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3)
평소 이프시네가 이리저리 각 층을 돌아다닐 때, 하빈은 은근히 옆에서 거들고 도우며 상황을 살폈다. 가끔 이공간에서 만나 인사할 때라든가, 전화로 통화할 때라든가, 97층에서 옹기종기 모여 대화할 때.
틈틈이 잡담처럼 나누었던 대화들.
“……뭐어? 정령숲 주민들이 조약 안 하겠다 뻗댄다고?”
“네! 거기 이장님이 마족은 못 믿겠대요. 그리고 언제 같이 싸울 일이 있냐며 저흴 의심하던데요? 명확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면서.”
“명확한 조건?”
“왜 갑자기 군사 협정을 맺는 건지 모르겠대요. 이왕이면 특정 조건들을 걸고 그때만 참전하면 안 되겠냐고 하는데…….”
흐음.
그 말을 듣던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래? 그럼, 혹시나 25년 뒤에 멸망 나면 그때 같이 싸우자고 조건을 걸던가. 그 정도는 공동으로 싸울 이유가 되겠지.”
“헉? 저희 멸망해요?”
“몰라. 잘잘이 말로는 할 수도 있다던데. 25년쯤 뒤에?”
“그럼 다음엔 그걸로 꼬셔볼게요!”
신나게 대답하는 이프시네. 하빈 역시 궁금한 걸 종종 물었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너희는 왜 킬스크린 밖으로 못 나가?”
“그러게 말이에요! 갇혀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니까요? 심지어 층끼리 넘나드는 방법도 쉽지가 않아요!”
“정해진 게임 속 NPC나 보스 역할만 하는 게 다란 거지?”
“네에?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쨌든 마신님이 저번에 꺼내 줬을 때 빼고는 못 나가 봤습죠.”
가만히 있던 크릭샤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 말에 이프시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엥? 릭샤릭샤? 릭샤는 나가 봤어요? 언제?!”
“크흠, 아무것도 아냐.”
말하면 안 되는 경험이었다는 걸 떠올린 크릭샤가 재빨리 입을 다문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지만.
‘어쨌든 그렇게 대충 견적을 잡아봤다고.’
97층에서는 하빈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헤자라토와 체칼라다임, 픽셔 제국과 협정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항상 모른 척하더니…… 사실 멸망을 대비하는 거냐?]
아헤자르는 그때마다 반색했지만,
‘엥? 아니 뭐 내가 굳이 멸망 막는다고 안 나서더라도…… 다들 알아서 준비하라고 정보는 줄 수 있는 거지.’
혹시나 25년 뒤에 현하빈이 없더라도 얘네들끼리 알아서 열심히 으쌰으쌰 뭐라도 해보지 않을까?
[…….]
그렇게 적당히 뒤에서 조금씩 도움을 주던 현하빈.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빨리 멸망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에휴. 내 팔자야.”
관리자의 방을 털러 가기 전, 하빈은 이프시네와 크릭샤를 불렀다.
“관리자 놈이 우리 멸망시킬 거래.”
“네에? 25년 뒤라면서요!”
“걔가 삔또 상해서 일방적으로 날짜 바꿨어.”
“허억, 그럴 수가!”
“원래 매너 없는 놈들의 일 처리란 항상 그런 법이지, 에휴.”
“그렇군요……!”
하빈의 말을 귀담아듣던 이프시네는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그렇다면! 역시 마계대전을 준비해야겠죠! 관리자는 어디로 가서 치면 되나요!”
“있어 봐. 관리자 놈은 내가 대충 1시간 컷 하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역시 마신님!”
“너희는 평소에 준비한 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나중에 채씨랑 레몬 시켜서 포탈 열어주면, 그리로 나가면 돼.”
“넵!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채씨라면 저번에 봤던 금발 인간입죠? 레몬은 저번에 치킨 먹을 때 본 정령이고.”
“오, 크릭샤가 기억력이 좋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빈. 그러나 이프시네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마신님, 다른 층은 모를까 97층 사람들은 조약을 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바로 저희 말을 들어줄지 걱정인데요.”
“에휴, 그럼 나도 말 좀 해 두고 오지 뭐. 20분 컷 하고 올게.”
그렇게 하빈은 관리자의 방에 가기 전, 빠르게 두 나라를 다시 한번 더 털었다.
첫 번째, 체칼라다임.
-삐아아!
“요, 용신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시다니!”
마침 국가 중대 회의를 하고 있던 체칼라다임은 왕과 대신들이 다 한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오호, 다 모여 있으니 마침 잘 됐네! 신탁 내리러 왔다, 받아라!”
“예……?”
-삐이잉! 삐아아! 삐아! 삐아!
“해석해 주지.”
“……?”
“드디어 세계의 끝이 도래했다! 근데 너희가 용신의 뜻에 따라 마계와 힘을 합쳐 잘 막으면 될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약속을 지키도록 하자!”
“…….”
“……라고 용신님이 말해주시네요. 나머지는 금발의 선지자 채씨가 나중에 또 와서 말해줄 테니 다들 빨리 출전 준비하고 있도록! 이상!”
“네……넵?!”
“그럼 저는 시간이 되어서 이만.”
그다음은 헤자라토 제국.
“……아헤자르 등장!”
“으허어억!”
“아, 아헤자르님! 갑자기 왜 나타나신 겁니까!”
“황태자 씨, 오랜만이다, 그지?”
갑자기 접견실 한복판에 나타난 하빈의 모습. 덕분에 기겁하는 티자르 황태자를 보며 하빈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걱정 말라구. 황위를 탈환하러 온 거 아니니까 진정해.”
“그…… 그렇습니까?”
휴우.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황태자에게 하빈은 씩 웃으며 외쳤다.
“대신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왔다!”
“……?!”
그렇게 두 나라의 협조 약속을 받아낸 하빈.
[잠깐, 그런데 픽셔 제국은 안 들러도 되느냐? 황길때의 주인공 릴리! 릴리를 보고 싶은데!]
“어허. 픽셔 제국은 마법 조약을 한 데다가 원래 조약 잘 지키기로 유명하대. 게다가 나머지 두 나라까지 나서니 안 나설 리도 없어. 우린 시간 없으니 빨리 관리자 털러 가야 한다구.”
[왜 하필 픽셔만 건너뛰느냐! 내 최애 나라를!]
“아이 잘잘이, 지금 이 판국에 릴리가 중요해? 관리자 컷하고 와서 보면 되지! 아니 그리고 너는 아헤자르인데 너를 받들어 모시는 헤자라토 제국을 최애로 삼아야 하는 거 아냐?”
[헤, 헤자라토 제국도 좋아한다……. 내가 받들어지고 싶어서 받들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일 처리를 한 현하빈은 채지석과 레몬에게 포털 좀 열어서 쟤네랑 나머지 일을 부탁한다 말해놓고 관리자 방으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 * *
“……원래 더 빨리 오려고 했었는데, 늦지는 않았죠?”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추가 원군 덕분에 상황은 더 바빠졌지만, 전세는 그들에게 훨씬 유리해졌다. 킬스크린의 주민, 그중 최상층 주민일수록 웬만한 각성자와 맞먹는 특수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숨 돌리게 된 틈을 타 현시우는 채지석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랭킹 얼마나 올랐습니까?”
“…….”
보좌관 역시 말을 보탰다.
“아, 제가 확인했을 때도 잠깐 랭킹 변동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한 등급 낮아지고 올라가고 하는 걸 겪긴 했는데, 제 랭킹이 올라가는 건 다른 지역의 상위 랭커가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했습니다.”
랭킹은 전체 표시가 아니라 각자의 상태창에 등수로만 표시된다. 사람들이 랭커들의 등수를 꿰고 있는 이유는 이 등수를 서로 공유해 공식적인 자료로 기록해 뒀기 때문.
그러나 이런 전쟁 상황에서는 각자의 랭킹을 일일이 찾아볼 틈이 없다.
“하지만 방금 제 순위가 낮아지는 걸 느꼈기 때문에…… 누군가 상위 랭커로 갑자기 올라오지 않는 이상 밀려나기 쉽지 않은데, 이 판국에 어떻게 갑작스러운 변동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채지석 씨가 방금 보여 준 능력도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라서요. 아, 물론 기존에도 뛰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킬스크린의 대부분 층을 한번에 여는 건 이곳에 있는 랭커 모두를 데려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시우 역시 엄두조차 못 낼 일.
그에 대해 채지석은 일단 말을 돌렸다.
“원래 사람마다 뭐 하나쯤 숨겨 놓는 게 있잖아요. 피데스 님의 가면이나, 저희 누나가 숨겨 놓았던 무기들처럼.”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요.”
“…….”
채지석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현시우는 믿을 수 있다 치지만 이걸 여기서 말해도 되는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려질 테니.’
“……2위입니다.”
“……!”
채지석은 현시우만 알아들을 수 있게 ‘가장 가까운 빛’에게 나머지 말을 돌려 전달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현하빈과 계약한 결과라고 덧붙입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현하빈이 성좌가 됐다며, 성좌가 이렇게 쉽게 되어도 되는지 처음 알았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하긴 생각해 보면 현하빈은 성좌 아니었을 때도 최고위 성좌들을 다 패고 다녔으니 딱히 달라진 것도 없다고 중얼거립…….]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현시우는 ‘가장 가까운 빛’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바로 진상을 파악했다.
네아이바가 끼어들었다.
[현하빈이랑 계약했다고?! 그럼 갓 성좌 된 불안정한 상태로 계약을, 그것도 2성좌로 계약했을 텐데 저렇게 등수가 팍 올라도 되는 거야?!]
2성좌부터는 그 영향력이 1성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니 현하빈과의 계약은 일반 성좌 계약보다 더 적은 영향을 받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2위로 끌어올렸다는 뜻이 된다.
‘아니, 오히려 2성좌였기에 저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쪽이 맞겠죠. 1성좌로 계약했으면 대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도 안 되네요.’
또 오류 나서 0위니 -1위니 하는 계약자를 만들어내는 거 아닌지 몰라?
그게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다행인 게 맞나?
현시우가 고개를 기울이자 네아이바가 슬쩍 끼어들었다.
[왜? 쫄렸냐? 기껏 만든 랭킹 1위를 성좌빨로 뺏기면 억울할 것 같아서?]
‘…….’
흠흠.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고생해서 오른 자리를 한순간에 뺏기면 역시 억울할 것 같기도?
현시우가 눈썹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보좌관이 채지석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럼 원래 있던 랭킹 2위, 강태서 씨는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돌던데. 사실 한두 시간 전부터 최상위권 랭커들의 순위가 올라서 강태서 씨가 전사하신 건지 랭킹 3위인 에라타가 죽은 건지, 흉흉한 소문이 돌긴 했어요.”
에라타 역시도 첫 선제 방송 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채지석은 죽은 강태서의 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건지, 혹은 살아있는 강태서의 순위를 강탈하고 그 위로 올라선 건지.
단지 시스템에 표시되는 숫자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상황.
‘전 회차에서도 비슷한 추측이 오갔었는데.’
강태서가 죽은 건지 에라타가 죽은 건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결론이 어떻게 났는데?]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강태서의 공격 스킬이 아군을 향해 시전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현시우가 네아이바에게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피데스 님! 한국 쪽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갑자기 달려온 다른 요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요? 그쪽은 이미 거의 정리가 끝났다고 하던데?”
첫 타자로 공격받았지만, 역시 첫 타자로서 가장 먼저 대처에 들어갔던 나라, 한국.
훌륭하고 빠른 대처로 가장 먼저 몬스터 진압이 끝날 예정이었는데, 대체 왜.
의아한 낯을 하는 현시우에게 요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 서울에 ‘그림자 필드’ 스킬이 시전되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