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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36) (236/268)

236.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4)

그로부터 조금 전.

한국, 서울.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희뿌연 검은 장막이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건 강태서의 스킬이잖아?”

헌터 중 누군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왜 갑자기…… 설마 강태서가 돌아왔나?”

“정말?”

“살아 있었던 거야?”

칼리고 측 사람들이 반색했다. 관리자의 공격 직전에 강태서가 실종되어서 얼마나 큰 혼란을 겪었던가. 그런데 이제라도 다시 돌아와 준다면. 그 전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희망적인 예측으로 들떴다.

스킬의 효과를 확인하기 전까지.

[경고! 그림자 필드의 범위 내에 있습니다.

1차 효과- 지금부터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체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집니다!]

[일부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곧 2차 효과가 적용됩니다. 신속히 이 공간을 벗어나십시오!]

“잠깐, 그런데 이거…….”

누군가가 외마디 말을 뱉었다.

“이거, 디버프가 왜 우리한테 작용하는 거야?”

원래 그림자 필드 스킬은 아군에게는 강력한 버프 효과를, 적군에게 강력한 디버프를 준다. 그런데 몬스터가 아닌 자신들에게 디버프가 적용되다니?

“스킬 잘못 쓴 거 아냐?”

“강태서는 어디 있어?”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 * *

“……뭐야?”

마침 관리자 방에 있던 반투명한 창도 그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하빈이 의아한 낯을 했다. 관리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강태서는 배신자였다!]

드디어 되찾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

[그동안 너희 인류의 정보를 내게 팔아넘기던 첩자였지.]

마침내 근질거리던 사실을 말한다는 듯 기쁨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관리자의 기운이 크게 웃음을 터뜨린 것처럼 일렁였다.

[너희가 그토록 믿었던 강태서의 진면모를 이제 알겠나? 강태서는…….]

구구절절 이어지려는 설명. 그러나 하빈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으응, 개소리하지 마. 너 이간질할 줄 모르지?”

[……?]

“어휴,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냐? 이때다 싶어 입 터는 것 좀 보게?”

전혀 타격 없는 얼굴로 아헤자르를 고쳐잡는 하빈의 행동. 그것을 본 관리자가 말을 얹었다.

[……기만의 수호자, 애써 부정하려나 본데! 내 말은 진짜다. 정말로 강태서는 나의 사도였고……!]

“이거나 받아라, 얍!”

퍼버벙!

[진…….]

“어휴, 안 통한다는데도 말이 많아요!”

퍽퍽!

관리자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패기 시작하는 현하빈. 그걸 본 아헤자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지적했다.

[그, 그런데 관리자의 말이 진짜일 수도 있지 않느냐?]

“엥? 잘잘아. 원래 이런 상황에서 악역의 말 같은 거 함부로 들으면 안 돼. 이런 놈들은 틈만 나면 이간질을 일삼는단다!”

하빈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알고 보니 지가 그림자 필드 스킬 가짜로 띄워 놓고 강태서가 했다고 주장하는 거 아냐? 엉?”

하긴 관리자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빈의 중얼거림에 관리자는 말이 막힌 듯 잠깐 침묵했다.

[…….]

사실 그림자 필드 스킬은 지금 시전될 스킬이 아니었다. 멸망을 앞당기는 김에, 관리자가 멋대로 예약 시간을 앞당겨서 예정보다 일찍 시행된 것.

그래도,

[……저걸 강태서가 실행했다는 건 명백한 진실이다. 그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다!]

관리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가 강태서를 소멸시켰긴 했지만, 그림자 필드 스킬은 예약제 스킬. 미리 걸어 두었기에 그저 실행될 뿐이다. 그걸 취소할 수 있는 강태서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네가 무슨 소릴 해도, 저 스킬로 인해 고통받을 너희의 처지도 바뀌지 않을 테지.]

끼익거리는 소음이 마치 킥킥 웃는 소리처럼 기괴하게 변형되어 관리자의 말에 섞였다. 관리자는 얻어맞는 와중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인류의 희망이 사실 인류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둬라! 이건 시작에 불과한 일이며……!]

“에라이, 얘는 왜 입이 자꾸 복구돼? 어딜 때려야 말이 멈추는 거야? 이게 바로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뜨는 타입인 건가?”

[…….]

하빈은 슬쩍 창을 돌아보았다. 이런다고 관리자 패는 걸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저 정도로 넓은 범위의 스킬 효과를 받는다면 전쟁에 영향을 끼칠 터.

‘강태서는 어디 있는 거야? 빨리 스킬 취소하지 않고.’

진짜 무슨 큰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하빈은 관리자의 머리통을 한 대 더 쳤다.

빠악!

“네가 강태서 어디 납치해 놓고 조작하는 거지? 응? 어쨌어?”

[내 말을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

그 순간.

-끼이이!

-끼에에엑!

화면 너머로 몬스터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뭐, 무슨?]

“……!”

관리자의 당황한 목소리에 하빈은 화면을 확인했다. 광범위하게 썰려 나가는 몬스터들과 어느새 해제되어 있는 그림자 필드. 그 너머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강태서가 등장했다.

* * *

“길드장님!”

극적인 순간에 등장한 강태서를 보고 반색하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 강태서가 다급히 덧붙였다.

“스킬 사용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빠르게 조치했으니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 강태서의 방금 공격으로 인해 전세가 다시 유리하게 역전된 상황. 그러나 길드원들은 그의 해명이 아닌 다른 데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몸은 괜찮으세요?”

진심 담은 걱정이 느껴지는 말들에 강태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부길드장이 재차 물었다. 그러나 강태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도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니까.’

강태서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알림창은 다음과 같았다.

[별의 조각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존재성 복구 완료.]

[주의, 존재성 복구에 성공했지만 일부 시스템 기능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랭킹 시스템 접근 실패!!]

[!!기존 성좌와의 연결 복구 실패!!]

‘별의 조각이라는 아이템을 소모해서 소멸을 막아낸 건가?’

그건 현하빈한테 받았던 아이템인데.

‘설마 알고 줬던 건가?’

하긴, 현하빈이 그에게 메일로 치트 키를 보냈던 걸 생각하면 진작 그와 관리자의 비밀을 다 눈치챈 건지도 모르겠다.

‘기만의 수호자’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건가, 아니면 현하빈이라서 할 수 있었던 일인가.

“…….”

강태서는 주머니에 든 츄르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옆에 있던 건 땅바닥에 떨어진 츄르와 까망이었다.

처음에는 까망이가 챙긴 츄르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평소 강태서가 까망이에게 주던 츄르의 종류와 달랐다. 그러니 어쩌면 누군가 거기 다녀갔던 흔적일지도 모른다.

-게오오옹!(츄르, 저번에 봤던 머리 긴 인간이 주고 갔다!)

츄르와 자신을 번갈아 가며 뭐라 설명하고 싶어하던 까망이의 모습으로 봐서는, 강태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래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오느라 바빴다. 예약해 둔 ‘그림자 필드’ 스킬을 취소해야 했기 때문에.

다행히 너무 늦기 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강태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어디서 누구한테 당한 것인지 말하기는 어려웠다.

‘관리자가 인류의 적이라고 어떻게 말해?’

그랬다. 강태서는 일찍 소멸을 당하는 바람에 지금 현하빈이 전 세계 스트리밍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사람들이 이 모든 일의 배후가 관리자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혼자 어디부터 설명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냥 나만 알고 있는 편이 낫겠지.’

강태서가 속으로 생각할 때였다. 부길드장이 화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관리자가 한 짓입니까?”

“……그걸 어떻게?”

저도 모르게 반문한 강태서. 그러나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길드원들도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고 그는 재차 표정을 바꾸었다. 굳은 표정의 강태서가 물었다.

“관리자가 배후인 게 밝혀졌습니까?”

“네? 네. 현하빈이 실시간 스트리밍을 해서…… 아니 설마 이 사실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스트리밍?”

“제가 설명드릴게요!”

마침 핸드폰으로 하빈의 실시간 스트리밍을 보고 있던 길드원이 강태서를 향해 재빨리 달려왔다. 그의 화면에는 하빈이 관리자의 방에서 코드를 수정하고 관리자를 때리는 장면이 선명하게 송출되고 있었다.

“……!”

관리자의 방에 어떻게 현하빈이?

게다가 그걸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었다고.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강태서의 눈이 커졌다. 그가 다급하게 길드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죄송하지만 저는 다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아, 걱정 마세요. 그럼 이쪽은 저희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부길드장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예전이랑 태도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은데?’

그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강태서를 돌아보았다. 평소의 강태서는 상명하복식의 통보를 고수했다. 길드원에게 조심스럽게 편의를 묻거나 감정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고, 상호 존칭도 자주 생략했다.

공과 사는 철저하다 못해 차가울 정도로 칼 같아서, 회의를 해야 할 때는 정말로 회의만 하고 들어가 버리고, 불필요한 말은 전혀 하지 않으며, 회식을 비롯해 업무 외의 사적 교류는 일절 없다.

그러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능했고, 강태서의 의견이 옳았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불만이 자주 사그라들었을 뿐.

게다가 말로는 티 내지 않지만 배려 넘치는 길드 복지와 행보를 비롯해 여러 면모에서 길드원들을 아끼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때문에 지금까지 칼리고에 남은 길드원들 중에서도 알게 모르게 강태서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강태서의 성격상 서로 그런 표현이나 교류가 절대 안 먹힐 철벽이라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좀 표현만 잘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하도 싸가지 없다거나 인간미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으니.

‘죽다 살아나니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평소의 긴장감 넘치고 딱딱하던 분위기보다 훨씬 누그러진 말투였다. 남겨질 길드원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티가 났다.

굳이 내막을 파고들면 강태서가 그동안 관리자의 감시를 실시간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사람들과의 교류를 줄이고 매사에 긴장했다는 점을 알았겠지만, 지금 부길드장이 느끼기에는 그저 의아했다.

아니, 의아하다 못해 어딘가 불안할 마음이 들 정도였다. 마침 강태서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많이 감사했습니다. 멋대로 행동하는 저 때문에 다들 좀 힘드셨을 텐데.”

“……!”

그동안 강태서가 감사 인사를 안 하는 편은 아니었다. 매번 일이 끝날 때마다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인 것 같다. 잠깐 멈칫한 길드원들이 멋쩍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별로 안 힘들었는데요.”

“에이, 길드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역시 멸망을 앞두었다 하니 긴장이 되는 것이려나?’

‘좀 감성적이게 된 걸지도.’

각자의 추측이 이어졌다. 바쁜 와중이라 강태서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씩 더 보탰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번 일 끝나면 길드장님도 회식에 오실래요?”

“야, 이 판국에 그게 중요하냐?”

“왜, 우리 어차피 이길 거잖아. 길드장님! 자리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요!”

“다치지 마세요!”

“…….”

등 뒤로 쏟아지는 말들에 강태서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다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 * *

‘……관리자가 나에 대해 언급했었네.’

강태서는 이동 중에도 하빈의 방송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관리자가 그림자 필드 스킬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놓고 내가 사도였다는 걸 밝히다니.’

현하빈과 사람들의 멘탈을 흔들고 마지막까지 강태서의 최후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겠다는, 다분한 악의가 느껴지는 행보였다.

‘그런데도 다들 날 추궁하지 않고…….’

방송을 보다가 강태서를 만났으니 아무리 그가 스킬을 취소한 직후라 해도 ‘진짜 관리자와 한패였냐?’, ‘해명해라.’ 등의 반응이 나올 수 있는데. 하지만 그를 맞이했던 길드원들은 그러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세요?’

‘혹시 관리자가 한 짓입니까?’

오히려 걱정했을 뿐.

……그걸 떠올리면 역시 마음 한쪽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태창.”

강태서는 생환 이후 바뀐 자신의 상태창을 훑었다.

소멸 전에 비해 달라진 상태창. 그걸 보면 스킬은 제대로 쓸 수 있게 뜨는데 랭킹이나 성좌 관련 정보 등등 몇 가지가 안 떴다.

[!!랭킹 시스템 접근 실패!!]

[!!기존 성좌와의 연결 복구 실패!!]

소멸을 당하면서 관리자의 감시나 연결도 끊긴 모양.

연결이 끊긴 건 좋은 일이었다. 아마 관리자는 강태서를 재소멸시키진 못할 거다.

‘그럼 혹시…….’

강태서는 상태창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비록 사도가 아니라도, 여전히 관리자 모드로 접속하는 방법은 쓸 수 있을까.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는 그의 앞에 마침내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

[관리자 모드로 접속하시겠습니까?]

[경고! 권한이 없습니다! 접속 시 존재성이 소모됩니다!]

‘다행히 이걸 막아 놓지는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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