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03화
25장 검선 백화연
로서진에게는 딱히 인수인계라고 할 만한 것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서천영의 비서는 공석이었던 지라 선임자가 남겨줄만한 팁이나 정보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것 을 제이나가 임시로 도맡아서 하고
있었기에 그저 할 일 정도만 알려주 면 된다. 심지어는 이 일을 해야만 하고, 저 일을 어디서 받아와야 하 고 등등으로 설명을 해주기만 하면 로서진은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 은 일체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해 한 것처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제이나는 확 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작 로스틱 클랜이라는 곳 에서 머물고 있을 만한 인재가 아니 었다. 시키면 절대 군소리를 하지 않고 척척 도맡아 하면서도 비효율 적인 일이 있으면 동의를 구해 과감
하게 기존의 방식을 스스로 바꿔버 리고 한 번 가르쳐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으며 애초에 가르치기도 전 에 척척 알아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 해버렸다.
“로서진 씨,1종이 뭔지 아십니 까?”
“이제 곧 알게 될 것 같아요.”
“……네,1종은 ‘식량’을 뜻합니다. 2종은 ‘의류’,3종은 ‘마정석’ 등을 포함하죠.”
“4종은요?”
“4종부터는 목재 쪽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일단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 1종에 대한 서류입니 다. 이제부터 거래를 할 때는……
제이나가 로서진에게 일을 가르치 는 것을 보며 레이븐은 조금 당황했 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에게 너무 과한 정보를 말 그대로 꾸깃꾸깃하 게 때려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만,로서진은 아주 담담한 표정으 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즉시 다음의 정보를 원했다.
‘빠른 시간 내에 제대로 일을 하고 싶다는 건가.’
게다가 그녀는 정말 일에 미친 사 람처럼 서천영이라는 존재에게 헌신 적이었다.
어떻게든 서천영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인지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일에 매진했다.
오죽하면 금색 별 마탑에 입사한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제이나 가 그녀보고 쉬엄쉬엄 일하라고 말 릴 정도로.
‘신입 사원이 너무 열심히라 내가 당황스러운 건 또 오랜만이네……
제이나는 로서진이 벌써부터 서천 영의 비서직을 대부분 할 줄 알게 되자 사실 이쯤 되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왠지 욕심이 생겼다.
‘……이 여자라면 좀 더 중요한 일 을 맡겨도 되겠는데.’
하지만 거기부터는 ‘신뢰’의 문제 였다. 그렇기에 쉽사리 가르쳐줄 수 없는 부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되리라.
“우선,이것들을 사무실로 옮겨놓
죠
제이나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던 서 천영의 관련 서류들과 아직까지 그 가 귀찮다며 챙겨가지 않은 여러 가 지 잡동사니들을 가리켰다. 늘어놓 고 보니 꽤나 양이 많아서 제이나
역시 놀랐다.
“엄청나네요,이 정도면. 모든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들은 전부 비서를 두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서천영이 좀 특이할 뿐.”
사고를 워낙 많이 쳐야 말이지. 제 이나가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주섬 주섬 들어 올리자 로서진이 구석에 박혀있던 제복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어린이용 제복인데요?”
“네,메이지 서천영의 반년 전 사 이즈에 맞춰서 제작한 건데……
포장지를 뜯지도 않았다.
“……메이지 서천영은 ‘성장기’라 키가 금방 자라지 않나요?”
“그렇죠. 예산 낭비이긴 한데 그래 도 명색이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인 데 유사시에 제복 하나 없으면 저희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요.”
레이븐과 제이나는 성장기라는 말 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서천영의 나이는 스물여덟. 절대 성장기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이다.
그녀들은 각자 서천영의 물건을 챙 겨서 그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마법 서적이 가득한 책상 위는 어느덧 제 대로 된 서류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
다. 휑했던 옷장에는 서천영의 제복 으로 채워졌다.
“어머,이거 메이지 천영이 입으면 엄청 예쁠 것 같은데……
“그렇죠? 저희가 장인들에게 특별 주문하는 거예요.”
“와아. 원래 금색 별 마탑의 마법 사들은 장인이 만들어준 걸 쓰나
요?”
그건 아니다. 다만 서천영의 제복 에는 제이나를 포함한 금색 별 마탑 의 여러 여자 직원들의 사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예쁜 옷을 더 많이 입
혀보고 싶다는 그런 욕망. 그랬기에 보통의 마법사는 아무리 많아봐야 한 개에서 두 개정도밖에 가지고 있 지 않은 제복은 천영은 9개나 가지 고 있었다.
“전부 엄청 예쁘네요. 근데 저건 여성복 아닌가요?”
로서진이 구석에 있는 두 벌의 옷 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은색의 짧 은 미니 드레스형의 제복과 흰색의 해군복 같은 제복이 있었다.
“그건…… 메이지 천영의 성별이 ‘중성’이라 그래요. 어쨌든 중성이라 면 여자와 남자 두 개의 옷을 모두 입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어서 주
문했어요. 본인이 죽어도 안 입겠다 고 선언해버려서 여러모로 많은 사 람들이 아쉬워했지만요.”
“그,그렇군요.”
중성이라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 기였다.
“그런 걸 막 이야기해줘도 되나 요?”
“딱히 비밀은 아니던데요? 본인이 말했어요. 믿을만한 사람이면 밝혀 도 된다고. 그리고 로서진 님은 저 희가 믿는 아니,믿어야만 하는 사 람이죠.”
“아……
제이나의 말을 듣고서 로서진은 다 시 한 번 여성용 제복에 눈을 돌렸 다. 포장지를 뜯지 않은 걸 보니 절 대로 입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 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입으면 엄청 예쁠 텐 데……
본인은 남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 으니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다.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제이나는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로 서진은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청소를 끝마친 다음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 다. 그곳의 공간은 좁지만 가끔 야
근을 해야 할 때나 휴식을 취할 때 머물 수 있도록 작은 침대와 1인용 소파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 또한 청소하기 위해 들어온 로서진 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있는 무언가 를 발견했다.
“어머.”
서천영이었다. 그는 어디에서 잔뜩 다치고 온 건지,밴드와 붕대를 몸 여기저기에 감은 상태였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바로 잠든 것인지 짧은 팬티인지 팬 츠인지 구분 안 가는 하의 하나와 사이즈가 이상하리만치 큰 셔츠 하 나를 입은 상태였다. 배꼽까지 전부
드러내놓고 자는 그 모습에 로서진 은 한숨을 푹 쉬고 그에게 다가갔 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불을 덮어주려다가 문득 그녀의 시선이 천영의 하체로 이동했다. 몸 에 착 달라붙는 팬츠는 몸의 윤곽은 여지없이 드러내주었으나 남자 특유 의 굴곡이 전혀 없었다.
‘정말,없네……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피해버린 로 서진의 시선은 그의 허벅지로 향했 다. 꽤나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해 보이는 허벅지에는 붕대가 얇게 감
겨 있었다.
‘……네청이라는 분과 매일 마법 수련을 한다고 했던가.’
네청의 얼굴은 본 적도 없지만 그 녀가 꽤나 강하다는 사실은 익히 들 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속세의 일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서천영 하나만을 바라보고 현재 금색 별 마탑에서 머 무는 중이라고. 그래도 레이븐이 말 하길 네청이라는 존재가 이곳에 머 무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거대 한 버팀목이 자리한 것이나 마찬가 지라고 한다.
로서진은 서천영의 머리칼을 슬쩍
뒤로 넘겼다. 얼굴에도 밴드가 조금 붙어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햇살이 그의 몸을 비춰주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마치 천사가 상 처를 입고 이승으로 잠시 쉬러 온 것만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히 이렇게 잠든 천영을 보니 긴 장된다. 로서진은 슬쩍 천영의 상의 를 아래로 내렸다.
10대 초중반 치고는 아니,소년 치 고는 꽤나 잘록하고 매끈한 허리가 그녀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천영의 그림 하 나만으로도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 던 적이 있을 정도로 그에게 푹 빠
져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실제의 서 천영이 무방비한 상태로 눈앞에 있 으니 여러 가지의 욕망이 피어오르 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 했다.
‘후우,난 할 일이 많아. 진정해야 돼.’
로서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뒤돌아섰다. 문을 닫고 나가려다가 그래도 한 번만이라는 마음에 다시 되돌아왔다.
‘이,입술 한 번만 만져보고……
그렇게 그녀는 3시간 동안 천영의 방에서 나가지 못했다.
네청은 푸른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하늘 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왠지 그림 자가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푸르디 푸른 그 하늘을 관통하여 별자리까 지 점치던 네청은 씁쓸한 표정을 지 었다.
‘아무래도 슬슬 때가 되어가는 모 양이구나.’
그녀는 예언가가 아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도 없다. 하지만 천
년이나 살았던 영물로서 자신의 미 래 정도는 아주 조금이나마 ‘느낌’ 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확실한 느낌을 주지 않지만 때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도 움을 주곤 했다.
네청이 금색 별 마탑의 꼭대기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레이 븐이 허공을 계단처럼 밟아 올라왔 다. 그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네청을 향해 부탁했다.
“네청 님.”
“그래,말해보거라.”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10
년도 더 전에 봉인석 하나를 구한 적이 있는데. 워낙 해석이 힘들어 서……
“재미있겠구나.”
그 봉인석은 벌써 800년도 더 전 에 만들어진 것인데 도대체 해석을 할 수도 없고 정체를 알아낼 수도 없어서 아직까지도 애물단지로 자리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네청이 라면,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무 기라면,어쩌면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이븐은 그녀에게 부탁했다.
사실 이런 부탁이 처음은 아니다. 레이븐은 평범한 종족의 마법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종종 네 청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때마다 네 청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모든 부탁 을 가볍게 들어주었다. 그녀에게 너 무나도 미안할 정도로 아무런 대가 도 바라지 않고서.
네청을 봉인석에게 안내한 레이븐 은 뭔가 찝찝한 얼굴을 한 채로 사 무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평 소와는 달랐다. 언제나 천영에게 마 법 수련을 도와주며 즐거워하는 얼 굴밖에는 본 적이 없었기에 저렇듯 슬픈 듯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도대체 무엇이 천 년 묵은 이무기 를 슬프게 만든단 말인가.
“알 수가 없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자에 몸을 맡 긴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느릿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온통 푸석푸석한 머리칼을 하고 있 는 서천영이 하품을 쩍쩍 내뱉으며 복장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채 찾아 왔다.
“……급하게 호출하긴 했지만 정말 급하게 와줘서 고맙군.”
“으음,내가 행동이 재빠르긴 하 지.”
옷이라도 좀 갖춰 입으라는 말을
돌려서 말했지만 천영은 문장을 있 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출장을 가줘야겠어. 아무래도 던 전이 발생한 모양이다.”
레이븐이 그렇게 말하자 서천영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억지로 묶으 며 피곤한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별 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었 다.
“그런가……
던전과 그리픈의 경계는 마치 차원 을 나누는 것처럼 막혀있어 대부분 이 안전하다.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하면 딱히 위험을 끼치는 경우는 없
지만 아주 간혹 내부에 있던 몬스터 가 터져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원 인은 알 수 없다. 아주 가끔 특별한 경우에만 발생하기 때문.
“위치는 대륙의 북서쪽에 있는 ‘악 귀가 울부짖는 절벽’이다.”
“그냥 아저씨가 가면 안 돼?”
천영이 레이븐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정말 ‘악귀’처럼 변한 표정으 로 서천영을 노려보았다.
“아,알았어. 갔다 오면 되잖아.”
장난스럽게 말하던 분위기가 순식 간에 급변한다. 레이븐의 표정이 살
짝 굳자 천영 역시 이야기를 제대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뭔가 느낌이 이상해. 발생한 던전 자체는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벌써부터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 전부 궤멸 당했다.”
“……전부?”
“그래,전부. 던전의 난이도 자체는 고작 C정도로 기록되어 있단 말이 지. 그 정도 수준에서 몬스터가 터 져나와봐야 절벽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당해서 진작 사라져야 정상이다.”
그 말은 던전이 갑작스레 업그레이 드가 되었다거나 혹은 기록되지 않 은 던전이 하나 더 발생했다거나 혹 은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던전의 힘 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 불가능…… 단지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팔리 다 리에르의 간부 한 명을 그 근처에서 목격했다고 하더군. 검은색의 망토 를 두른 수상쩍은 인물들과 함께 말 이야.”
레이븐은 그렇게 말하며 서천영에 게 그 던전에 대해 알아봐줄 것을
부탁했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집 단이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굉 장히 높아보였다.
“파트너로 네청 님을 데리고 가고 싶은데……
“……그게 지금은 곤란해서 말이 지.”
머리를 긁적이며 레이븐은 서류를 슬쩍 뒤로 밀었다. 천영은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네청이 또 수 련하러 들어갔거니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하란 데려갈래.”
“……유독 백하란만 챙기던데 이유 라도 있나?”
“응,개 등이 탑승감이 좋아.”
하성이 들으면 삐질만한 이야기였 다.
“참…… 마음 같아서는 데려가라고 두고는 싶지만 지금 꽤 바빠서 말이 지. 벌써 오늘 오전에 하성과 백하 란 역시 파견을 보낸 참이다.”
“으육,혼자 가라고? 싫은데……
소파에 앉은 채 짧은 다리를 흔들 거리며 말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초등학생 꼬마가 아빠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칭얼거리는 모습이
레이븐은 알고 있었다. 서천영 정 도의 마법사라면 그 어떤 오지에 보 내도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귀 환할 것이라는 사실을.
폐허,삭막한 바람이 불러오는 공 간. 살아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온통 붉은색과 초 록색의 피투성이로 얼룩진 이 장소 를 보며 백화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 었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구나.’
그녀의 검 끝에서 초록색의 핏방울 이 똑,하고 흘러내린다. 덩치가 거 의 집채만 한 괴수들의 시체가 사방 에 널려있었다. 그들을 단 한 마리 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린 참이었다. 이미 백화연이 도착했을 때는 늦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구해낼 수 없 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좋았을 텐데……
검을 허공에 집어넣은 백화연은 사
박 모래를 밟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색을 잃어버린 새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리더니 이윽고 바람과 바람의 사이로 그녀가 모습을 감췄다.
폐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