이 천영을 따라간 다. 하늘 높이 날아가던 천영의 몸 에서 갑작스레 새하얀 빛이 터져 나 왔다.

“저건……

덩치가 점점 커지고 피부가 남색으 로 칠해지며 금색의 뿔이 돋아나고 주둥이가 길어지더니 덩치만한 한 쌍의 날개까지 펼쳐진다.

왠만한 버스보다도 커다란 드래곤 한 마리의 등장에 백화연의 눈이 부 릅떠졌다. 그 드래곤은 날개를 활짝

펼쳐 유유히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 니 이내 구름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일대의 마나가 전부 반응할 정 도로 엄청난 마나 파장이 퍼지더니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맙소사..

마치 신이 노하여 천벌을 내리면 저런 모습일까. 새하얗게 빛나며 자 기장을 지직 거리며 내재하고 있는 그 기둥은 정확하게 마수왕의 성에 적중했다.

[드래곤 브레스 - 마나 올 인] [자연계 마나 219% 추가 충전]

슈응.

……두쿵!!

“아.”

잠시,침묵.

빛의 기둥과 함께 찾아온 적막감에 백화연이 흠칫 몸을 떨자 이윽고 후 폭풍이 들이닥쳤다.

휘오오오오!!

“으옥!”

나뭇가지,바위덩어리,돌멩이,흙, 나뭇잎 등등 잔해가 무지막지한 속 도로 사방에 휘날렸다. 백화연은 팔 목으로 눈을 가리며 간신히 정면을 응시했다.

“..H"

지옥불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빛의 기둥에 의해 꺼진 것이 아니다. 빛의 기둥과 함께 연쇄폭발 로 인해 성이 모조리 소멸되어서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지 않게 되어서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며 백화연은 얼떨떨 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서천영이 한 짓이라고?’

잠시 뒤,빛의 기둥이 사라지자 구 름의 틈새 사이로 희미한 태양빛이 스며들어왔다. 백화연은 촉촉하게 젖은 눈을 간신히 떠서 성채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잔해조차 남지 않고,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옥불은 자신이 태울 것이 사라지 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타 다가 오히려 남은 잔해를 전부 태워 버리고 죽은 것이다!

주황색 노을빛이 구름의 틈새 사이 로 성채를 비췄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성의 잔해를 비춰주는 그 빛은 어떻게 보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장소를 슬프게 감싸 도는 것만 같았 다.

내심 그들도 궁금하긴 했다. 무려 서천영이다. 노클렌 일행은 서천영 이 지옥불에 활활 불타고 있는 고성 을 어떻게 처리할지 수많은 추측을 했다.

"지옥불에 맞먹는 지옥물을 소환해 적셔서 끈다던지?”

“불꽃을 자기가 모두 먹어치울 수 도 있어.”

“불사조를 소환할 수도 있지!”

“캡틴 머핀을 소환해서 구워먹을 수도 있어.”

“……그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 리야.”

바시락은 피곤한 눈빛으로 마수왕 의 성채가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했 다. 파티원들은 못내 궁금했는지 그 에게 물었다.

“바시락 님은 어떠세요? 서천영이 어떻게 불을 끌까요?”

“글쎄다……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그 목소리 에 파티원들은 풀이 죽었지만,이내 바시락이 입꼬리를 올렸다.

“뭣하면 직접 보러 가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바시락은 그들을 데 리고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언덕으 로 올라갔다.

저 멀리 노을이 지고 어두컴컴해진 서쪽의 끄트머리에 지옥불 마수왕의 성채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바시 락은 그 상태로 몇 분간 가만히 그 곳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시간이 되 자 슬쩍 말했다.

“시작하려나 본데.”

“그래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일 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 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 말을 이 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 지옥불을 꺼트릴지 예상할 필요조차 전혀 없었다.

하늘에서.

천벌이 내려친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가차 없이 지 옥불 마수왕의 성채를 때려 박는다.

쿠콰콰광!!

……휘이이엉!!

파동이 먼저 퍼지고 그 다음 굉음 그 다음 후폭풍이 멀리까지 떨어져 있던 바시락 일행을 덮친다.

멜레인은 바람막이 마법을 사용해 후폭풍을 간단히 막아낸 다음,벌어 진 일에 입과 눈,코를 크게 뜨고 경악했다.

“저,저저저,저게 무슨……

비단 놀란 것은 멜레인 뿐이 아니 었는지 바시락 또한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푸핫,참 나. 웃기는 놈일세."

폭발의 구름과 먼지가 사라진 뒤, 정말 기적처럼 모든 지옥불이 꺼져 있었다. 은은한 햇살이 뻥 뚫린 구 름 사이로 스며들어와 성채가 남아 있던 잔해를 비춰준다. 그곳에는 정 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옥불을 끈다는 게.”

“설마 모조리 박살내서……

“……끈다는 뜻일 줄이야.”

정말 단순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 하지만 현존하는 방법 중 제 일 간단한 방법. 지켜보던 바시락이 피식 웃으며 툭 내뱉었다.

“서천영이니까.” 그래,서천영이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