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1)
한편, 현하빈의 실시간 중계를 보는 사람 중 한 명.
전하빈.
그녀는 망가진 건물로 들어서며 핸드폰에 비친 화면을 쳐다보았다.
헌터넷에 올라온 글과 댓글들이었다.
관리자가 신나서 ‘왜 멸망하는지 알려주겠다’고 먼저 나섰는데 현하빈이 필요 없다며 일단 패기 시작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유는 들어줘야 할 거 아냐 우리도 궁금한데!
“……관리자가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지, 이유 별로 안 중요한데.”
그녀는 이미 전 회차에 이유를 알아낸 적이 있었으니까.
그냥 별거 없었다.
‘세계를 그대로 두면 감당 못 할 정도로 데이터가 쌓이지. 그러면 더 이상 관리자도 ‘시스템’을 다룰 수 없게 돼.’
끝없이 팽창하고 발전하는 우주, 계속해서 시간 속에 축적되는 데이터와 새로운 법칙들. 그리고, 그 한계점을 넘어 스스로 발전하고 자유로워질 우주의 잠재력.
그러다 보면 관리자의 능력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된다.
관리자는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매번 ‘세상’이 자신의 역량을 넘으려고 하면 다시 리셋을 반복했던 거지.”
관리자 입장에서야 ‘내가 내 힘으로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하찮은 미물들이 뭔 상관이냐’라는 식이었다.
관리자에게 세계란 다시 부서져도 새로 탄생하면 그만이고, 언제나 자신의 통제 아래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으니까.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관리자는 세상을 창조한 존재는 아니다. 그저 시스템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강했기에 자연히 그 자리에 앉아 모든 걸 쥐락펴락하며 즐기는 것일 뿐.
이미 만들어진 세계와 시스템을 장악해 자신의 힘을 즐기다가, 더 이상 즐기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파괴한 뒤 다시 새롭게 태어난 세계를 즐기고. 그것을 영원히 반복할 뿐이었다.
‘하, 그러니까 겨우 그놈 권력과 통제력을 지키겠단 이유로 세상을 무너뜨린다는 거잖아.’
빤하고 또 빤한 악역의 이유라 화도 안 났다. 아니, 그래도 화난다!
관리자에겐 스쳐가는 덧없는 세상 중 하나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 친구들에게는 그게 전부다. 멸망시키도록 둘까 보냐?
전하빈은 터벅터벅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걸었다. 한때는 주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몬스터의 습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무너졌다.
다행히 시민들은 일찍이 대피해서 사상자는 없는 모양이지만.
헌터들의 싸움 역시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몬스터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폐허일 뿐.
그러나 하빈이 찾고 있는 존재는 여기 있었다.
-게에오오옹!(무, 물러서라!)
크르르릉.
그녀의 앞에 재빨리 튀어나오는 검은 실루엣.
한껏 긴장한 듯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위협적인 발톱을 내민 동물. 평소의 귀여운 모습이었다면 다들 코웃음 치고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몸을 부풀린 건지 웬만한 맹수보다도 더 커다란 크기가 되어 있었다.
-끼아악!…… 에옹?(여긴 못 지나간다…… 엥?)
잔뜩 하악질을 하던 동물의 눈이 하빈을 발견하고 당황한 듯 끔뻑였다.
-게에엥?(너는 츄르 인간이 아니냐?)
스르륵.
하빈을 발견한 동물이 모습을 원래 크기대로 줄였다. 서서히 작아지는 덩치와 발톱. 마침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동물의 모습은 귀여운 까만 고양이였다.
강태서와 현하빈이 까망이라고 부르던, 그 고양이.
하빈은 까망이를 향해 다가섰다.
“야옹아 안녕?”
-게에오오……!(여긴 위험한데 왜 왔냐!)
“어디 보자, 나 인벤토리에 츄르 있었나……?”
하빈은 뒤적뒤적 인벤토리를 살폈다. 이럴 때 쓰려고 가져온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인벤토리에도 다행히 츄르가 있었다.
“혹시 너도 이거 좋아해?”
-게에엥! 게……게옹.(당연하지……가 아니라, 지금은 그걸 먹을 때가 아니다.)
츄르를 보고 반색하던 까망이는 이내 처연한 표정으로 귀를 접었다. 까망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께오, 께오오…….(멍청한 인간을 지켜야 한다.)
까망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 쓰러진 한 인영. 그 얼굴이 익숙해서 하빈은 숨을 들이켰다.
“……강태서.”
잠든 것처럼 미동 없이 쓰러져 있는 강태서. 그 위에는 얇은 회색 막이 감싸져 있었다. 그림자 속성의 방어 스킬이었다. 거기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까망이까지.
덕분에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무사했던 모양이다. 하빈은 기특하단 표정으로 까망이를 돌아보았다.
“네가 태서 지켜 준 거야?”
-게오옹, 게오오옹, 게에엥!(여기가 멍청한 인간의 집이라서 일단 데리고 왔었는데, 몬스터가 습격하는 바람에 집이 무너져 버렸다!)
에옹에옹, 열심히 손을 휘적휘적하며 어떻게든 설명을 하는 까망이. 그 모습을 보던 전하빈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흠……. 얘는 정말 볼수록 까망이랑 닮았네?”
-게에옹! 게엥!(당연하지! 내가 까망이니까!)
“태서가 많이 아꼈겠다.”
-게에엥, 겡! 게오! 게에에오.(흥, 원래 인간들은 다들 이 몸을 숭배한다! 저 멍청한 인간도…… 밥은 안 거르고 챙겨주더라.)
“으음, 말이 많네? 뭐라고 하는 걸까?”
하빈의 말에 까망이는 답답한 듯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게에! 게에엑!(역시 인간들은 다 멍청해서 이 몸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니까!)
“…….”
하빈은 까망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뒤, 강태서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쓰러진 그의 옆에 털썩 앉은 하빈이 입을 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사실 그동안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당장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낯을 보던 하빈은 입술을 달싹이려다 그만두었다.
하빈은 말을 잇는 대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손을 뻗어 강태서의 맥박을 확인하려던 찰나.
띠링!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사용자 ‘강태서’의 존재성 복구 진행 상황…… 현재까지 89% 완료]
[복구 작업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중지 원인: 재료_별의 조각 부족]
“역시 하나로는 부족하구나.”
별의 조각 한 개로는 복구를 완료하기에 부족했던 모양. 하빈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상태창을 켰다.
[경고! 당신이 존재할 수 없는 시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구 아이템이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현재 남은 별의 조각 (0.713415)…….]
하빈에게 남아 있는 별의 조각. 2회차에 존재하기 위해 지금도 실시간으로 소모되고 있는 아이템.
“이 정도면…… 잘 쓰면 하루 정도는 내가 여기 더 머무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잘하면 멸망을 막아낸 이후의 결과를 볼 수도 있겠지.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도움을 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2회차에 개입할수록 별의 조각이 급속도로 소모되니 강력한 스킬은 쓸 수 없겠지만,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보험이 되니까.
“…….”
잠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찔린 표정으로 태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크흠, 딱히 널 내버려 두고 돌아가려던 거 아니거든? 여기까지 온 것도 처음부터 각오하고, 혹시나 이럴까 싶어서 별의 조각 나눠 주려고 온 거였다고! 절대 망설이거나 고민한 거 아냐!”
-게에옹(뭐라는 거냐?)
“1회차에서는 네가 한 번 나 구해 줬으니까, 이걸로 나는 빚 갚은 거다?”
헛기침을 한 하빈은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헌터들과 몬스터들의 무리를 잠깐 돌아보았다.
“뭐, 이제 내가 물러서도 2회차는 2회차의 방식으로 잘 해결해 나갈 거라 믿어. 그러니까 딱히 미련은 없는데.”
하빈이 아이템 창을 누르며 덧붙였다.
“……깨는 걸 못 보고 가는 건 조금 아쉽네.”
[남아있는 별의 조각을 모두 선택하였습니다!]
[아이템을 사용할 방식을 정해주십시오.]
“아이템 양도. 양도 대상은 강태서.”
[‘별의 조각’을 ‘강태서에게 양도하시겠습니까?]
[양도 후에는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실행해.”
[양도 진행 중…….]
마침내 뜬 알림창을 보며 하빈은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다음 생? 아님 3회차? 뭐 대충 그때쯤 괜찮겠네.”
-게, 게옭?(뭐, 뭐냐?)
“까망이도 잘 있어! 아, 이름이 까망이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어쨌든 까망이도 안녕!”
해맑게 인사를 마친 하빈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뒤이어 허공에 뜬 알림창의 내용이 바뀌었다.
[복구 작업 문제 해결!]
[복구가 재실행됩니다.]
[사용자 ‘강태서’의 존재성 복구 진행상황 ……92%]
[……94%…….]
[……99%…….]
……
…
[……100%]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쾌한 완료 알림.
감겨 있던 눈꺼풀이 올라간 건 거의 동시였다.
* * *
[……지금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헌터들의 승리로 기운 한국의 상황을 본 관리자가 끼기긱거리며 불쾌한 소리를 내었다.
[곧 저기 걸어 놓은 스킬이 발동되면…….]
“응 아니야. 그전에 네가 먼저 끝날 거니 괜찮아.”
[네가 아무리 그렇게……!]
“얍! 이거나 먹으렴!”
[내 말을 끊지 말……!]
“21. 4억 펀치!”
콰과광!
제한이 풀린 하빈의 일격에 관리자의 공간이 한 차례 크게 진동했다.
그녀의 공격을 맞은 관리자의 신형이 지지직거리며 깜빡였다. 완성되지 못한 소리가 노이즈를 낀 채 뱉어졌다.
[이……이이……기……이악!]
“이제 좀 조용해졌네.”
[……!]
“더 맞고 싶다고? 알겠어!”
하빈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하빈아!
그녀의 이어폰으로 지세의 외침이 들렸다.
-지금 시스템을 너한테 양도하려고 보는 중인데, 관리자와 너무 깊게 연결되어 있어. 잘못하면 관리자를 죽이는 순간, 관리자와 연결된 세계도 타격을 입을지 몰라.
“엥?”
-그걸 막으려면 그전에 관리자 본인이 직접 연결을 해제하거나, 관리자의 권한을 억지로 탈취해서 해제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아.
“……그래?”
-오랫동안 관리자와 시스템의 관계를 연구했다면 접근이 쉬울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서…….
하긴 채지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녀는 코드를 완전히 익힌 지 몇 시간도 안 된 상태에다, 관리자의 공간을 본 것도 처음.
지금 수정 지시를 하는 것도 하빈이 공유하는 좁은 시야 안에서 이리저리 애쓰는 거라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그럼 그냥 관리자한테 권한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뭐.”
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관리자를 향해 아헤자르를 척 겨누었다.
“어이 관씨.”
[……!]
“내가 너무 아량이 넓어서 딱 한 번만 기회를 줄게. 순순히 말할 때 빨리 관리자직 자진해서 은퇴하고 나한테 넘겨!”
다시 회복되는 중인 관리자가 노이즈 낀 대답을 뱉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럴…… 것…… 같나?]
그의 대답과 함께 주변의 공간이 일렁였다.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지는 거다! 네가 날 공격하면, 나와 연결된 이 세계도 끝나는 거야!]
다시 기세등등해진 관리자는 기다렸다는 듯 세계를 인질로 잡고 또 협박을 시전했다.
그의 말과 함께, 공간이 조각나 만들어진 파편들이 날카로운 기세로 하빈에게 쏟아졌다. 하빈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휴, 그럴 줄 알았어 리자관! 아까부터 느낀 건데 넌 왜 협박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냐?”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아마 네가 너무 강해서……?]
아니 그전에, 지금 관리자를 협박하고 있는 건 오히려 현하빈이 아닌가?
둘 다 협박 대 협박으로 응수하는 이 상황. 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흠, 어쩔 수 없군. 관씨가 굳이굳이 억지로 끌어내려지고 싶다면야.”
마침내 하빈이 씩 웃으며 아헤자르를 휘둘렀다.
“이제 강제 은퇴 서비스로 모셔드림! 기대하시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