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IF-만약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인 게 초반에 밝혀졌다면? (3)
“뭐, 무슨? 미친 거 아냐?”
마이너 패치의 괴멸.
그 수장이었던 에라타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게 다였다. 그나마도 현하빈의 눈에 띄거나 직접 싸움에 참여한 적이 없어서 가능했던 것.
“다른 녀석들은 왜 연락이 안 돼? 배신한 거 아냐?”
다급히 다른 사도들에게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이미 그들 간의 통신은 끊긴 뒤. 게다가 섣불리 연락을 시도하다 SPES나 현하빈의 눈에 띄었다간 죽음이었다.
“관리자, 관리자님에게라도 어떻게든 연락을…….”
타닥, 타닥.
시스템의 관리자 모드를 켜서 관리자와의 접선을 시도하는 에라타.
그러나.
[침입자 발생, 대응 불가.]
화면에 뜬 것은 그 문구가 전부였다.
“음……?”
‘침입자가 있다고?’
어디에?
‘설마 관리자님의 영역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해?
에라타는 응답 없는 화면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 * *
한편, 에라타가 관리자와 연락을 시도하기 조금 전.
“오호, 관리자가 사는 곳이 저기라고?”
멋대로 이공간에 들어와 흐음, 하고 주변을 살피는 하빈. 그녀는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관리자의 영역을 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본 레몬은 기겁했다.
“으아악! 당신 뭐예요!”
“너는 뭔데?”
“그러니까, 저는! 어…….”
“왜 말을 얼버무려? 머리 색은 상큼하니 레몬처럼 생겨가지고.”
“…….”
“레몬 이야기하니까 레모네이드 먹고 싶네? 관리자 족치고 오면 먹으러 하와이 가야겠다. 으음, 아니면 그냥 지금 레모네이드 먹고 올까?”
“지,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관리자를 족친다뇨?!”
“왜? 무슨 문제 있어? 혹시 너 관리자 따까리니?”
“따까리라뇨!”
레몬이 감정 상한 얼굴로 외쳤다.
“저, 그런 놈 따까리는 죽어도 싫거든요?”
“그래그래, 그럼 비켜도 되겠네? 좀 비켜 줄래? 관리자 슥삭 하고 오게.”
“자, 잠시만요, 대체 왜 관리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데요?”
레몬은 슬쩍 하빈이 들고 있는 아헤자르를 살피곤,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혹시…… 아헤자르의 복수를 대신 해주시려는 건가요?”
[오? 나를 아나?]
“엥? 너 아헤자르를 알아?”
둘의 질문에, 레몬은 찔린 듯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냥 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아헤자르가 관리자 때문에 봉인되었던 거라면서요? 어쨌든 그래서 복수를 위해 가시는 건가요?”
그러나 하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엥? 아니? 아헤자르가 관리자한테 무슨 일을 당했든 그건 걔 사정이고.”
[……?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네? 그런 이유가 아니면 뭔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는 둘에게, 하빈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건, 그냥 내가 관리자에게 사심 있어서 복수하는 거야.”
그 말에 레몬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도 관리자에게 당한 게 있으셨군요! 대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당하셨길래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너무 경황이 없어 제대로 묻지 못했지만, 이공간은 보통의 경지로는 절대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올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 혹은 여기까지 찾아오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
필시, 그 어려움을 딛고 찾아올 만큼 사무치는 이유가 있을 터.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진 레몬이 진지한 얼굴로 하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하빈이 입을 열어 이유를 말했다.
“그래, 관리자 걔 때문에 내가 맘 편히 네풀릭스를 못 보잖아.”
“……네풀릭스요?”
레몬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누구지? 특이한 이름인데…….’
네풀릭스를 보기 위해 관리자를 족친다니.
‘혹시 잃어버린 가족이나 연인인가……?’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해가 안 되는데?
한편, 그러는 동안 하빈은 속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카카페도 맘 편히 못 본단 말이지.”
“카카페는 또 누구…….”
“그뿐인 줄 알아? 여행도 못 가. 걔 때문에 내가 얼굴이 다 팔려서 맘 편히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
“저, 죄송한데 네풀릭스랑 카카페가 누구예요?”
“뭐? 누구냐구? 아, 여긴 그게 없겠구나?”
하빈은 레몬을 위해 친히 핸드폰을 켜서 설명해 주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여기 이렇게 보는 건데……. 아, 여기 와이파이 안 되네. 다운로드해 둔 것만 보여줄게.”
아직 던전 속에서 터지는 와이파이도 개발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빈은 다운로드된 콘텐츠들을 보여주었다. 하빈의 설명을 들은 레몬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야……?’
죄다 영화, 드라마, 웹툰, 웹소설.
“이것 때문에 관리자를 족친다고요?!”
“그래.”
“이걸 맘 편히 볼 수 없어서……? 고작 그 이유로요?”
“뭐어? ‘고작’이라고 하지 마! 사람이 사는 이유가 다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데! 관리자는 나의 행복권을 침해했다고!”
“…….”
‘행복권? 지금 내가 뭘 들은 건가.’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레몬을 위해, 아헤자르는 몰래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실은 게이트가 열려서 가족들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관리자가 전 세계에 퀘스트를 내려서 이 녀석을 죽이려고 하는 중이지.]
그 말을 들은 레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역시 그런 중대한 사연이 있었잖아요! 관리자를 당장 잡으러 가려는 게 한 방에 이해되네요!”
레몬은 다시 현하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네풀릭스’니, ‘카카페’ 같은 이유를 대다니. 일부러 가벼워 보이려고 자신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은 건가 보다.’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될 법했다.
‘그래그래, 설마 진짜로 여행을 못 한다는 이유로 관리자를 족치겠다 달려온 건…… 절대 아닐 거야.’
레몬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귀로 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빨리 처리하고 하와이에 레모네이드 마시러 가야 한다니까!”
[근데 하와이에 레모네이드를 팔던가?]
“어? 그러게? 그래도 거기 어딘가는 팔겠지? 안 되면 가져가야겠다!”
“…….”
진지하게 레모네이드를 찾는 현하빈의 모습.
‘지, 진짜로 못 논다는 이유로 관리자를 처치하려는 거…… 아니겠지?’
왜 저렇게 긴장감이 없는 건데?!
마침 그때, 하빈이 손을 뻗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반짝거리는 입구.
“저기인 거겠지? 관리자 사는 곳! 현시우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기였던 것 같은데.”
“자, 잠깐만요!”
레몬은 기겁해서 하빈을 말렸다.
“저기 그냥 들어가면 위험한 곳인데요!?”
“응, 내가 더 위험해서 괜찮아!”
“……?”
“내 걱정 말고 관리자를 걱정하렴! 아, 넌 관리자 싫어한댔지? 그럼 여기서 네풀릭스 보고 있을래? 폰 빌려줄까?”
하빈이 선뜻 핸드폰을 건넸지만, 레몬은 손이 후들거려 받을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긴 비상 점검 때나 들어가던 곳인데, 평상시에 들어가면 관리자한테 들킨다고요.”
“얘도 참, 대체 뭘 들은 거니? 나 관리자 만나러 가는 거라니까? 들켜야 집주인이 놀라서 달려올 거 아냐!”
“……네?”
레몬이 뭐라 하든 말든 하빈은 뚜둑, 뚜둑 손을 풀었다.
“그럼 관리자 목 따고 돌아올게! 핸드폰엔 계정 로그인 해뒀으니 재밌게 보고 있어!”
손을 흔들며 관리자의 영역으로 가는 구멍을 쑤욱 여는 하빈.
“자, 잠깐만요! 이게 무슨……?”
레몬은 차마 말릴 새도 없이 하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진짜 간 거야? 정말로?”
저렇게 아무 준비도 각오도 없이?!
* * *
[……그래, 기만의 수호자, 결국 날 보러 왔군. 너는 내가 왜 멸망을 일으키려는지 궁금할 테지!]
이번에도 영화의 최종장, 마지막 보스처럼 무게를 잡는 관리자.
“응? 안 궁금한데?”
[뭐?]
“이거나 먹어라! 얍!”
콰과광!
[……!]
[뭐, 뭐냐! 기만의 수호자, 여기까지 온 이상 내게 이유를 듣고 싶지 않았나?]
“뭐래. 그딴 거 모르겠고, 넌 좀 맞자! 나 레모네이드 먹으러 가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고.”
“자, 잠깐!”
……그렇게 관리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 * *
“……그래서, 관리자만 족치면 끝날 거라 생각했거든?”
“…….”
관리자가 사라진 관리자의 구역. 하빈은 어디서 났는지 허공에 소파를 가져다 놓고 거기 앉아 있었다.
아헤자르와 네아이바, 현시우는 가만히 침묵한 채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하빈이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근데 관리자가 자폭을 할 줄은 몰랐지.”
“그러게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현시우. 그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옆에 떠 있는 화면을 살폈다.
비록 멸망 계획을 완전히 실행시키지는 못했지만, 하빈의 죽음을 직감한 순간, 준비해 둔 모든 던전의 모든 몬스터를 지상에 풀어 버린 관리자.
나름 열심히 막아냈고, 또 관리자가 죽은 즉시 하빈이 달려와 상황을 끝냈지만, 그래도 인류의 타격은 꽤 컸다.
‘고위 헌터들 중에서도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꽤 있지.’
현시우는 조용히 자신이 가져온 명단을 체크했다. 한국 측 명단 최상단에 있는 한 줄.
-강태서(실종)
‘아마 실종이 아닌 사망일 거라 추측되지만.’
다른 랭커들의 랭킹이 변동한 걸로 보아 전사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전투 때 보이지도 않았던 걸 보면 도망치다 죽었거나, 일부러 관리자가 농간을 부린 걸지도.
“……뒤늦게 시스템 서버를 해독해서 피해를 복구하는 방법을 찾아보고는 있는데,”
“시스템도 관리자가 자폭시켰지? 하, 짜증 나네.”
자신이 가지지 못할 거면 없애버리겠다는 건가. 관리자는 끝까지 시스템 구석구석을 파괴해 가며 사라졌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겠지.
하빈은 흐물흐물 허공에 떠다니는 관리자의 죽은 껍데기를 쳐다보았다.
“야야, 관리자야, 다시 일어나서 뭐라도 좀 해봐, 서버 복구 좀.”
“관리자 죽었어.”
“못 돼먹은 데다 허약하기까지 해? 하여튼 끝까지 도움이 안 돼요!”
“……그럼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현시우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첫 번째는 이대로 사는 것, 두 번째는 3회차 리트라이!”
“엥?”
“으음?”
[어?]
[음?]
그들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현하빈, 아니 현하빈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헉? 뭐야?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나는 1회차에서 건너온 하빈이야. 편하게 전하빈이라고 불러.”
[현하빈이 두 명?!]
이공간으로 들어온 전하빈의 등장. 그녀는 어떻게 ‘전하빈’으로 여기 있는지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현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으으, 느낌 이상해. 도플갱어 만나면 죽는다는 속설 있는데.”
전하빈도 인상을 찡그렸다.
“으으, 사실 나도 그래서 이렇게는 안 나타나려고 했는데. 어쨌든, 시간을 또 돌리는 방법이 있다고.”
“아, 현시우가 회귀한 것처럼?”
“그렇지.”
전하빈은 조금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래는 관리자의 시스템을 탈취해서 게이트가 생기기 이전으로 시간을 돌려서 모든 걸 복구하려고 했거든. 근데 일이 좀 꼬였네.”
“그래! 이게 다 현시우가 내 정체를 까발린 탓이야!”
“그게 왜 내 탓인데?!”
서로를 탓하는 남매의 아름다운 가족애.
“현시우, 아직 약속한 등짝 때리기, 한 대 남은 거 알지? 처신 잘하라고.”
“너 진짜…… 아니다. 말을 말자.”
“어쨌든 시간을 한 번 더 돌리는 방법이 있는데.”
“돌릴 수 있어?”
현하빈의 물음에, 전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게이트 사태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그건 1회차 때 이미 만들어 본 거라 또 만들라면 만들 수 있는데, 한 사람용으로만 만들 수 있어.”
“그럼 누구 한 명이 책임지고 가서 열심히 해야 하는 거네? 흐음…….”
현하빈은 현시우를 쳐다보았다.
“흐음……. 이제 누가 책임지고 3회차를 열심히 구르면 될까?”
“왜, 왜 날 봐?”
멈칫하는 현시우.
고개를 돌렸지만, 그쪽에는 전하빈이 똑같이 얄미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흐음, 그러게, 이미 해 본 사람이 더 잘하겠지?”
“맞아, 맞아. 이번 일도 현시우가 섣불리 합의 없이 내 정체를 말하는 바람에 생긴 일인걸.”
“그러게. 좀 늦게 말했으면 ‘별의 조각’도 쓸 수 있었을 테고, ‘세 번째’한테 데이터도 털었을 텐데!”
거침없이 이어지는 두 하빈의 말에, 네아이바가 감탄했다.
[와, 현하빈 혼자 있어도 무서운데 두 명 있으니까 열 배로 무섭다!]
“나 이제 회귀 더는 싫다고!”
다급히 외친 현시우. 그러나 현하빈은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냐, 잘 들어봐, 오빠. 요즘 웹소설 트렌드가 좀 바뀌었어. 이젠 회귀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수백 번 하는 주인공들도 있더라.”
“그게 뭐야!”
“웹소 주인공의 삶을 살아보자!”
“나 안 한다고! 회귀, 멈춰!”
그렇게 수많은 설득과 대치 끝에.
현시우는 결국 3회차 회귀를 하게 되었다.
“오빠! 잘 다녀와! 파이팅!”
“이럴 때만 오빠라고 또 부르지?”
“나 이번에도 올 때 백 억만. 알지?”
“백 억 같은 소리 하네! 이번엔 안 줄 거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귀 아이템을 작동시키는 현시우.
‘다음 회차에는 절대 현하빈 건드리지 말아야지. 아니 그냥 애초에 5년 동안 잠수를 안 타면 되려나?’
[파이팅이다.]
‘에휴.’
……역시 회귀는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