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만나서 반가워! (1)
‘음, 이 시간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하빈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보고 반색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개미! 반가워!”
“어어? 나? 왜?”
놀라서 고개를 드는 남자. 그건 동창회에서 자랑을 하다 기절했던 김개미였다. 다시 학생이 된 김개미는 책상 위에 제테크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하빈은 감탄한 얼굴을 했다.
“크으, 역시 김개미! 벌써부터 주식 공부를 하는구나. 그래그래. 나중에 기절 안 하게 건강관리도 같이 해.”
“……?”
의아한 표정으로 하빈을 바라보던 김개미는 다시 주식 투자 책으로 칼같이 고개를 내렸다. 잠시라도 방해받기 싫다는 듯 철벽 어린 태도.
‘크으, 역시 김개미. 한결같은 아이야.’
하빈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뭐야? 비켜.”
하빈을 툭 치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등장.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에 하빈은 이번에도 신이 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아닛, 이게 누구야? 민수! 너도 오랜만이야!”
“씨, 오랜만은 무슨.”
민수는 같잖다는 눈빛으로 하빈을 흘겨보았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길막하지 말고 비키기나 해.”
“나 길막 안 했는데?”
하빈이 서 있는 공간은 이미 누구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굳이 어깨를 치고 지나간 건 민수였다. 하빈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민수, 네 덩치를 자랑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화내면 오히려 근손실 와서 덩치가 줄어들어. 그건 좋지 않은 습관이야!”
“뭐라는 거야, 또.”
‘우리가 언제부터 인사나 나누던 사이였다고 이래?’
고작 하루 사이에 더 단단히 돌았나.
민수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왜 또 시비야? 혹시 저번에 말한 학폭위 같은 걸로 협박할 거면 좋은 말로 할 때 관둬. 내가 고작 그런 거에 겁먹을 줄 알아?”
살벌한 중얼거림에 하빈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민수, 역시 아직 갱생을 안 했구나!”
[오, 과거로 왔다는 실감이 나는군!]
하빈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민수와 횡령민수, 기절민수의 험난한 길을 거쳐 왔는데, 회귀하는 바람에 또 갱생이 없던 일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척 슬픈 상황. 하빈은 선심 쓰는 마음으로 솔직한 조언을 했다.
“오우 민수, 그건 좋지 않은 태도야. 갱생을 일찍 하지 않으면 기절을 세 번 넘게 할 수 있어.”
“……?”
하빈의 발언에, 처음엔 당황해서 멍하니 있던 민수. 이내 정신을 차린 민수의 표정이 점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일그러졌다.
“하,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하빈은 잊고 있었지만 사실 민수는 어른이 되어서 좀 더 점잖아졌던 것이었을 뿐, 고1인 지금은 혈기왕성하고 앞뒤 가릴 것 없었다.
물론 참을성도 없었다. 안 그래도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현하빈에 대해 쌓인 게 많았던 박민수.
“이게 진짜,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더 봐줄 것 없다는 듯 그가 손을 올리려던 때.
“민수야, 잠시만!”
짧은 외침으로 주목을 끈 하빈이 옆에 있던 의자를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보여 줄 게 있어!”
“……?”
하빈은 이것 보라는 듯 의자의 쇠 부분을 덥석 집었다.
[뭐, 뭘 하려고?]
‘응? 그냥 간단하게 차력 쇼만 보여주려구.’
불필요한 무력 충돌은 사양이니 말이다.
‘내가 힘 조절 잘못하면 민수의 생존을 장담할 수가 없어서 그래.’
코앞에서 의자를 구부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펴는 걸 보여주면, 박민수도 하빈과 싸우려던 걸 포기하지 않을까?
‘그리고 의자를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학교 기물 파손도 아니니 일석이조지!’
좋아. 완벽한 계획이야.
홀로 뿌듯하게 계산을 끝낸 하빈이 손에 힘을 주었다.
‘얍!’
쾅!
파사삭…….
하지만, 하빈이 손을 움직이자마자 가루로 분해되어 흩날리는 의자. 비현실적인 광경에 민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흐, 흐익, 뭐야? 뭐냐고!”
확실히, 이런 평화로운 세계관에서 손대는 것만으로 의자를 증발시킨 건 좀 이상하다. 하빈은 일단 아무 변명이든 내뱉었다.
“아, 앗? 의자가 어디 갔지?”
“으, 이게, 무슨!”
기겁하는 민수의 반응을 무시한 채, 하빈은 의자의 쇳가루를 탈탈 쓰레기통에 털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어쨌든 민수야, 잘하자!”
미묘하게 틀어진 계획에 하빈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음, 뭔가 허전한데. 대신 이거라도 구부려 볼까.’
그녀의 눈에 민수 바로 옆에 있는 의자가 들어왔다. 실패가 아쉬웠던 하빈이 그 의자를 턱 집었다. 나름의 2차 시도를 해보려던 것.
그러나.
콰광! 파사삭!
‘앗.’
이번에도 의자는 빛을 내며 가루로 산화했다.
“……히익.”
털썩.
그 바로 곁에 서 있던 박민수는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어, 민수?”
하빈이 그제야 민수의 상태를 살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기절이었다. 코앞에서 의자 두 개가 빛으로 산화하는 게 충격이 컸던 모양.
그걸 발견한 하빈이 큰일이란 표정을 지었다.
“헉?! 박민수 또 기절했어? 정말, 얘는 이렇게 허약해서 어쩌면 좋담!”
그 일을 일으킨 장본인, 현하빈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핏기 가신 민수의 뺨을 찹찹 두드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직 이른 아침이라 목격자는 둘뿐이었다. 그마저도 김개미는 제테크 책을 집중해서 보느라 싸우든 말든 이쪽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나머지 하나는.
“……현하빈?”
“…….”
하빈은 교실 문 너머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인영을 마주쳤다. 막 뒷문을 연 채 굳어있는 익숙한 얼굴.
‘이런!’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하지만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이름이 먼저 나왔다.
“……태, 태서야.”
흠칫.
하빈의 부름에 눈에 띄게 움찔하는 강태서. 잔뜩 경직된 어깨는 물론, 문을 짚고 있는 손도 새하얗게 핏기가 없는 걸 보니…….
‘앗? 설마 겁먹은 거 아니겠지?’
[겁을 안 먹게 생겼냐?!]
의자 두 개를 증발시키며 같은 반 학우를 기절시키는 희대의 퍼포먼스라면 누구든 겁먹을 만하지!
‘에, 에이 설마 그걸 다 봤겠어?’
하빈은 뻘쭘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걸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민수 녀석이야 어떤 헛소리를 하든 애들이 믿어주지 않겠지만, 태서가 겁을 먹은 건 곤란한데. 기억이라도 지워야 하나?
하빈이 끄응 곤란한 얼굴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저기,”
강태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이거 네가 빌려달라던 다음 권…….”
강태서는 주섬주섬 하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하빈은 그 와중에도 태서의 태도를 살피고 있었다.
‘태서가 나랑 눈을 안 마주쳐!’
[진짜 겁먹은 모양이다!]
하빈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태서의 행동을 기다렸다. 마침 태서가 건넨 건 책이었다. 제목을 확인한 하빈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나 원래 얘한테 소설 빌렸었지?’
[뭣이? 회귀 전이나 후나 계속 태서한테 셔틀 시키는 건 여전하구나! 회귀 전엔 빵셔틀을 시키더니, 여기서는 소설 셔틀이냐?]
‘엥? 무슨 소리야! 내가 셔틀을 시키다니! 나 그런 불미스러운 일 한 적 없어!’
태서의 빵셔틀론은 전부 루머였단 말이다!
‘이것도 그냥 같이 책 돌려 읽는 것뿐이라고! 태서가 재미있는 책 추천해 주는 것뿐이라니까?’
그때였다. 태서가 내민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혹시 내가 잘못 가져왔어?”
아마도 하빈과 아헤자르가 너무 오래 떠들고 있어서 거절로 여겨졌던 모양. 하빈은 재빨리 반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허둥대던 하빈이 마침내 정색한 표정으로 본론을 말했다.
“……학교 마치고 옥상으로 따라와.”
“……!”
흠칫.
강태서는 또 한 번 움찔했다. 아헤자르가 지적했다.
[누, 누가 들어도 결투하자는 소리 같잖으냐!]
“아아니! 옥상 말고. 그, 뭐 어디더라? 우리 자주 만나던 데가 어디였지?”
“……도서관?”
“그, 그래! 도서관! 거기서 봐! 할 말 있으니까!”
말을 마친 하빈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기절한 박민수를 번쩍 들쳐 메고 후다닥 보건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 * *
“……와, 중2병 걸린 말투 쓰던 태서가 아니었어. 신선한걸. 얼굴에 그늘이 지지도 않았네.”
수업을 마친 뒤, 약속 장소인 도서관 앞.
하빈은 벽에 기대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의 생 내내 잊고 있었던 그 말간 얼굴이 조금 어색했다.
사실 수업 내내 하빈은 힐끔거리며 태서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 날이 서 있던 과거와는 달리, 얌전히 수업 듣고, 지루한 수업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는 강태서의 일상적인 모습이란.
한때 TV에 나오는 것도 엄청 어색했는데 하도 오래 거기 익숙해져서 그런가, 평범 버전 강태서가 조금은 신기했다.
‘흐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별로 오래 살진 않았다만?]
‘어쨌든 말이 그렇단 거라고!’
하빈이 아헤자르와 툭탁대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어? 어어, 아니!”
강태서의 등장에 하빈은 허둥거리며 야구배트 버전 아헤자르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배트……?”
강태서가 흠칫 야구배트를 흘끔거렸다. 하빈이 재빨리 변명했다.
“이, 이건 절대! 폭력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요즘 야구에 관심이 생겨서!”
“…….”
태서는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는 걸까?’
[나라면 못 믿을 것 같다만?]
‘아이 잘잘, 내가 이래 봬도 게이트 사태 전엔 어? 완전 모범생 이미지였다고!’
[모, 모범생?]
‘그래!’
[……애초에 그게 진짜라 해도 이미 본모습을 들키지 않았느냐?]
‘…….’
하빈은 끄응, 곤란한 한숨을 삼키며 팔짱을 끼었다. 생각해 보니 당황해서 박민수를 번쩍 들어 안고 복도를 달리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아앗, 그럼 적어도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 들켰겠지? 이걸 어떻게 둘러대지?’
요즘 취미로 헬스장을 등록해 봤다고 해볼까? 아님, 민수가 근손실 와서 너무 가벼워진 탓이라고 해?
하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침묵하던 강태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음, 나 때문에 너까지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해.”
“엥?”
예상치 못한 소리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서를 돌아보았다. 강태서는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박민수 말이야.”
“…….”
“나 때문에 괜히 나서느라, 너까지 박민수한테…… 시비를 당하고.”
강태서는 말을 더 잇지 않고 꾹 입을 다물었다. 하빈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지금 그러니까, 하빈이 평소 강태서의 편을 드는 바람에, 그녀까지 박민수의 타겟이 된 게 미안했던 모양.
그러나 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엥, 근데 나 박민수한테 아무 일도 안 당했는데?”
“……?”
“너도 봤잖아, 오늘 기절한 건 민수인걸?”
무슨 일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빈이 민수를 기절시킨 상황! 하빈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너 때문이 아냐. 갱생을 안 한 민수가 잘못한 거라니까? 허약해서 혼자 쓰러진 거고, 그런 거라구!”
“…….”
“아무도 안 다쳤고, 앞으로도 안 다칠 거고. 걱정할 일은 없단 거지. 아, 혹시 또 박민수가 헛소리하면 나 불러 줘! 내가 그 녀석의 미래를 위해 특별히 갱생에 도움을 줄 수 있어.”
허세와 횡령민수로 진화하기 전에 도움을 주는 반 친구, 그게 바로 참된 친구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하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서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힘 말인데,”
“그, 그건!”
올 게 왔구나!
하빈은 생각해 놓은 변명 열댓 가지를 머릿속으로 재빨리 굴렸다. 하지만 태서의 말이 더 빨랐다.
“숨기고 싶었던 거지?”
“…….”
“꼭 비밀로 할게.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태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단 건, 그만큼 숨기고 싶었단 뜻인데, 나 때문에 처음 드러낸 거잖아.”
“아니, 음. 그게 그렇게 되나?”
“…….”
하빈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태서는 하빈의 힘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먼저 비밀로 해줄 줄이야.
‘역시 강태서, 얘가 알고 보면 참 속이 깊고 착하다니까!’
멋대로 결론을 내린 하빈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후우, 매번 너한테 도움이나 받고.”
어느새 벽에 기댄 강태서는 혼잣말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한심해서 할 말이 없다.”
자조적인 말투였다.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녀석의 옆얼굴이 꽤나 쓸쓸해 보여서, 하빈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한심하긴 무슨!”
그녀가 정신 차리라는 듯 태서의 등을 찰싹 쳤다.
“너는 말이지, 어? 만약 게이트 열리면 나라를 대표하는 각성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할 만한 녀석이야!”
“……?”
“심지어 시스템 관리자에게 소멸의 위협을 당하더라도, 어? 거기 동조하는 척 뒤에서 칼을 갈고 있다가 관리자한테 복수도 하고, 세계적인 범죄 조직을 끝장낼 녀석이라고! 게다가 자신의 과오를 자진해서 낱낱이 밝히며 마지막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녀석이지……!”
“……저기,”
“들어 봐, 아직 안 끝났어! 게다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목숨 걸고 세계도 구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 어디서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 주인공 서사 아니냐.
멍하니 듣고 있던 태서는 하빈의 속사포 같은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까지 시무룩했던 얼굴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웃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회귀 전에는 강태서가 웃는 걸 볼 수 없었는데.
하빈은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그래,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을 하지 않더라도 난 지금의 네가 좋아.”
대한민국 랭킹 1위가 아니어도,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그냥 그러지 않아도…….”
평화롭게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무심코 터진 웃음이 존재하는 지금이 좋다.
“그리고, 아무 추궁 없이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하는 넌, 이미 정말 멋진 녀석이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