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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44) (244/268)

244.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12) (完)

“그럼 이제 준비 다 됐지?”

“오키! 문제없어.”

“전화번호 제대로 외웠으니 돌아가고 나면 꼭 연락할게!”

“좋아!”

드디어 시간을 되감는 D-Day가 되었다. 모두들 약속한 대로 하빈의 이공간에 모였다.

“……D-Day가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랐는데.”

현시우가 몰래 중얼거렸다. 사실 그동안 하빈은 고딩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실행을 미뤘다.

‘나 돌아가면 바로 수험생 되는데 이대로 바로 돌아갈 수는 없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구! 내겐 시간이 필요해!’

아직 봐야 하는 웹소랑 드라마, 웹툰을 다 보고 가야 한다며 일정을 몇 번이나 더 미뤘다. 그나마 남은 건 킬스크린에 자료로 남겨놓기로 한 뒤에야 하빈은 마침내 돌아갈 결심을 끝냈다.

“재미있게 보신 작품들의 단행본이랑 파일들은 저희 마왕성에서 보관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 보러오세요!”

이프시네가 맡겨 두라는 듯 신이 나서 소리쳤다. 킬스크린은 시간을 되감지 않는 다른 차원이니 이 시대의 자료들을 여기 보관해 두면 사라지지 않는다.

“좋아! 이래서 마계가 호캉스 하기 제일 좋은 곳이라니까?”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든가 미련이 남는 것들은 하빈의 인벤토리나 킬스크린에 여전히 저장되어 있으니, 시간을 되돌려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빈은 경쾌한 손놀림으로 타닥타닥 시스템을 조작했다. 이제 ‘실행’ 버튼만 누르면 된다.

하빈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채남매와 현시우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뜻을 표했다.

이프시네는 의욕에 찬 얼굴이었고, 크릭샤는 웬일로 뚱한 표정이 아니었다. 글리치 역시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황레몬은 꿀꺽 침을 삼켰다.

하빈 곁의 까망이가 심통 난 얼굴로 머리를 부볐다.

-게옹!(빨리 해라, 인간! 기다리다 지쳤다!)

그 말에 하빈이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럼 가볼까?”

마침내 하빈이 ‘실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주위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 * *

삑삑삑! 삑삑삑! 삑삑! 삑삑삑삑!

“으으…….”

하빈은 인상을 찡그리며 더듬더듬 시계를 찾아 알람을 껐다.

“5분만 더…….”

아니지. 잠깐만,

‘이거 5년 전에 쓰던 알람 소리잖아!’

습관적으로 다시 뒹굴 누워 자려던 그녀가 눈을 반짝 떴다.

“……!”

아주 익숙하고도 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하빈의 방 천장.

“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른 천장이라는 건 이런 기분인가.”

하빈이 태평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아헤자르가 지적했다.

[원래도 이 방에 잤던 거 아니냐? 이사를 한 적은 없던 것 같은데.]

‘흠, 그래도 요즘은 5성 호텔 스위트룸에서 잤었거든!’

현하빈은 시간을 돌리기 전날까지, 수험생이 되기 전 마지막 자유라며 신나게 놀았다. 음식을 종류별로 주문하고, 네풀릭스를 24시간 내내 틀어놓고, 수영도 하고…….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침대 아래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게오웅…….(여긴 어디냐…….)

“앗, 까망아!”

하빈이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까망이를 안아 올렸다.

“여긴 내 집이야.”

-게옹?(네 집?)

까망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

“음, 너도 킬스크린에 두고 올 걸 그랬나. 갑자기 고양이를 데려온 걸 부모님께 뭐라고……?”

아!

무심코 말하던 하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여기 부모님이 계실까?’

-게오옹, 게옹!(원래 날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네 부모님께도 예쁨받을 자신이 있다!)

잠이 다 깬 듯, 우쭐하게 턱을 치켜드는 까망이. 그러나 하빈은 다급히 핸드폰을 확인하느라 까망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마침 화면을 본 하빈의 눈이 커졌다.

“……!”

[저, 정말 5년 전으로 돌아왔군!]

핸드폰 날짜를 확인한 아헤자르가 신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럼…….”

하빈은 핸드폰에 깔린 어플들과 옷장에 걸린 은설고 교복을 확인하고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마침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끼이익.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으로 부엌에 선 인영이 보였다. 하빈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앞치마를 두르고 뒤집개를 손에 쥔 그 인영의 정체는…….

“현시우?”

“오, 일찍 일어났네?”

아침부터 일어나 달걀 프라이를 굽고 있는 현시우였다. 하빈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 해?”

“……아직 엄마 아빠 안 일어나셨더라고.”

하빈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여섯 시였다. 급한 마음에 시계를 안 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던 모양. 

하빈은 확인차 물었다.

“……현시우 맞는 거지? 가면 쓰는 게 취미인.”

같이 돌아온 거 맞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현시우는 달걀을 뒤집으며 대답했다.

“그래그래, 내가 그 가면마법사다. 근데 그거 취미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썼던 거라니까!”

역시 같이 회귀한 현시우가 맞았다. 하빈은 부엌으로 성큼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근데 돌아오자마자 아침 차리고 있는 거야? 그럼 내가 뭐가 돼?”

혼자 효자 행세하겠다, 그거지?

하빈의 말에 현시우는 멋쩍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뭐라도 하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줘 봐, 나도 하게.”

“할 수 있어?”

“이래 봬도 자취 경력 5년 차거든? 그러는 너야말로 피데스로 지내면서 남이 차려주는 고급 음식만 먹은 거 아냐?”

“그런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던전에서 쪽잠 자면서 비상식량 꺼내 먹기 바빴다고.”

“흠, 그렇군.”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리 도구를 넘겨받았다. 물론 그녀를 졸졸 따라온 까망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까망아, 내가 나중에 부모님께도 소개해 줄게! 그때까지 내 방에 숨어 있어.”

-게오우웅…….

“여기 츄르 줄게, 응?”

-겡겡! 게에에옹!(그래, 잘 할 수 있다! 딱히 츄르 때문은 아니고…….)

신나서 츄르를 받아 가는 까망이. 하빈은 식은 국을 데우며 중얼거렸다.

“에효, 왜 요리하는 마법은 없는 거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네아이바도 그런 마법은 없대.”

“꼰대 선배도 그러던데……. 에휴.”

“틈날 때 그런 마법도 개발해 보라고 설득할까 싶어.”

“맞아. 이젠 메테오 같은 것보다 청소 마법이 더 유용하다니까? 던전도 몬스터도 없잖아? 진짜 쓸 데가 없어!”

“그러게 말이야.”

“흠……. 선배를 협박하면 청소 마법쯤은 개발할 수 있으려나…….”

현남매는 어떻게 글리치와 네아이바를 구슬려 마법을 뜯어내면 좋을지 논의하며 착착 식탁을 차렸다. 둘 다 스탯이 높아서인지 빠른 동작에도 불구하고 실수 없이 깔끔하게 합이 맞았다.

“크으, 완벽해!”

간만의 멋진 상차림에 하빈이 자찬하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밥을 뜰 수 있도록, 수저까지 반듯하게 올려놓은 순간.

끼이익.

안방의 문이 열렸다.

“……!”

하빈과 시우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흠칫했다.

“아침부터 왜 시끄러운…… 어, 얘들아?”

“너희가 차렸어?”

당황과 놀람, 기특함이 묻은 말투. 익숙한 두 목소리에 현남매는 그대로 우뚝 굳어버리고 말았다.

엄마, 아빠.

지금껏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가족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먼저 정신을 차린 하빈이 입을 열려 했으나.

“와, 정말 웬일이래? 오늘 어버이날이었던가?”

“어버이날 아닌데?”

“혹시 당신 생일이야?”

“생일도 아닌데?”

“시우 너 오늘 공강이라 하지 않았어? 늦게 깨우라더니 일찍 일어났네?”

“하빈이도 어제 공부하다 늦게 잔 거 아냐? 어떻게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났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하빈은 입을 다물었다. 옆을 눈짓하니 현시우 역시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하빈은 꾹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뇨, 그냥…… 음.”

부산스레 식탁을 차리느라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아침의 햇살이 길고 따사로운 빛을 그렸다.

식탁보 위로 올라오는 아침밥의 고소한 향기와 창문 너머로 들리는 익숙한 도심의 소리.

5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그렇게 오래 걸려 돌아왔는데도 모든 게 이렇게 반갑고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

하빈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몇 번이고 이 순간이 오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하빈은 그리웠던 품을 향해 다가가 그냥 덥석 안겼다.

“어머,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런대.”

“……좋은 아침이에요.”

그게 표현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뭐야, 잘잘이 진짜 학교 따라오게?’

[당연하다! 나도 데려가 다오! 평범한 학교의 모습도 알고 싶다!]

‘엥, 아마 재미없어서 곧 그만둘걸? 인문계 고딩의 삶은 공부, 공부, 또 공부뿐이라구!’

그래도 하빈은 특별히 아헤자르를 야구 배트 버전으로 만들어서 챙겨가기로 했다.

‘누가 물어보면 취미로 야구 시작했다고 해야지!’

[……그런데 괜찮느냐?]

‘뭐가?’

[아침에 다들 연기력이 대단하던데.]

“…….”

부모님을 마주친 하빈과 시우는 굳어 있던 것도 잠시, 꽤 잘 상황을 넘겼다.

다행히 울지도 않았다. 그들 남매는 랭킹이니 힘이니, 그런 비밀들을 숨기는 데 도가 텄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둘러대기만큼은 만렙이 되어 버린 현남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빠른 적응력과 순발력이었어.’

식사를 마친 현시우는 오늘 공강이라는 걸 알고는 기억나지 않는 대학 시간표를 다시 찾아봐야 한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겸사겸사 전공 공부도 다시 해야 한다나…….’

회상을 끝낸 하빈은 폰을 꺼냈다. 마침 채남매에게서도 연락이 도착한 참이었다. 오늘 학교 마치고 보자는 내용.

첫날부터 등교를 같이 하지는 못했다. 현남매는 현남매대로 부모님을 만나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고, 아마 채남매 쪽도…… 마찬가지였겠지.

“으으, 빨리 수업 끝나고 같이 놀러 가고 싶다.”

하빈은 중얼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경쾌하게 복도를 걷던 그녀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지각을 안 했네!”

[그러게? 네가 웬일이냐?]

땡땡이와 지각에 도가 튼 하빈의 모습을 보아 온 아헤자르. 하빈 역시 안타깝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오면 일단 지각을 해야 해.”

[왜지?]

“지각한 다음, 선생님한테 혼나면서 ‘돌아왔어! 모든 게 그대로야. 선생님 더 혼내주세요!’ 이런 류 대사를 쳐야 한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본 대사냐?]

“흠흠!”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한 하빈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큰일이야. 나 진짜 공부 하나도 기억 안 나거든. 암기 과목은 다시 외운다지만 수학이랑 영어 어떡하지.’

특히 영어는 통역 마법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영어라도 통역 마법 계속 쓸까……. 그것도 능력 아닌가?”

세계를 구하고 왔더니, 다시 고1이 된 사람의 심정이란.

오늘 아침엔 회귀에 성공한 걸 확인하고 정말 즐거웠는데, 벌써 이 기분에 익숙해진 건지 공부가 싫었다.

‘그동안 땡땡이에 너무 익숙해졌더니 벌써부터 자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하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게이트의 시대 때는 은퇴를 꿈꿨는데, 다시 돌아와서도 또 자퇴가 하고 싶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런 거겠지. 매번 어렵고 힘겨운 일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귀찮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정말 하지는 않았잖아?’

투정을 부리긴 해도, 결국은 이겨내 왔다. 그걸 넘어서 여기 이 자리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은퇴를 꿈꾸더라도 착실하게, 자퇴를 꿈꾸더라도 성실하게. 한 발 한 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내딛는, 소중한 일상을 즐길 것이다.

‘그래, 오늘도.’

눈 딱 감고, 수업 잘 듣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도 인사하고, 수업 끝난 뒤엔 소중한 사람들과 파티도 해야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후.”

하빈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교실을 향해 발을 디뎠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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