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26) (226/268)

226.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면 사과나무 심는 건 그렇다 치는데 미완결 작품 완결은 어디서 봐야 하나요?

“작가님! 여기 빌려주셨던 요약본이요!”

그 시각. 하빈은 오마주의 집에 찾아가 요약본을 돌려주고 있었다. 바로, 김잘잘의 칭찬이 가득 적힌 아헤자르 별책부록의 번역 요약본!

‘원래 작가님 거였으니 다시 돌려주는 게 도리에 맞지.’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요약본을 건넸다. 그걸 받아 든 오마주가 고개를 들었다.

“헉,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셨나요?”

“물론이에요! 아주아주 요긴했죠.”

이 자료 덕분에 무려 제국을 하나 먹었다. 헤자라토라는 제국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하빈은 적당히 잘 돌려 대답했다.

“평소 아헤자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깔끔히 풀렸어요.”

“저번엔 아헤자르에게 관심 없으시다고…….”

“흠흠. 관심은 없지만 궁금한 건 있었죠. 둘은 아주 달라요!”

“그, 그런가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요약본을 다시 받아드는 오마주. 그녀를 향해 하빈은 뒤이어 질문을 던졌다.

“크흠, 작가님. 그런데 뒷이야기는 계속 쓰고 계세요?”

그 말에 오마주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저 오늘부터 휴재인데요.”

[휴재?!]

“휴우우재라고요?!”

“무, 무슨 문제라도……?”

“당연히 문제죠!”

[황길때가 더는 올라오지 않는다니 큰일이다! 곧 완결을 앞두고 휴재라니!]

그들의 격한 반응에 오마주는 주춤 거실 쪽으로 물러섰다.

‘혹시 이번에도 요약집을 돌려주는 겸, 편집자 자격으로 오신 건가?’

이 와중에도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원고 독촉이라니! 다시 봐도 대단한 편집자의 재능이었다.

‘게다가 같이 오신 분은…….’

오마주는 힐끔, 하빈의 곁에 서 있는 남자를 살폈다.

‘채지석이잖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금빛 머리칼과 익숙한 체형이 뉴스에서 보던 솔라리스의 채지석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출판사 공동 대표님이라고 들었는데!’

오마주의 출판사는 지세-지석 남매가 솔라리스 이름으로 공동 인수한 출판사. 그러니 지금 상황은 갑자기 출판사 대표님이 집에 들어온 상황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전에 채남매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이기도 했지만.

‘치, 침착하자.’

무려 ‘피데스의 동생분’을 이미 편집자로 겪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집에 갑자기 ‘기만의 수호자’가 들이닥치든, 솔라리스의 채지석이 출판사 대표님이 되어 들이닥치든 이제 조금은 면역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래. 갑자기 아헤자르 같은 책 속 등장인물이 진짜로 눈앞에 튀어나오거나 책빙의가 된다거나 그런 상황도 아닌데…….’

오마주는 주눅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현하빈 편집자님,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 제가 어떻게 다음 화를 쓰겠어요? 방금 TV에서 세상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속보도 떴는데.”

“……후우, 작가님. 또 뉴스를 보셨군요.”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게 다 원고를 안 쓰고 맨날 뉴스를 먼저 보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예? 아니, 세상이 멸망한다는 뉴스가 뜨는데 어케 안 봐요……?”

“어쨌든 보신 거 아닙니까! 원고 안 쓰고 TV 보신 거죠!”

“그, 그건……!”

“후우.”

하빈이 안타깝다는 듯 재차 한숨을 쉬었다. 오마주가 찔린 낯으로 항변했다.

“그, 아니거든요! 친구들이 뉴스 좀 보라고, 세상 멸망한다고 카톡 줘서 본 거거든요!”

“쳇, 그럼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기는! 난 이대로 안 된다!]

아헤자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멸망을 앞두고 휴재라니! 그럼 완결은?! 완결은 언제 보느냐!?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완결까지 써달라고 재촉할 수는 없으려나…….]

아무래도 좋아하던 작품의 완결을 못 보고 세상이 끝나면 어쩌나 몹시 초조해진 모양.

하긴, 듣자 하니 아헤자르 말고도 세계 각국에서 난리가 났다고 들었다. 한국의 모 유명 웹툰의 완결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했던 팬들이 출판사로 쳐들어갔다거나, 일본의 모 유명한 만화도 완결 못 보고 죽는 거냐며 출판사에 무수한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거나.

‘나도 이번 명 감독님 드라마 다음 시즌 꼭 봐야 되거든?!’

하빈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

‘그거 이번에 배우들 라인업 장난 아니게 뽑혔다고 들었단 말이야! 사전제작 썰 들어보니 대박작으로 뽑혔다던데…….’

[그, 그럼 너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드라마 제작팀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

멸망 전에 한 편이라도 다음 화를 입수해야지!

그 말에 하빈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왜?’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멸망 그거 안 할 텐데, 뭐 하러?”

“네?”

하빈의 말에 오마주가 고개를 들었다.

“멸망 안 한다뇨? 다들 한다고 난리던데? 편집자님도 방금 뉴스 보셨지 않아요……?”

“네, 뉴스를 봤죠.”

여기 오는 길에 하빈과 지석 역시 현시우가 무슨 이야길 하나 틈틈이 봤다. 피데스의 마지막 기자회견을.

“근데 뉴스 속 현시우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세상은 그리 쉽게 멸망 안 한다고. 우리가 멸망 막을 거라고.”

“……!”

“막을 거니까 괜찮아요.”

그들에 대화에, 가만히 곁에 있던 채지석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안심하라는 듯 오마주를 향해 말했다.

“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막아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뭐야, 채씨. 내가 말하고 있었는데, 내 말 가로채기야?”

“미안.”

장난스럽게 채지석을 흘겨본 하빈이 덧붙였다.

“물론 갑자기 멸망을 코앞에 두니까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이 느껴진다던가, 그래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그건 찬성! 빨리 부모님한테 사랑한다고 연락드려요!”

“이, 이미 했는데요? 사실 같은 동네라…… 곧 여기로 오신대요.”

“오, 잘하셨어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음, 원래 휴재 같은 거 쉽게 못 드리는 건데, 전 세계적으로 세계 멸망설이 돌 정도의 특수 상황이니까 봐드리도록 하죠.”

“그건 원래 봐줘야 하는 거 아닐까?”

지석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휴, 그건 그렇지. 하지만 원래 한국에서는 태풍이 와도, 세계가 멸망해도 꾸역꾸역 출근하고 등교를 하는 게 원칙인걸? 난 어쩔 수 없이 이 거대한 사회의 습성을 반영했을 뿐이야.”

“…….”

“그럼 곧 작가님 부모님도 여기 오신다 하니까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빈은 주섬주섬 챙겨 온 수제전통만두를 건네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러곤 몹시 중요한 물건을 전달하는 듯 진중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자, 보세요. 이번엔 냉동만두가 아닙니다. 부모님과 함께 드세요.”

“어, 어어? 감사합니다…….”

“대신, 멸망 안 한다는 거 확정되면 바로 다음 화 쓰셔야 해요. 잘잘이가 엄청 기다리고 있거든요.”

“잘잘이요……?”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

현관문을 나서기 전, 하빈은 오마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성좌 아헤자르가 작가님 작품 광팬이랍니다.”

“……?”

“보면서 힘을 많이 얻었대요.”

“네……?”

“그럼 이번엔 진짜로 안녕히 계세요!”

“자, 잠깐, 잠깐만요……!”

슈슉.

경쾌하게 손을 흔든 하빈은 오마주가 잡을 새도 없이, 채지석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덩그러니 남은 오마주가 중얼거렸다.

“……‘아헤자르’가 내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아헤자르는 그녀가 쓰던 역사서 아이템에 언급만 되었을 뿐 이제껏 발견된 적 없는 성좌인데.

“……농담이시겠지?”

그런데 왜 농담이 아닌 것 같지. 오마주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잠깐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 * *

“에휴. 그래도 잘잘이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더 실감이 나네. 드라마 다음 시즌을 보려면 멸망이 일어나면 안 되지. 암암, 그렇고 말고.”

파지직.

오류를 비집고 이공간으로 들어온 하빈.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관리자를 족쳐야겠어. 이렇게 미적거리면 드라마 제작 기간이 길어질 거 아냐!?”

세계 멸망 앞두고 오마주 작가도 휴재를 하는데, 드라마 제작이 지연 안 될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드라마 론칭 시기는 하루하루 늦춰지고 있다는 사실!

그걸 떠올린 하빈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 관리자는 뭘 갑자기 멸망시키겠다고 혼자 난리를 쳐서는. 솔직히 50년 뒤나 25년 뒤였으면 귀찮아서 봐줬을 수도 있는데. 이젠 절대 안 봐줘! 국물도 없다!”

투덜투덜 팔짱을 끼며 이공간을 걷는 하빈. 그 말을 들은 아헤자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평생 놀겠다던 네가 멸망을 막는 데 힘을 보탠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첫 만남 때 ‘언제 올지도 모르는 멸망을 뭘 벌써부터 막냐! 백 억 좀 쓰자!’며 아헤자르를 갈궜던 하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꽤 협조적인 상황이었다.

“어어? 하빈 님?”

바로 그때, 그들을 향해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 황레몬! 잘 지냈어?”

“하빈 님!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저 멀리서 노란 머리의 레몬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97층에 가 계신 동안 갑자기 관리자의 비상점검이 풀렸잖아요! 들키지 않았어요?”

“으음.”

97층에 있던 걸 들킬 뻔하긴 했지.

“근데 꼰대가 대신 어그로를 끌었어.”

“네? 마신님이요?”

“응.”

하빈은 폰이 든 주머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글리치가 대신 관리자의 시선을 끈다고 하기에 꽤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피해 다녔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었다.

ㄱㅊ?

꼰대 선배

무슨 뜻이지?

괜찮냐고

꼰대 선배

그래 잘 따돌렸으니

걱정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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