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53화
우두둑,쿵,쿵!
경비원을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어 가자 위층에서 쿵광거리는 소음이 끊이질 않고 들렸다.
천영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 ‘아가씨가 키우는 애완동 물들’이라는 대답만을 한 뒤 입을 다물었다. 천영도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
좁은 계단을 타고 조금씩 위로 올 라가니 엔이라는 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야,너 확! 꺼져 그냥.’
‘푸하하,엔. 네가 운이 없는 걸 나 한테 화내면 어떻게 해?’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크하하하하!’
상당히 리드미컬한 그 목소리는 상 당히 곱고 아름다웠지만 거칠고 과 격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 에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경비원은 천영을 데리고 엔이 있는 방의 바로 앞까지 가더니 살짝 창백
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침을 소리 나도록 삼키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해. 네가 금색 별 마탑 이라는 건 분명 대답한 마법사라는 사실이겠지만 그건 엔 아가씨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니까. 절대 네 마법 에 대해서 자만해선 안 돼. 아가씨 는 벌써 몇 백 년 전,네가 상상하 는 그 시대 이전부터 마법에 대해 연구하신 분이야.”
“네?”
“여기에 찾아와서 거드름 피우다가 엉덩이 걷어차이고 쫓겨난 마법사를 상당히 많이 봐서 하는 소리야. 너 는 조용히 그저 조숙한 요조숙녀처
럼 가만히 앉아서 아가씨의 말씀을 경청해. 가끔 묻는 말에는 살짝 웃 으면서 ‘네’ ‘아니요’로 대답하고.”
“왜요?”
“……너한테 이런 걸 강요해서 정 말 미안하지만 ‘소녀소녀한 소녀’를 보는 게 엔 아가씨의 유일한 낙이거 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라 고 해야하나.”
천영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 질을 쳤다.
“설마 아가씨의 취향이라는 게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남자남자한 남자는 보여줄 수 있 는데. 안 되나?”
“그럼 너랑 나 둘 다 죽어.”
그는 잠시 고민했다. 레이븐의 스 승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굳이 저런 연기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하지만 천영은 이 드래곤이 남긴 큐브에 대해 꼭 알고 싶은 것 들이 많았다. 그리고 레이븐의 스승 이라는 마법사 역시 상당히 오랜 시 간 살아왔다는 소문이 있다. 어쩌면 드래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천영은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소녀처럼 행동하는 것 은 무리일지라도 얌전히 앉아서 얌 전한 척을 하는 정도라면 가능했으 니까.
잠시 뒤 경비원이 노크를 하자 안 쪽에서 거칠게 ‘뭐야!’라고 윽박지르 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어오 라는 대답이라고 해석한 모양인지 경비원은 문을 살짝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카드를 늘어놓 고 게임을 하고 있는 횐색 머리칼을 가진 20대 중후반의 여인과 갈색 머리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흰색 머리칼의 여인, 엔은 경비원
을 찌릿 쳐다보다가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뒀다. 그곳에는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작고 청순가련한 소년 아니,소녀로도 보이는 아이가 서있었다.
“이거 원,손님이 오셨나보군. 크흐 흐,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오늘 즐거웠다구.”
“젠장,망할 자식이…… 다음부터 는 너랑 이거 하나봐라!”
“너 그 소리만 100년째라고. 알고 는 있지?”
“몰라,꺼져!”
중년의 사내가 엔을 잔뜩 약 올리
더니 경비원의 어깨를 툭툭 치고 천 영의 머리칼을 헤집더니 그대로 나 가버렸다. 천영 뿐만 아니라 경비원 조차 어린애로 보는듯한 그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경비 원이 ‘저 아저씨도 최소 오백 살은 넘는다.’라고 속삭였다.
‘여기는 뭐 인외들의 천국인가.’
평범한 인간이 100세가 넘도록 살 수는 없으니,분명 두 명 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엔은 천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더니 중년의 사내가 나가자마자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카드가 늘어 져 있던 테이블이 접히며 땅속으로
들어가더니 양쪽에서 새로운 원형의 테이블이 솟아났고 허공에서 식탁보 가 하늘하늘 떨어졌으며 유리잔이 똑 소리를 내며 안착하더니 커피가 저절로 채워졌다. 그 다음 경비원에 게 손짓을 하니 그는 그대로 뒷걸음 질을 쳐서 나가버렸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엔은 팔걸이에 몸을 반쯤 기대고선 한손 으로 커피를 우아하게 마셨다. 드레 스를 입고 있는 엔은 정말로 어딘가 의 우아한 아가씨처럼 보이기도 했 지만 방금 전 보여줬던 거친 언동 때문인지 천영은 쉽사리 경계심을
풀 수 없었다.
“앉아.”
엔은 천영을 아주 묘한 눈으로 바 라보았다. 마치 그의 행동 하나 몸 짓 하나를 전부 눈에 새기겠다는 둣 이.
눈을 깜빡이는 손가락을 꿈틀거리 는,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는, 커피 잔을 들어올리는,입술에 대고 마시는,살짝 뜨거워서 얼굴을 찡그 리는 그 표정 하나하나를 전부.
그녀는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았 다. 적막함에 짓눌리는 이 분위기에 서 천영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
다. 그녀에게서 뭔가 엄청난 위압감 이 풍겨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녀 에게는 사람의 본능을 자극해 자신 의 아래로 두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있었다.
천영은 한참이나 커피를 홀짝이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전부 마셔버리 자 엔은 그것을 눈치채고 손가락을 튕겨 커피를 리필 했다. 그걸 또 마 시라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커피를 한 번에 두 잔이나 마시기는 싫었던 천영은 양손으로 커피 잔을 쥔 채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엔 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선 자신의 커 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천영도 따라서 그것을 올려놓자 엔 이 자세를 바로잡더니 이번엔 상체 를 천영 쪽으로 쭉 내뺐다.
“몇 살이니?”
그것이 엔의 첫 번째 질문. 천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원래의 나이를 말 했다.
“스물여덟이요.”
최대한 얌전하게.
“어리구나.”
그녀가 말했다.
엔의 기준으로는 어려보이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천영은 딱히 아무
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레이븐 그 꼬맹 이가 보내서 왔구나.”
“……네.”
금색 별 마탑의 우두머리인 레이븐 을 고작 꼬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 지 않을 것이다.
엔은 거기서 또 말을 멈추었다. 그 러고선 한참이나 같은 자세로 천영 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내려온 몇 안 되는 예술 작 품을 평가하듯이,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이. 방금 전까지 스
트레스를 잔뜩 받은 채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던 엔은 어디로 갔는지 반 쯤 풀어진 얼굴로 멍하니 무언가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썩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다만 그 대상이 본인이라는 점이 천영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엔은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 다. 테이블을 가로질러 천영의 곁에 다가온 그녀는 무릎을 천영의 자리 에 걸치고선 얼굴을 확 들이댔다. 마치 이번에는 가까이서 보고 싶다 는 둣. 그녀는 희고 기다란 손을 들 어 천영의 빨에 살짝 대었다. 엄지 로는 입술을 살짝 쓰다듬으며 그의
머리칼을 검지로 살짝 꼬아보더니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천영의 고개를 획 돌렸다.
“후후,왠지 네가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은걸. 너,스스로의 정체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
“나는 알 수 있어. 아주 오래 전, 어렸을 때. 너와 비슷한 기운을 가 진 사람을 본 적이 있거든.”
그 말에 천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 리자 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그러고선 다시 우아하 게 걸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 았다. 약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 는 것이 천영이 원하는 것을 전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이 분야에 관해선 언니가 전 문일 테고…… 너는 우리 언니를 찾 으러 가는 거겠지.”
“언니라고 하면 혹시……
“응,레이븐 그 꼬맹이를 가르친 사람. ‘에니안’이 내 언니야.”
에니안. 9클래스를 달성했다는 전 설적인 대마법사. 그리고 지금 천영 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어?”
끄덕끄덕끄덕. 천영이 격렬하게 고 개를 끄덕이자 엔은 뭐가 그리도 좋 은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우후후,하지만 이런 간만에 찾아 온 좋은 손님을 바로 놓치는 것도 아까우니까. 내기를 하자.”
“내기요?”
엔은 손바닥을 뒤집어 테이블 위를 쓸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카드 한 뭉치가 놓여 있었다.
“나에게서 이 카드 게임으로 이겨 봐. 그럼 너에게 우리 언니가 있는 마녀들의 거주지 ‘빛내림 숲’으로 통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를 줄 테
니까.”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더니 한 장 씩 뒤집었다. 그것은 포커의 카드와 도 비슷했지만 묘하게 사이즈도 작 고 안쪽에 새겨진 그림이 너무나도 다양해서 도저히 통일점이라고는 찾 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천영 에게 룰을 설명했다.
“우선 중앙에 카드를 뒤집어 놓은 다음 두 명 기준으로 패를 7장씩 나눠 받아. 그리고 중앙에 카드를 6 장 놓아둔다. 이 카드에는 각각 의 미가 하나씩 있는데 예를 들어서 이 하트 무늬에는……
천영은 집중해서 엔의 말을 경청했
다. 그는 어쩐지,그 룰이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30분 뒤.
천영은 손에 들려 있는 카드를 광 속으로 바닥에 내리쳤다. 그는 음흉 한 얼굴로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 다.
“피박에 쌍박에 전판 나가리요.”
“크으으으으옥.”
엔이 죽을상을 지으며 입술을 꽉 깨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천영은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를 세로로 세 우고 흔들흔들 물결치듯 팔랑거렸
“으흐흐,갈까? 말까? 갈까요? 말 까요?”
천영의 손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엔은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리며 카 드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부 릅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손목스냅 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 다. 그대로 카드를 획 뒤집어 마지 막 일격까지 먹이자 엔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광광 내리쳤다.
“너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솔직히 말해서 천영은 이 카드 게 임 그러니까 즉, ‘고스톱’과 유사한
이것을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 다. 그냥 단지 엔이 이 게임을 더럽 게 못했다. 결국 자신만만하게 자신 이 룰을 설명해놓은 주제에 천영에 게 완패를 당해버린 엔은 침울한 얼 굴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크으윽,나는 저런 꼬맹이한테도 지고……
마음 같아선 그냥 내기 같은 거랑 은 안 맞는 것 같다며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천영은 열쇠를 쉽게 받을 수 있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후우,좋아. 약속대로 열쇠를 줄 게.”
엔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너털너털 벽을 향했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벽에 손을 대니 그곳에서 갑작스레 문이 나타나 열 렸고 그 안에서 고깔모자 하나를 꺼 냈다. 흡사 옛날이야기 속 마녀들이 착용할 것만 같이 생긴 모자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쭉 나가면 ‘어 둠이 내리는 숲’이 있어. 이 모자를 쓰고 거기에 가면 돼. 간단하지?”
뭐가 간단한지는 모르겠으나 천영 은 어쨌든 그것을 받아들었다.
‘마녀들의 숲이라.’
책을 읽으면서 들어본 적은 있었
다. 이곳 알케론 시티 근처에 터를 잡아서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숨겨놓 고 생활한다고 했다. 당장 알케론 시티의 거리에 나가도 마녀는 심심 찮게 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그들의 거주지까지 찾아간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 마법사와 사제들에게 ‘마녀 사냥’을 심하게 당한 이후로 자신들의 거처 가 함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시 작했다고.
지금에 와서는 마녀도 그저 학파가 다른 마법을 배우고 있는 이종족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도 나도 알고 있 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마녀들은
타종족 특히 인간을 배척한다고 한 다.
“뭐,너는 인간이 아니니까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너처럼 신성한 기 운을 품고 있는 ‘영물’은 오히려 좋 아하니까.”
천영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자 엔이 ‘아차!’하고 이마를 탁 치더니 서둘러서 무언가 를 주섬주섬 꺼냈다.
“후후,가기 전에 좋은 선물 하나 를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