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Our chance (5)
어두운 방.
[그러니까 세 번째의 행방은 못 찾았고, ‘기만의 수호자’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기만의 수호자’랑 ‘피데스’가 남매지간이더란 말이지?]
분노에 차 차가운 목소리로 사도들을 추궁하는 관리자.
[이 와중에 여론전도 망해서 너희가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까지 다 들통났다고?]
“…….”
항상 화를 내던 관리자였지만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가히 처음이었다. 예고된 24시간이 다 끝날 때쯤에야 씩씩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관리자는 일이 잘 안 풀렸는지 평소보다 더 열이 뻗친 상태로 보고를 받았다.
사도들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관리자는 하루 종일 글리치를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놓치는 바람에 기분이 잔뜩 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대로 고해야 했던 에라타는 진짜 죽을 맛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고를 마친 에라타는 무릎이 닳도록 꿇어앉아 사죄했다.
‘이러다 진짜로 소멸되는 거 아닌지 몰라.’
‘네 번째’를 소멸시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관리자는 재차 물었다.
[거기다 종말교에 있던 마이너 패치의 비밀금고를 털렸다고? 내가 준 아이템은?]
‘별의 서를 말하는 건가?’
에라타는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까지 현하빈에게 털렸다고 말하면 진짜로 이 자리에서 바로 소멸될 게 빤했다.
‘……이판사판이다.’
에라타는 고민 끝에 거짓말을 했다.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기만의 수호자의 정체나, 피데스와 현하빈이 남매지간이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공공연해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거라도 숨겨야지 어쩌겠는가?
그나마 ‘별의 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에 관리자는 조금 진정한 모양이었다.
[너희 모두…… 지금 당장 소멸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도들.
‘진짜로 소멸시킬 셈인가?’
관리자의 눈 밖에 난 이상 도망쳐도 방법이 없다. 이미 계약한 상태기 때문에 지구 끝까지 달아나도 관리자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소멸을 시킬 수 있으니. 그들은 거의 체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강태서를 제외하고서.
‘혹시라도 내가 소멸이 되면 그때부터 프로그램이 작동하도록 손 써 뒀긴 했는데…… 그게 잘 먹히려나?’
만의 하나를 대비해 창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손봤던 코드. 그걸 떠올리며 강태서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소멸당하면 거기에라도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다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관리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변명의 여지도 줄 생각이 없겠지만…… 다시 뽑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아쉽군.]
‘시간이 없다고?’
뉘앙스를 들어보니, 모두의 능력을 빼앗고 다시 사도를 뽑아 처음부터 훈련시키기에 부족할 일이 있는 모양.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마다 관리자는 저런 소리를 하곤 했다. 거기서 잘 하면 봐주기도 했고. 에라타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만회할 기회가 있나 보네.’
과연 어떤 프로젝트이길래 저렇게 화가 나도 참고 우리를 쓰려는 걸까? 그녀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관리자의 말이 내리꽂혔다.
[폐기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
“네?”
폐기 계획.
그 말에 사도들은 움찔했다.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강태서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관리자가 말하는 폐기 계획은 하나뿐이었다.
‘……세계를 폐기한다는 의미.’
세계 멸망 계획. 그걸 예정보다 앞당겨 실행하려는 모양.
‘대체 얼마나?’
원래 계획은 천천히 하나씩 무너뜨리는 게 관리자의 방식이라고 들었다. 준비 기간도 꽤 필요한 작업이라고 했고. 그래서 향후 20년간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앞당긴다고?
그 와중 관리자의 말이 이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기만의 수호자’도 ‘피데스’도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 더는 변수를 용납할 수 없다. ‘기만의 수호자’가 이 세계 출신인 걸 확인했으니 이제 더 기다려 줄 필요도 없지.]
“…….”
[보니까 ‘기만의 수호자’는 아직 어리고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더군? 그나마 ‘기만의 수호자’가 미처 다 성장하지 않았을 때가 승산이 더 높다. 그래서 비상 점검 기간 동안 폐기 시스템을 제대로 손봤지. 당장 작동해도 무리가 없다.]
“그럼 언제부터…… 폐기 계획을 실행하실 겁니까?”
관리자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니 ‘당장’이라고 말은 해도 그게 1, 2년 뒤일 수도 있다. 강태서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하지만 답은 곧바로 떨어졌다.
[지금부터.]
“…….”
[지금부터 이 세계를 폐기할 예정이다.]
세계 폐기, 아니 세계 멸망이 20년은 더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 * *
띠링.
[경고. 지금부터 우wn_2983410rewtkl-지구-#10420 의 폐기가 시작됩니다.]
갑자기 전 세계 눈앞에 뜬 알림창.
“……뭐지?”
현시우와 머리를 맞대고 ‘별의 서’를 해독하던 채지세가 알림창을 발견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뭘 폐기한다는 거야?”
그 와중에도 ‘지구’라는 단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은 아니겠지. 채지세가 입술을 깨무는 순간이었다.
“이건……!”
혼란스러운 와중, 그 상황을 겪어 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회귀자, 현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거 저 뭔지 압니다……! 하지만 이게 왜 갑자기…….”
심각하게 낯을 굳히는 현시우. 그 얼굴을 본 채지세는 묵묵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현시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알림창은,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고입니다.”
“……뭐라고요?”
설마 하는 가정이 확신에 가깝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있는 집무실로 보좌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피, 피데스 님!”
“네.”
“이번에도 에라타 측에서 경고 영상을 올렸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뜬 알림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게이트를 닮은 검은 구멍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하늘과 바다, 땅을 가리지 않고 생성되고 있다고 하는데…….”
숨 고를 틈 없이 와다닥 말을 뱉던 보좌관. 그걸 들으며 현시우는 노트북 화면을 켰다. 에라타가 던진 메시지는 간결했다.
-안녕, 여러분!
평소와 같은 구도의 영상이었지만, 이번엔 짜증 날 정도로 밝은 목소리가 아니라는 게 의외였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돌아가면 꽤 신이 나서 주절거리거나, 억지로 신난 척이라도 하던 에라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묘하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면 착각일까. 여전히 밝은 목소리기는 했지만 조소나 자조에 가깝게 느껴지는 태도.
-그러게 내가 경고했잖아. 기만의 수호자를 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한다니까? 내 말을 듣지 그랬어? 하하!
-……어쨌든 이제부터 세상이 끝장날 테니까 잘 봐 두라고.
-나? 솔직히 난 어찌 되든 좋아. 난 애초에 이 X 같은 세상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 많지? 그럼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될지도 모르니까 파티나 하고 있어. 나도 파티를 할 테니까.
영상은 그게 끝이었다. 지세가 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알고 있었던 척하는 걸까요?”
“둘 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멸망이 올 줄은 알았겠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겠죠.”
현시우 본인처럼 말이다.
‘언젠가 올 줄은 알았지만 이게 이렇게 당겨지다니.’
회귀한 현시우와 이리저리 깽판 치는 현하빈 덕분에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빠르게 히든피스를 모았고, 빠르게 성장했다.
이대로면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승산이 있겠다, 하고 생각한 순간 관리자도 최후의 수를 꺼내든 것이다.
“예전부터 저쪽이 머리를 잘 쓰는 편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쓸 수 있는 패 중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군요.”
시간이 흐를수록 현하빈을 감당하긴 더 어려워질 테니 지금 무리를 해서라도 다 엎어버리겠다는 셈인가?
하긴 회귀 전에는 현하빈이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로 관리자를 족쳤으니, 몇 년 뒤 족쳐질 바에 먼저 족치겠다 마음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현하빈은 안 족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 발 저려서 멸망을 일으키다니.’
관리자는 명줄 빨리 끝내려고 스스로 재촉하는 게 취미인가?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이길 때의 가정이지.]
‘……그렇죠. 사실 멸망 같은 거 안 일어나는 편이 훨씬 나은데.’
전쟁이란 건 아무리 승리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는 거다. 현시우는 상념을 털어내고 ‘별의 서’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대부분을 해독해서 다행입니다.”
‘회귀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성과야.’
당시에는 소실되어 구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이걸 써먹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아직 비어 있는 나머지가 있어서…….”
지세가 별의 서를 이리저리 짜 맞추며 빈 공간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파지직!
그들의 곁으로 슈우욱, 하고 오류 공간이 열렸다.
“다들 뭐 해? 우리 왔어!”
“갑자기 폐기라고 떴는데, 여기 상황 괜찮은 거야?”
동시에 말을 하며 들어오는 두 인영.
그들은 현하빈과 채지석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현하빈이 책상 위에 놓인 ‘별의 서’를 보고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우수수 꺼냈다.
“자! 여기 나머지. 이쪽 건 픽셔 제국한테 털어왔고, 저쪽 건 헤자라토 제국에게서 털어왔어!”
“털어왔다고? 역시 강제로 협박을……?”
“에헤이! 강제라니. 나 그렇게 꽉 막히지 않았어. 난 아주 합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빌려왔다고. 그렇지, 잘잘아?”
[……빌린 건 맞다만.]
아헤자르는 하빈이 헤자라토 제국에게서 ‘별의 서’를 가져오던 장면을 떠올렸다.
‘다들 어? 아헤자르라는 이름이 우스워 보여? 내가 이 종이 몇 장 빌리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 그건 아니지만…….’
‘후우, 제국 내놓으라고 하려다가 종이 몇 장 내놓으라는 걸로 바꿨는데 이것마저 못 들어준다니. 그것도 그냥 달라는 게 아니라 빌려달라는 건데…….’
‘…….’
‘아이고오, 아헤자르 이름 다 죽었다. 아이고. 제국법에 쓰여 있는 아헤자르의 지위는 어디로 간 거람!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그냥 다시 한번 제국 확 먹어버려?’
‘……드, 드리겠습니다!’
결국 눈치를 보던 헤자라토 측 인사들은 하빈에게 별의 서를 ‘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빌려 온 거면 돌려줘야 하잖아? 언제까지 돌려주기로 정했어?”
“어? 어…… 그렇네?”
하빈은 뒤늦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해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언제 돌려주는지는 안 정했어!”
그럼 설마, 영구 임대를 해도 되는 건가…….
‘빌려준 쪽도 이 정도면 돌려받을 생각조차 못 한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잘 받았으니 잘 된 거 아니겠어?
현시우는 슬그머니 별의 서를 챙기며, 마음속으로 헤자라토 제국에게 애도를 표했다.
“나머지를 해독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금방 이것들도 해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시우의 말에 지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데 현시우 씨는 지금 이 상황에 기자회견 하러 가야 하지 않아요?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뭐어? 세상이 멸망한다고?”
그들의 대화에 하빈이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외치는 하빈.
“멸망? 며어어얼마앙?!”
누구 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