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6)
“……너 뭐야.”
마이너 패치의 최중심부. 사도들의 회의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쉬던 에라타는 눈을 굴렸다. 이미 숨이 끊어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도가 저쪽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에라타 그녀 본인마저도 겨우 몸을 가누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맞은편에 선 배신자는 도리어 너무 멀쩡해 보였다.
“하하…….”
잘 골라지지 않는 숨을 허탈한 웃음으로 넘긴 에라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강태서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셋이서 한꺼번에 달려들었는데도 대체 어떻게?
아무리 강태서가 그들 중 가장 강하다 해도 다른 사도들 역시 랭커였다. 특히 에라타는 SSS급에, 강태서의 바로 다음 순위인 세계 랭킹 3위.
같은 SSS급인데 이 정도의 격차라고?
겨우 한 등수 차이인데 이럴 수가 있다고?
“……그동안 봐줬던 거야?”
“…….”
“씨, 그냥 대답하지 마. 이미 충분히 기분 X 같으니까.”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에라타가 살벌한 눈으로 강태서를 노려보았다.
“우리 몰래 치트 더 썼나? 아니면 다른 사도 치트라도 훔쳐 써 가며 야금야금 실력 올렸어? 그것도 아니면 관리자님이 널 예뻐하는 만큼 특혜를 더 주던? 아님, 시간 날 때마다 수련만 빡세게 했니?”
“어, 그거 전부.”
“……하.”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강태서는 친절하게도 그녀의 말에 답을 주었다. 마지막 남은 동료 아닌 동료에 대한 예우인지, 아니면.
……어차피 이제 곧 그녀가 목숨이 다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경고. 체력이 심각하게 위험한 수치로 떨어졌습니다!]
[경고. 과량의 출혈로 체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당장 치료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플레이어의 사망 위험이 있으며…….]
에라타는 자신의 눈앞에 뜬 창들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녀를 치료할 힐러도, 포션도 더 없었다. 그렇다고 강태서가 그녀를 치료해 줄 리도 없다. 관리자는 불러 봤자 현하빈을 상대하느라 오지도 못할 것이다.
에라타는 털썩 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동안 관리자님 눈치 보느라 우리 못 죽여서 답답했겠어? 매번 내가 깐족대는 거 보는 게…… 얼마나 같잖았니?”
에라타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처럼 얄밉고도 매력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어딘가 위태롭고도 아슬아슬한 표정.
“……항상 네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같은 뜻일 줄 알았는데.”
미소 띤 얼굴에 비해, 꾹꾹 눌러 메마른 말투였다. 피가래가 섞여 갈라진 목소리로 에라타는 말을 이었다.
“너도,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은 있었을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애초에 어떻게 선발되었던 건데?”
언제나 얄밉기만 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숨길 수 없는 배신감이 묻어나왔다. 원망 섞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것까지 속이고 들어올 수는 없었을 거잖아! 그 부분만큼은, 너도 이해했을 거잖아!”
그녀의 사연을 강태서도 충분히 알 것이다.
사도들끼리 술을 먹을 때 어쩌다 조금씩 풀려 나오는 과거들. 같이 작업하다 우연히 알게 되는 숨기고 싶었던 비밀. 다시 꺼내 보기도 싫은 끔찍한 과거의 파편들까지.
어쩌다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가에 대한 각자의 일그러진 이유들을 서로 들었으니까.
분명 그때마다 강태서 또한 그들의 과거를 이해하는 뉘앙스를 보였다. 에라타는 그것까지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를 처음 알았을 때, 그의 눈에 찰나 연민처럼 스쳤던 감정도, 전부 가짜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건 다르지.”
강태서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나 불행을 겪을 수 있고, 한 번쯤 멸망 따위, 꿈꿀 수도 있겠지만.”
“…….”
“누구나 그걸 실행에 옮기진 않아.”
“……아.”
그렇지.
그 대답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에라타의 미소가 엉망으로 깨졌다. 천천히 입꼬리가 아래로 일그러지듯 무너진다. 에라타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흐려지는 시야를 더 참기 힘들었다.
“……강태서.”
그녀는 가물가물 꺼져 가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입을 열었다. 조용한 한마디가 한숨처럼 내려앉았다.
“난 역시…… 처음부터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
“……정말로.”
툭.
물기 어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에라타의 고개가 마침내 꺾였다. 한때 장미를 떠올리게 하던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이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게이트 사태 이후 최악의 범죄 조직, 마이너 패치의 최후였다.
* * *
마침내 고요해진 마이너 패치의 비밀 회의실.
익숙하지 않은 적막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평소 같으면 그를 향해 시끄럽게 끼어드는 고양이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억지로 떼어 두고 왔으니 다시 볼 수는 없을 거다.
“…….”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강태서는 미뤄 두었던 본인의 상태창을 마저 켰다.
[관리자 모드에 접속했습니다.]
[경고! 접속 권한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관리자 모드는, 원래라면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것이긴 했다.
그러나 이 방은 관리자가 특별히 편의를 봐준 공간이었다. 덕분에 여기서 작업하면 더 접속이 수월했고, 다른 여러 기능들도 쓸 수 있었다. 갑자기 당겨진 폐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사도들을 극한까지 굴리느라 주어진 특전이었다.
강태서는 멈춰 두었던 하빈의 방송을 다시 쳐다보았다. 관리자 방에 들어간 하빈은 관리자를 공격하는 동시에 틈틈이 허공에 떠다니는 코드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태서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관리자의 권한을 본인에게 가져오려 하고 있어.’
한때 강태서가 연구했던 분야이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잘 알고 있었다.
5년 내내 관리자에게 한 번의 반격이라도 해보기 위해 칼을 갈았던 지난날들. 그 정도만큼은.
강태서는 망설임 없이 창을 열었다. 정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더는 놓칠 수 없었다. 강태서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타닥타닥.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5년 내내 쉬지 않고 코드를 수정했던 손이 기다렸다는 듯 자판 위를 날았다. 목적은 명확했다.
시스템 권한 양도 대상을 현하빈으로.
“…….”
그녀에게 시스템을 모두 떠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지만.
처음부터 그가 모두 떠안고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그가 끝맺지 못한 걸 현하빈이 대신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이 미안했지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다. 강태서는 상념을 털어내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알림창이 쉬지 않고 줄줄 올라왔다.
[변경 완료!]
[변경 완료!]
[존재성이 소모됩니다…….]
[존재성이 소모됩니다…….]
존재성이라는 스탯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저 다 쓰면 죽는다는 것만 알 뿐.
하지만 적어도 그 뉘앙스는 마음에 들었다. 그의 존재가 그나마 아직 쓸모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 사실이 꽤 웃겨서.
양심 없게도 조금의 위안을 주었다.
“…….”
강태서는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자격 없는 그의 한 줌의 숨이, 더 의미 없는 그의 존재성이.
적어도, 그저 이 일이 끝날 때까지만 무사히 버티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기회야! 오른쪽 관리자의 바로 어깨 위 코드! 거기 동그라미 옆에 점 하나 추가!
“오키!”
파지직!
그 시각, 관리자의 방.
어느 순간부터 하빈에게 유리한 쪽으로 알아서 변경되는 코드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채지세, 현하빈, 그리고 원격으로 비밀리에 합류한 강태서의 합은 꽤 잘 맞았다.
-하지만 누가 도움을 주고 있는 거지? 혹시 마신인가?
단지 지세와 하빈은 강태서의 참여를 알 길이 없으니 의아해할 뿐.
“글쎄……. 꼰대한테 들은 말은 없는데.”
-하지만 그 정도 급이 아니면 분명 존재성 소모량이 엄청날 텐데…….
최소 성좌 이상의 존재가 아니면 접근 권한 자체가 막혀 있기 때문에 저항이 클 것이다. 아니, 성좌라 해도 이 정도 양을 처리하는 건 무리다. 하빈처럼 오류로서 접근하지 않는 이상.
[멈춰! 이것들은 대체 뭘……!]
그 와중, 관리자는 처음으로 충격을 받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하빈을 상대하는 것도 뒷전으로 하고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생각에 빠진 모양새였다.
[몬스터 생성은 왜 중단된 거지? 이것들은 왜 일을 안 하고……!]
관리자가 찾는 것은 사도들이었다. 그동안 그를 보조해 주던 사도들의 개입이 뚝 끊겨 있는 상황이었다.
각 국가들을 침공하던 게이트의 설정도 원래라면 향후 1년간은 끊임없이 몬스터를 생성해 내야 하는데, 지원이 끊겨서 이대로면 3시간 정도밖에 못 버틸 지경이었다.
관리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접속자 정보를 파악하려 애썼다. 연결이 끊어져 버린 다른 사도들에 비해 유일하게 접속자 명단에 뜨는 존재는.
[……강태서, 네가 결국……!]
부글거리는 목소리로 짓씹듯 뱉는 말. 익숙한 이름에 현하빈은 흠칫했다.
“……강태서?”
-강태서라고?
“뭐야? 이거 설마 강태서가 하고 있다는 뜻이야?”
[…….]
“대답해, 관리자 X끼야!”
하지만 관리자는 하빈이 아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관리자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메시지 같은 것을 띄우는 모양.
[어리석기는! 한낱 미물 주제에 감히 허락되지 않은 영역을 멋대로 건드리다니! 멈추지 않으면 죽을 거다!]
분노와 충격으로 떨리는 목소리.
이건 하빈이 아닌 강태서를 향한 경고였다. 당장이라도 강태서를 찾아가려는 듯 빠져나가려던 관리자의 동작은 하빈에게 틀어막혔다.
[놔!]
“놓을 것 같아?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이거 강태서가 하고 있는 거냐고!”
[……그래.]
발버둥 치던 관리자는 현하빈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자, 체념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그 녀석은 곧 죽는다. 놈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나를 놔주어야 할 거다.]
-그런……!
아헤자르도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거,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동안 관리자가 하는 말을 다 무시했는데 이 말만 진실일 수도 있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인간이 여기 접속하면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들도 이미 확인한 사실. 여기 접속한 게 강태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아군이 인간이라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현하빈은 입을 열었다.
“강태서, 혹시 이거 보고 있어? 그럼 멈춰!”
혹시라도 방송을 보고 있으면 들릴까.
관리자가 어떤 협박을 해도 굳건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톤이 높아져 있었다. 하빈은 재차 말했다.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으니 멈추라니까? 야!”
-나도 지금 찾는 중인데, 강태서의 위치도 파악이 안 되고 있어! 대체 여기 어떻게 접속한 거지?
그들이 만류하는 와중에도 코드는 더 빠르게 깜빡였다. 점점 더 빨라지는 변경 속도는 필사적이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채지세가 한탄했다.
-세상에…….
이 정도면 분명 타격이 엄청날 텐데.
기다렸다는 듯 코드들을 바꿔내는 속도에 감탄할 수조차 없었다. 이건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유성과도 같은 화려함이니까.
-……현하빈.
상황을 파악한 채지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 역시도,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진정하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겨우 말을 이어가는 듯 흔들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이대로면 곧 관리자와 시스템의 연결이 잠시나마 끊어질 것 같거든?
“…….”
-정말 잠깐일 거야. 관리자는 필사적으로 다시 시스템에 들러붙으려고 할 테니까. 그 찰나를 노려서 깔끔하게 공격하지 않으면…….
지금 이루어지는 누군가의 희생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그 사실을 그들 모두 알았다.
채지세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빨리 끝내고 찾으러 가자.
“……그래.”
그 말과 함께 현하빈은 손에 든 검을 고쳐잡았다.
몇 번이고 쥐었던 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언제나 여유를 두고 필사적으로 힘을 죽였던 지난날과 달리, 처음으로 제대로 쥔 아헤자르, 진심으로 겨눈 목표, 온전히 담아낸 힘.
그리고…….
-바로 지금이야!
이 순간.
하빈은 검을 휘둘렀다.
폭죽처럼 명멸하듯 반짝이는 코드들과 손안에 틀어 잡힌 관리자. 여기까지 도달하게 한 수많은 사람들과 여정들.
그 사이, 어렵게 발견한 찰나의 틈을 향해.
……하빈의 마지막 공격이 정확하게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