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요즘 현하빈은 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는가 (13)
하빈의 영국 투어는 예상보다도 더 짧게 끝났다.
그 이유는.
“우리 리베, 해X포터 스튜디오 가니까 네가 너무 생각나서 결국 너 보러 왔어!”
해X포터 스튜디오에서 용의 알과 용의 모형을 본 하빈이 그날 저녁에 냅다 체칼라다임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삐!
황금으로 수놓은 방석에서 뒹굴거리던 조그만 용. 리베는 하빈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뛰어왔다.
-삐이, 삐이, 삐!
“그래그래, 어이구, 우리 뤼베. 그동안 내가 공부하느라 바빠서 자주 못 왔지?”
-삐이이…….
하빈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리베. 하빈은 리베를 보러 무려 3일 만에 온 참이었다.
“아무래도 계속 도마뱀으로 지내는 건 무리가 있으니까.”
지구에 데려온 동안은 도마뱀으로 위장해서 키우고, 체칼라다임에 있을 땐 용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도 되는 리베. 그래서 두 곳을 오가며 살고 있는 리베였다.
-삐아아!
마침 리베가 이것 보라는 듯 불꽃을 화아악 뿜어냈다.
“헉 리베! 불 뿜는 것도 이제 잘 돼?”
-삐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리베. 체칼라다임에선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연습을 할 수 있다 보니, 불 뿜기와 비행 능력이 상당히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우리 리베 대단하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잘 해줘?”
-삐삐! 삐!
리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체칼라다임의 사람들은 리베를 정말로 신 모시듯이 잘 대해줬다.
발만 까닥여도 귀엽고 위대하다며 감탄하고, 맛있는 간식을 종류별로 대령함은 물론, 잠자리도 무척 푹신했다.
“그래도 싫거나 집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불러. 내가 바로 데리러 올게! 그리고 혹시라도 너 괴롭히는 녀석들 있으면 일러!”
-삐이이!
리베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건 ‘반쪽 점토’를 응용해서 만든 아이템이라 어느 세계에 있든 상대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구조 신호든, 그냥 음성 메시지든 순식간에 보낼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
“그래도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야.”
비늘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체칼라다임이 리베에게 참 잘해 주는 모양.
리베의 침대에 툭, 걸터앉은 하빈의 옆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특별히, 용 녀석을 위해 선물도 사 왔지.”
곁에 있던 글리치가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해X포터 스튜디오에서 사온, 다양한 맛이 나는 젤리였다. 최소 20가지가 넘는 독특한 맛이 나는 걸로 유명한 젤리인데, 일반적으로 접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맛들이 섞여 있어 인기가 있었다.
그걸 꺼낸 글리치가 흥미롭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코딱지맛 젤리 먹여 보자.”
“아, 애한테 그런 거 좀 먹이지 말라고!”
하빈이 글리치의 등짝을 치며 외쳤다.
‘이 마신은 틈만 나면 리베한테 이상한 거 먹이려고 해!’
사실 글리치는 최근 리베에게 금가루를 먹이다 혼난 전적이 있었다. 글리치는 빈정이 상했는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못 먹을 걸 먹이는 건 아니잖아? 나름 안전한 것만 먹인다고. 독을 안 먹이는 게 어디야?”
그 말을 들은 하빈이 눈을 부릅떴다.
“뭐어어? 독 먹일 생각을 했단 말이야? 미쳤어? 먹이는 순간 선배는 이 세계에서 영영 사라질 줄 알아!”
“바로 해독해 주는 스킬이 있는데…….”
“미련 가지지 마! 시도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알았어, 알았어. 안 한다니까.”
-삐이?
둘의 상황을 지켜보며 흥미롭단 듯 눈을 반짝이는 리베. 그를 향해 하빈은 단호하게 말했다.
“리베 너도 이 꼰대가 주는 거 절대 함부로 먹지 마, 알겠어?”
-삐이이…….
“누가 주는 거 함부로 주워 먹다간 큰일 난다고!”
-삐.
“……그래도 젤리는 먹여도 될 텐데?”
미련을 못 버린 듯 다른 젤리 하나를 꺼내서 리베에게 건네는 글리치. 하빈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못 먹을 걸 먹이는 것도 아니고, 스튜디오에서 산 유명한 기념품이니까.
“그래, 저건 먹어도 되겠지.”
-삐이!
냠냠냠! 하빈의 허락에 의심 없이 신나게 받아먹는 리베.
-삐이……?
맛이 묘한지 리베가 인상을 찡그렸다. 때마침 글리치가 중얼거렸다.
“그건 썩은 달걀맛이다. 어때?”
-삐에, 삐에엑!
“아, 이상한 거 먹이지 말라고!”
퉤퉤!
재빨리 젤리를 뱉어내는 리베. 하빈이 살벌하게 글리치를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어? 진짜로 하빈 님이 여기 있었네요?”
다른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하빈이 고개를 들자 익숙한 노란 머리의 인물이 보였다.
“황레몬!”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레몬이도 여기 있었어?”
“마침 여행하다 들렀어요.”
“그래, 너 요즘 여행 많이 다닌다더라.”
레몬은 누가 봐도 여행객의 차림이었다. 머리에 걸친 선글라스와, 각국에서 구매한 기념품 쇼핑백들, 목에 걸린 야자수 목걸이까지.
그걸 보던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야자수 목걸이? 하와이라도 다녀왔어?”
“이건 하와이에서 산 건 아니고, 마계에서 샀어요.”
“야자수 목걸이를 마계에서 판다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글리치가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관리자를 처리한 이후 마계의 지형과 기후설정을 좀 바꿨던 거 기억 안 나나?”
“그랬긴 하지만…….”
하빈은 관리자 처리 이후, 관리자 모드를 사용해 마계의 맵 설정을 좀 바꾸었다.
척박한 바위땅과 바위산이 지형의 80% 이상을 차지하길래, 농사가 잘 되는 농지, 숲과 바다 등의 다양한 지형들로 재배치하는 대공사를 했었다.
그래서 마계는 예전보다 훨씬 살기가 좋아졌다.
단, 마왕성이 있는 장소 부근은 전통과 위압감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검은 바위와 용암 등의 지형으로 무시무시하게 꾸며져 있다고.
‘그것마저 요즘은 관광용으로 쓰인다지만.’
원래 화산도 폭발만 안 하면 좋은 관광지인 법이다.
마왕성 주변으로 장식처럼 흐르는 화려한 용암과, 마왕성에서 상영하는 네풀릭스와 영화들을 보기 위해 마족들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나?
[그건 영화를 보려고 줄 서는 편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
‘맞아. 다들 재미를 좀 아는 편이라.’
한국 드라마도 인기가 좋아서 매번 상영 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다음에 영화제나 한번 열어야겠어. 아예 마족들끼리 영화를 찍게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
좋은 작품 하나 나오는 거 아닌지 몰라? 이게 마계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건가.
“어쨌든, 이 야자수 목걸이는 마계에서 유명한 관광지, ‘노을의 바다’에서 샀어요.”
“거기도 좋은 곳이지.”
오렌지빛 하늘과, 잔잔한 파도, 새롭게 심은 야자수 그늘이 인기 만점이라고.
“네, 야자수마다 해먹이 걸려 있는데, 그건 하빈 님이 전파한 거라면서요?”
“뭐어? 애들이 해먹을 거기에도 달았어?”
예전 학교 나무에도 해먹을 걸어놓던 하빈. 심심해서 마왕성 주변 나무에도 해먹을 몇 개 걸었는데, 그걸 본 마족들이 신기하다며 따라한 모양이었다.
“그 해먹, 요즘 마계에선 마신님 스타일의 침대라며 엄청 인기 많던데, 모르셨어요?”
“애들이 참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 놀고먹는 분야에 한해서는 천재적이야!”
“……그냥 하빈님이 하는 것마다 트렌드가 되는 걸지도요.”
레몬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굳이 설명하진 않았지만, ‘마계’는 요즘 킬스크린에서 제일가는 핫한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하빈 님 때문이지.’
하빈이 마계를 들를 때마다 해먹이니, 맵닭볶음면이니, 아이스크림이니, 네풀릭스니 하는 지구 문명과 트렌드를 가르쳐 줬기 때문에, 마족들이 그걸 토대로 관광지와 인기 메뉴들을 많이 개발했다.
‘오죽하면 다른 층에서도 마계의 아이스크림 한 번 먹어보겠다고 구경오거나 ‘노을 바다’의 해먹에 누워 보겠다고 난리라던데.’
그뿐만이 아니라, 관광객을 수용할 숙소들의 질도 굉장히 좋아졌다. 그것도 다 현하빈이 ‘호캉스 할 곳들 많이 만들어 놔! 아니 그냥 호텔을 지어!’라며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레몬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사실 이 사람, 관광업의 천재 아니야?’
하도 놀고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놀고먹는 트렌드 하난 천재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는 와중에도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었다.
“흐음, 어쨌든 잘 꾸며 놨다니 나도 조만간 들러야겠다. 해먹을 가르쳐 줬으니 코코넛 음료수도 가르쳐 줘야겠어.”
“이러다 정말 마계가 킬스크린의 중심지, 핫플레이스가 될지도요.”
“고작 코코넛 음료로? 에이, 아직 가르쳐 줄 게 한참 멀었어. 다음엔 마계에 놀이공원을 지어 봐야지!”
현실 놀이공원 타이쿤 같기도 하고, 좀 재밌을지도?
“물론 마계 말고도 놀러 다닐 곳은 많더라. 저번엔 아헤자르가 졸라서 ‘황길때’의 배경이 되는 릴리의 저택을 구경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거기 공작님의 환대가 마음에 들더라고. 특히 거기서 주는 케이크랑 과자가 되게 맛있더라. 레시피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딸을 찾아줘 고맙다며 후한 대접을 해준 단델리온 공작.
사실 킬스크린들의 주민들 대부분은 하빈이 멸망을 막았다는 걸 알게 된 후 모두 호의적으로 하빈을 대해 주었다.
“최고야. 다음에도 또 가야지. 심심할 땐 헤자라토 제국도 들러야겠어.”
“헤자라토 제국은 왜?”
“그야 잘잘이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서……가 아니라.”
하빈이 씨익 꿍꿍이가 있는 웃음을 지었다.
“거기 나타날 때마다 황태자랑 황족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되게 재밌거든!”
나타날 때마다 ‘내가 아헤자르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왔다!’라고 외쳤던 하빈의 전적 때문에, 헤자라토의 황족들은 하빈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최근엔 ‘황좌를 내놓기 싫으면 순순히 헤자라토의 명물 음식들도 소개해 주고 관광도 도와 달라’고 ‘부탁’했지.”
“그, 그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으로 들렸을 것 같은데……?”
레몬이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 정도야 장난이지, 장난! 이제 황태자도 내 화법에 적응한 것 같은데? 잘잘이야말로 잘잘이 나라면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면 아깝잖아?”
[내가 아니라 네가 누리고 있는 것 같다만…….]
“어허, 잘잘이 너도 헤자라토 관광 재밌게 잘 했으면서 웬 딴소리야?”
[릴리네 저택 구경이 더 재밌었다!]
“얘 이거 자기 나라보다 황길때를 더 좋아하네?”
[크흠, 하지만 헤자라토는 내가 관심 안 가지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지 않나?]
아헤자르가 떴다 하면 긴장하는 사람들인걸.
“흐음, 하긴. 원래 윗사람은 자주 안 나타나는 게 아랫사람 정신건강에 좋단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해. 나도 교장쌤 훈화 말씀 시간이 힘들거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몬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빈 님, 어디 다녀오셨기에 손에 든 게 많아요?”
레몬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하빈이 들고 있던 쇼핑백들을 쳐다보았다.
“아하, 이거? 기념품이야, 기념품. 레몬이도 한번 볼래?”
“기념품이요?”
“응응, 영국 여행 다녀왔거든.”
“오, 신기한 거랑 먹는 게 많네요. 이건 젤리……?”
리베가 먹을 뻔한 코딱지맛 젤리를 유심히 보는 레몬.
그걸 놓치지 않은 글리치가 선심 쓴다는 듯 레몬에게 젤리를 건넸다.
“그건 특별히 너 주지.”
“와, 감사합니다!”
“구하기 힘든 거야.”
“이런 걸 챙겨주시다니…….”
‘마신이라서 무서워했는데 사실은 좋은 분일지도 몰라!’
레몬이 새삼스럽게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