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2)
[……잠깐!]
다급하게 외치는 관리자의 말. 하빈은 고개를 까닥였다.
“왜? 은퇴하게? 항복할 마음이 들었어?”
[그게 아니라,]
“그럼 맞자!”
[…….]
그 외의 말은 전혀 들어주지 않는 하빈. 얄짤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공격이 빗발치려는 순간.
-끼기기긱.
소름 끼치는 쇠 긁는 소리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끼기긱! 끼긱! 끼기기긱!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공간과, 불길하게 일렁이는 관리자의 신형
[네놈을 상대하려던 건 내 패착이 맞다. 인정하지.]
‘음? 상대하는 게 패착이었다고?’
그럼 설마, 상대 안 하고 도망가려는 소린가? 하빈은 재빨리 인상을 썼다.
“어딜 도망가? 갈 거면 권한 다 넘기고 인수인계까지 해 놓고 가!”
어떻게 잡은 녀석인데 절대 다 털어먹기 전까지는 보내줄 수 없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현하빈이 관리자의 멱살 비슷한 위치를 꽉 틀어잡을 때였다.
-끼기기기긱!
관리자의 모습이 한 번 더 크게 일렁였다.
[!!경고!!!]
[!!!ㅍP기 계ㅎlㄱ의 급겨r한 실행 지시!!]
[즉각 지1구@#*)($)(3_의 폐기 실행!]
[dP약된 프fh그램을 rkd제로 진해ddgkqㅂ니다!]
고장난 듯이 깜빡이는 알림창과 함께, 관리자는 소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뱉었다.
[끄으윽…….]
희미해진 신형을 보아하니 관리자 역시 과하게 무리한 모양. 뒤이어지는 관리자의 말 역시 지지직거리며 더듬더듬 깨져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다니, 인정해 주지.]
그러나 깨진 목소리 사이에서도 비치는 건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하빈이 관리자를 콱 밟았다.
“너 뭐 했냐?”
[…….]
대답 없는 관리자 대신 하빈은 채지세에게 물었다.
“언니, 지금 상황 어때?”
-……그게.
이어폰 너머로 채지세가 당황한 듯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빈은 스트리밍 시작 후 처음으로 영상의 실시간 댓글란을 향해 눈을 돌렸다.
하빈의 상황을 보며 채팅을 치던 시청자들.
-다ㅏ들 이거 ㅂᅟᅩᆯ 때가 아님 !l 도망쳐!
-뭐야 뭔데
-아까 한국 상황 봤지? 그게 지금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음
-다른 나라라고 안심하고 있던 애들 빨리 도망쳐라 나는 한국인이라서 이미 대피함
-오우쉣
-아니 근데 아직도 대피소에 도망 안 간 놈이 있냐?? 이 판국에??ㅋㅋㅋㅋ
-멸망 예고 때린 지 얼마 안 됐자나;; 대피 시스템 잘 안 된 나라는 아직도 대피중이었음....
“…….”
하빈은 채팅을 보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렸다. 세계 곳곳의 하늘에 대기시켜두었던 까만 게이트들.
그게 모두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과하게 힘을 쓰느라 관리자 역시 타격을 입은 모양이지만, 관리자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손 쓸 틈 없이 세계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면 너도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을 테지.]
관리자가 가리킨 연기 너머에는 방금 띄워 둔 창이 보였다.
원래 한국의 상황을 비추던 반투명한 창에는 이제 한국이 아닌 세계 각국의 모습들과, 구멍에서 쏟아져 나올 몬스터들의 모습을 미리 비추고 있었다.
그냥 보아도 어마어마한 수였다.
[이런 걸, 인간들은 상처뿐인 승리라고 부르던가?]
“…….”
[네가 의미 없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게 나을까. 지금 돌아가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나을까?]
어차피 살려봤자 또 멸망시키면 끝일 테지만.
관리자가 끼익거리며 기분 나쁜 소음을 내었다.
* * *
“이피션트 메테오!”
콰과광!
[이야, 현하빈이 메테오 노래 부르던 걸 네가 먼저 써보네.]
‘사실 걔가 메테오 이야기하던 게 생각나서 써 본 겁니다. 위력은 훨씬 약하겠지만.’
[아 그래?]
“피데스 님! 저쪽에……!”
“페이탈 빔!”
쾅쾅!
그 시각, 현시우는 한창 전투 중이었다.
‘관리자가 그럼 그렇지.’
멸망 계획을 실행시키는 것도 관리자에게는 큰 페널티가 될 일이다. 그걸 무리해서 앞당겨 실행하는 건 더더욱.
그래서 한두 시간은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기대했는데.
[현하빈한테 맞다 보니 관리자도 ‘아,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게 아닐까?]
‘백퍼 그 생각 했을 듯.’
무리를 해서까지 억지로 일찍 공격을 감행하는 걸 보니, 관리자가 현하빈에게 진정으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니 이건 오히려 기회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승산이 있어요.”
현시우의 말에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하지만 적군의 병력 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야 피데스 님이 지켜주시니 괜찮다 쳐도, 다른 지역들은…….”
“…….”
“미리 대비를 잘 해두긴 했지만 언젠가 한계가 올 겁니다.”
“그전에 상황이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렇겠죠?”
“일단 솔라리스에서 지원한 무기들 보급을 그쪽으로 먼저 돌리라 하고…….”
현시우는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투와 지휘를 동시에 하느라 쉴 틈 없이 바쁜 와중. 그 사이에도 암담한 소식들이 계속 들어왔다.
“유럽 쪽 방어선이 무너질 것 같다는데요?”
“싱가포르 지부에서 원군 요청이 왔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쪽도 상황이 안 좋은 듯합니다!”
한 곳이라도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하면 무너지는 건 속수무책일 것이다. 현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빨리 이쪽을 먼저 처리하고 마저 도우러 가죠.”
끝없는 몬스터 행렬을 향해 그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천일야의 저주!”
“이거나 먹어라!”
그들의 진영이 아닌 곳에서 쩌렁쩌렁 들리는 외침.
촤아아악!
뒤이어 펼쳐지는 화려한 스킬들에 몬스터들이 주춤했다.
-끼이이이?
-끼?
“……?”
“뭐, 뭐죠?”
헌터들이 술렁거리며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아군인가?’
하지만 그들이 알기로 전 세계의 모든 병력들이 각자 자리에서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일 텐데 어떻게?
현시우는 얼른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의 눈에 비친 건.
“……!”
“피, 피데스 님, 대체 저게 무슨?”
“킬스크린……?”
[킬스크린 맞냐?]
그들이 돌아본 쪽은 킬스크린이었다. 인류가 언제나 도전하던 거대한 탑. 끝없이 높아 보였던 난공불락의 탑이.
……열리고 있었다.
“진짜 저게 무슨…….”
정확히 말하면, 각 층마다 포탈이 생겨나서, 그 너머의 층들이 보였다. 포탈 너머로 전투 태세를 갖춘 킬스크린의 주민들과, 마수들이 대기하는 광경. 그 모습을 본 헌터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지구 주민 여러분!”
마침내, 킬스크린 주민 중 한 명. 선두에 선 분홍머리 마족이 신이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흠, 저는 50층 ‘마계’출신인, 몽환의 마왕 이프시네! 앗…… 잠시만요! 공격하지 마세요! 도와 드리러 온 거예요!”
그 발언에 헌터들은 충격을 받은 듯 술렁였다.
“저, 정말이야?”
“마계잖아? 게다가 저기 옆에 있는 마왕은 50층 공략 때 봤던 잔인한 교만의 마왕…….”
헌터들 중 한 명이 이프시네 옆의 크릭샤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귀신같이 그 소리를 잡아챈 크릭샤가 툴툴거렸다.
“쯧, 인간 놈들, 정말 의심은 많아선.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는 말도 몰라?”
“저희도 멸망 앞에서는 손 놓고 볼 수 없죠! 우선 마계는 마신…… 아아니, 하빈 님의 편입니다!”
-크르르릉!
그 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을 구르는 켈베로스까지. 켈베로스의 태도를 확인한 크릭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켈베 녀석도 매번 개껌 받고 잘 놀더니 아주 마신님 팬이 다 되었군.’
켈베로스 뒤에 늘어선 마수들도 바짝 군기가 잡혀 있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리치’의 도움까지 받아 제대로 군을 편성했으니 아마 쓸 만할 것이다.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다른 층 주민들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그리고 저희는 17층, ‘요정계’를 대표해 원군으로 참전합니다! 50층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26층입니다. 저희는……!”
“32층 ‘정령숲’의 주민입니다. 저희 또한…….”
…
…
이어지는 각 층들의 짤막한 소개,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주자들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97층의 헤자라토 제국은 마계와의 조약과, 아헤자르 님의 뜻에 따라 참전합니다.”
“체칼라다임은 용신님의 뜻을 따라 신성한 전투에 임하겠네.”
“저는 픽셔 제국의 소공작 릴리 단델리온입니다. 픽셔 제국 역시 마계와의 조약에 따라 원군으로 합류했습니다!”
“……와.”
현시우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게,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제, 제가 꿈을 꾸나요?”
“그러게요.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현시우 역시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아직 공략되지 않은 킬스크린의 수많은 층들을 저렇게 동시에 열어젖히다니.
이제껏 킬스크린 내부의 주민들이 그 밖으로 나오는 방법은 확인된 바 없었다.
플레이어가 탑 안에 들어가 공략하는 건 괜찮았지만, 그 역은 불가능. 사람들은 막연하게 이게 던전의 법칙이자 게임의 법칙이라 생각하고 당연하게 여겨 왔다.
마족처럼 상층의 위험한 주민들이 지구로 쏟아져나오지 않으니 안전장치로 마련된 법칙이겠거니, 했을 뿐.
그런데 주민들이 밖으로 나오는 포탈을 만들다니. 그리고 그 주민들이 아군이 되어 준다니?
“……현하빈의 계획이었습니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현시우가 시선을 돌렸다. 그들 옆에 생긴 또 다른 포탈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채지석.
그를 발견한 현시우는 진상을 파악한 얼굴을 했다.
“……지금 저 포탈들, 설마 채지석 씨가 열었습니까?”
“네, 원래 현하빈이 갖고 있던 스킬이긴 한데…….”
‘찬란의 답습’을 이야기하기에 눈치가 보이는지 말을 얼버무리는 채지석. 현시우는 재빨리 그걸 받았다.
“현하빈이 빌려줬군요. 그래도 어떻게 한번에 저렇게 많이……?”
현시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평범한 공간 이동용 포탈이라면 모를까, 킬스크린의 법칙을 무너뜨릴 정도의 포털을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오류 그 자체인 현하빈이니 마음대로 넘나든 것이었을 텐데.
‘아무리 스킬을 카피할 수 있다지만 그 위력까지 완전히 카피하지는 못했을 텐데?’
“…….”
그 질문에 채지석은 자신의 성좌 목록을 힐끔댔다.
제 1성좌 가장 가까운 빛
제 2성좌 _Unknown*!
제 3성좌 탈라리스
‘……그야 2성좌가 현하빈이니까.’
그랬다.
레몬과 채지석이 성좌 계약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공간에 나타난 ‘이름 없는 성좌’는 현하빈이었다. 채지석은 그때 현하빈과 계약한 것이었다.
‘이름이 Unknown으로 뜨긴 하지만…….’
현하빈의 설명에 따르면, 성좌 이름 생성하기 귀찮아서 나중에 입력하려고 공란으로 비워놨다던데, 그래서 언노운으로 뜨는 모양.
그래도 ‘현하빈’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위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계약 이후 채지석의 스킬 숙련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렇게 포탈을 동시다발적으로 생성하고, 킬스크린의 주민들을 이동시킬 정도로.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너 계약하자마자 SSS급 찍은 거 봤다고 속닥입니다.]
“…….”
“저도 도왔다고요!”
뒤늦게 포탈에서 쑥 나온 레몬이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하빈과의 계약에 뒤이어 3성좌로 황레몬까지 계약한 덕에 지금 채지석의 능력은 역대 최대치를 찍고 있었다.
“이분은……?”
현시우의 곁에 있던 보좌관이 레몬을 보고 당황한 낯을 했다. 채지석이 대신 재빨리 소개했다.
“황레몬이라고, 공간이동에 특화된 정령이시랍니다. 그래서 여기 포탈 여는 것들을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빈이 만들어준 위장 신분을 댔다. 보좌관은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 아하, 그래서 이런 무지막지한 일이…… 가능했군요?”
“……사실 도와주신 분이 또 있는데.”
채지석은 헛기침을 하며 포탈을 돌아보았다. 레몬 다음으로 나온 건,
“크흠,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가면마법사?”
“…….”
뻔뻔한 낯의 글리치였다.
그는 현시우의 얼굴을 보자 현남매의 집을 부숴먹을 뻔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지만, 모른 척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마계 출신이고 공간이동쯤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쯤은 도와주지.”
“마계 출신이시라고요? 실례지만 어느 직책인지…….”
“…….”
보좌관이 글리치의 정체를 캐려 하자, 현시우가 재빨리 막아섰다.
“자,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분은 저도 하빈에게 소개받은 적이 있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실력도 확실하죠.”
‘마신이니까.’
현시우의 다급한 설명에 보좌관이 낯을 굳혔다.
“그, 그렇긴 하죠.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이죠.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보좌관. 곁에 있던 현시우는 다시 한번 킬스크린을 돌아보았다. 극적인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든든한 연합군의 등장.
……이걸 다 현하빈이 계획했다고?
* * *
한편, 바로 그 시각.
[……!]
“어때, 리자관 씨! 이건 예상 못 했지?”
[킬스크린이 어떻게…… 아니, 이놈들이 어떻게 풀려난 거야?!]
관리자는 갑자기 나타난 킬스크린 연합군을 보고 몹시 당황한 모양새였다. 현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원래 탑은 오르라고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무너뜨리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