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요즘 현하빈은 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는가 (8)
“뭐야? 왜 끊어졌어?”
하빈은 다급하게 끊긴 영상통화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현시우가 종료 버튼 누르는 것 같았는데…….”
알바생한테 방탈출이니 어쩌니 설명하면서 통화 종료 버튼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누르던 현시우.
“내가 언니랑 통화하겠다는데 왜 자기가 나서서 끊는 거야?!”
채지석이 대신 변명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 때문이 아닐까? 일반인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 거 아냐.”
안 그래도 하빈이 앉아 있는 곳은 으리으리한 마왕성의 옥좌. 거기다 주변에 대기 타고 있는 병사들과 시종, 시녀들은 물론이고 벽에 걸린 마법 아이템들까지.
“이건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장소라고.”
“흥, 여기 인테리어가 어때서? 인테리어 취향이 이럴 수도 있는 거지!”
“……네 취향이야?”
“크흠, 사실 꼭 내 취향은 아니지만.”
하빈이 휙휙 마왕성을 둘러보았다. 온통 금과 보석으로 도배된 화려한 장식들과 방문자에게 겁을 주기 위해 마련된 괴물 형상 조각상들.
특히 하빈이 앉은 옥좌는 붉은 보석과 검은 흑요석, 황금으로 조각되어 보기만 해도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마신님의 위엄을 위해 최근 더 무시무시하게 다시 작업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엥, 뭘 그럴 것까지야?”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으음…….”
하빈은 흑요석으로 된 등받이를 슬쩍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돌로 되어 있으니 좀 딱딱해. 난 편한 게 좋다구.”
그 말에 다들 기겁해서 외쳤다.
“쿠션을! 당장 쿠션 제작 장인을 불러라!”
“옥좌가 불편하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당장 옥좌 제작 장인을 문책하겠습니다!”
황급히 소리치는 시종들을 보며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네 오바 좀 하지 말라니까. 장인을 왜 문책해? 걔도 애썼겠지.”
“노고를 알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에휴…….”
하빈은 옥좌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뭔 말만 해도 난리를 쳐대니 솔직하게 말하기 눈치 보이잖아.
‘그냥 다음에 라텍스 쿠션이랑 등받이 가져와야지.’
인체공학적이고 척추 보호도 되는 최고의 아이템들!
현대 문물의 대단함을 보여주면 마족들도 다들 깜짝 놀라겠지?
안 그래도 하빈이 소개한 아이스크림과 핵맵닭볶음면은 최근 마계에서 핫한 유행템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은 인기 디저트로, 맵닭볶음면은…….
‘누가 더 강한지 대결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던데, 농담이겠지?’
맵닭볶음면을 먹고도 안 울면 진정한 강자라고 추켜세우는 문화가 번지고 있다나 뭐라나.
“그렇게 따지면 선배는 마계 서열 재평가받아야 해!”
“또 뭐냐?”
가만히 있던 글리치가 본인을 언급한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맞받아쳤다. 하빈은 모른 척 어깨를 으쓱했다.
“흠흠! 어쨌든, 마왕성 견학 온 고딩이들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기절 중이야?”
“아, 그 불손한 녀석들 말입죠?”
근처에 서 있던 크릭샤가 입을 열었다.
“어찌나 허약한지 절반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저런! 박민수도 그렇고 요즘 고등학생들 체력이 말이 아니라니까. 이래서 한국의 미래를 어떡하면 좋담?”
안타깝단 얼굴로 와삭와삭, 옆에 대령된 과일을 집어먹던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남은 애들이라도 집 소개해 줘야겠다.”
“집 소개?”
채지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집 소개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건데?”
“그거야, 한번 찾아온 김에 제대로 구석구석 원을 풀어줘야 다시 올 마음이 안 생기지 않겠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채지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쟤네가 여길 기억해도 괜찮아? 마계를 보고 돌아가서 증언하면 어떡해?”
이제껏 하빈은 일반인에게 마계를 소개해 준 적 없었다.
“증언? 그게 왜?”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전혀 걱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난 일부러 얘네 데려온 건데?”
“왜?”
“똑똑히 기억하라고!”
“……?”
“수틀리면 마계 관광 시켜준단 점을 기억하란 의미지! 저번에는 실수로 기억을 지우는 바람에 또 찾아왔지만, 이번엔 마계도 봤으니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
하빈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다녀도 뭐 누가 믿기나 하겠어? 사실 나도 방금 생각했는데, 좋은 방안이 있다고.”
“좋은 방안?”
“흠흠, 일단 따라와 보라구.”
하빈은 야구배트 아헤자르를 들어 탁탁 바닥을 쳤다. 그러자 예전에 마계에 찾아왔을 때도 한 번 썼던, 검은색 버전의 아헤자르 모습이 나타났다.
“짜잔, 이건 아헤자르 블랙 에디션! 마계 버전으로 재탄생한 무시무시한 아헤자르지.”
평소 흰색과 푸른색의 조합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검은색과 붉은색 조합의 아헤자르는 마계와 상당히 잘 어울리는 컬러감이었다.
“이제 이걸 들고 고딩들을 만나봐야겠어.”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안녕, 친구들? 내 스윗 홈을 구경한 소감이 어때?”
“…….”
대답 없이 눈치를 살피는 학생들의 모습. 그걸 본 하빈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애들이 기가 많이 죽었잖아?”
[당연히 기가 죽을 만도 하지 않느냐!]
하빈이 한심하다는 듯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집 앞에 찾아오던 패기 어디 갔어? 마포구 서열 1위를 만나려면 그 정도 각오쯤은 해야 되는 거 아냐?”
[마포구 서열 1위를 만나고 싶었지, 마계 서열 1위를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닐 것이다!]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꼰대 선배도 가짜 신분이지만 마포구 서열 1위란 말이야. 이래서 누굴 만날 땐 항상 예의를 차려야 한다니까? 사실 상대의 정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거잖아.”
“흐윽……. 잘못했어요.”
그 순간, 우두머리 녀석이 조심스럽게 사과를 했다.
“뭘 잘못했는데?”
“그, 그러니까. 다짜고짜 댁에 찾아간 거랑…….”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우두머리. 하빈은 흐음,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애초에 너희, 왜 날 찾아온 거야?”
“그게…….”
“대답.”
“최, 최근에, 마포구 짱이 현하빈이라는 소문이 돌아서요.”
“으엑?”
하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현하빈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한 출처를 알아내야 한다.
‘저런 헛소문이 우리 담임선생님 귀에라도 들어가 봐, 큰일 난다고!’
생기부가 위기에 처한단 말이다!
“내 완벽하고 착한 모범생 이미지를 망치다니!”
하빈은 절박한 심정이 되어 빠르게 물었다.
“어디서 누가 그런 소릴 했어? 엉?”
“그, 혹시 지난주에 무릎 꿇린 학생들을 기억하세요?”
“음? 지난주?”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어떤 양아치 놈들이 길거리에서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기에, 혼쭐을 좀 냈지.”
“맞아요! 그때 혼난 양아치들!”
학생들이 냉큼 끼어들어 외쳤다.
“그때 혼난 분들이 원래 서열 1위와 그 친구들이에요! 마포구의 짱을 맡고 계시던 분들!”
“네! 그분들을 꺾은 게 현하빈 님이니까 새로 서열 1위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고요!”
“허? 그놈들, 학생이었어?”
그냥 지나가는 양아치인가 싶어서 좀 혼내 준 거였는데 그게 이렇게 큰일이 되어 돌아오다니! 하빈은 짜증 난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도움 안 되는 놈들! 얼굴이 너무 삭은 데다 담배 냄새도 나서 생각도 못했네!”
“…….”
“아니 애초에 이 시대에 짱이니 어쩌니 하는 게 아직도 있어?”
“저, 저희끼리는 서열 매겨요…….”
학생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와 본인들 입으로 말하기엔 좀 민망했던 모양.
“어이구, 유치하게. 일진이니 서열이니 그거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너희 사회 나가 봐라. 그거 도움 되나!”
당장 마계에 와서도 도움 하나도 안 되잖아?
“……흑.”
하빈의 말에 학생들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맞는 말씀이에요……. 저기, 그런데.”
“또 뭐?”
“정말 죄송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
“저희…… 엄마가 걱정하실 텐데.”
“뭐어어어?”
하빈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뭐어? 엄마? 엄마 걱정을 이제 와 찾냐? 애초에 너희 어머니께 걱정 끼치기 싫었으면! 어? 이런 짓을 하고 다니질 말았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너 진짜! 아휴, 진짜! 어휴!”
한숨을 푹푹 쉬며 아헤자르를 허공에 휘두르던 하빈.
“너어는 진짜 돌아가면 부모님한테도 죄송하다 그러고, 이런 일 하지 마라. 알겠지?”
“아, 안 할게요. 안 해요!”
“그동안 애들 몇 명 괴롭혔어?”
“그게…… 기억이 잘.”
“어휴!”
“죄송합니다!”
“걔네들한테도 열심히 찾아서 사과해. 거기 뒤에 보고 있는 녀석들도, 알겠지?”
“네, 네에.”
“네…….”
“기절한 애들도 나중에 깨어나면 너네가 시켜서 같이 사과시켜, 알았어?”
“네엡…….”
힘없이 이어지는 대답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미약한 희망이 비치고 있었다.
‘우릴 돌려보내 준다는 뜻인가?’
‘가서 사죄하라고 하는 거면 돌려보내 준다는 뜻인가 보다.’
하빈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어허, 너네 눈빛 주고받는 거 다 봤어!”
그녀가 짐짓 험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 지금 이 상황만 벗어나면 끝일 거라 생각하나 본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렇게 된 이상 내 정체를 밝혀야겠네!”
하빈이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한 자세였다.
“잘 들어, 내 정체는 사실!”
[사실?]
“저승사자다!”
“……!”
뜻밖의 말에 학생들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짧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하빈이 곁에 서 있는 채지석을 쿡 찔렀다.
“……그래. 여긴 저승이다.”
별수 없다는 듯 엄숙한 목소리로 장단을 맞추는 채지석.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 저승?”
“저승 인테리어가 왜 이래요?”
마왕성의 특색있는 인테리어를 둘러본 학생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하빈이 외쳤다.
“뭐어? 너 그거 편견이야! 여기 인테리어가 어때서?”
하빈의 곁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마왕성의 사용인들도 발끈했다.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 꾸민 건데!”
“너희, 이 인테리어에 불만 있어?”
“아, 아뇨!”
“죄송합니다!”
바로 납작 엎드려 사과하는 학생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치만 진짜…… 여기가 저승이라고?”
“처음엔 분명 여기가, 마계의 마왕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마신이라 불렸으면서……!”
‘흠, 뭘 또 그런 걸 잘 기억하고 있담?’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게도 불리고 있지! 저승은 원래 여러 별명을 가진 법이니까. 특히 너희는 지옥에 왔으니 더더욱 상황이 이런 거야!”
“히익.”
“뭐어, 너네가 한 짓이 얼만데 천국 올 줄 알았니? 양심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