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Our chance (3)
사실 전날 밤.
하빈이 꺼냈던 책은 바로-
“짜잔, 오마주 작가님께 받은 ‘아우라이던 역사서’의 별책부록……의 한글판 요약정리본 버전이야!”
[별책부록?! 그건 내 칭찬만 가득하다고 안 가져오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치. 그래서 이번에도 김잘잘의 라떼라떼 스토리나 있겠거니 싶어 안 가져올까 싶었는데!”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오마주 집에 들렀을 때, 다음 화 작성을 기다리는 동안 이것저것 설정집을 읽다가 발견한 요약본.
처음에는 김잘잘의 잘나갈 때 이야기거니 싶어 흥미가 없었는데 막상 읽고 보니 그 내용이 꽤 놀라웠다.
“무려 김잘잘이 헤자라토 제국의 진짜 주인이라고 되어 있더라니까? 초대 황제가 자신의 은인이자 영웅이자 위대한 성좌인 아헤자르에게 바치겠다며 만든 나라래.”
[오, 그렇다! 내가 말한 적 있잖느냐! 다들 나를 위해 나라도 세우려 하고 여러 자리에 앉히려 했는데 내가 거절했다고.]
“아니 근데 헤자라토 제국인지 기억을 못 했어? 대놓고 아‘헤자르’, ‘헤자라’토. 이렇게 이름도 비슷한데?!”
[그, 그게 너무 오래되다 보니……. 그리고 애초에 거절한 것이라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 어쨌든 이제 알았으니 된 거 아니겠어? 세상에나. 김잘잘도 쓰려면 쓸 데가 있다니까.”
잘하면 손 안 대고 제국 하나 꿀꺽할 수 있겠네. 하빈은 후후,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온 지금 상황.
아헤자르를 위풍당당하게 꺼내든 하빈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웅성거렸다.
“저, 전설 속 아헤자르의 검과 묘사가 일치합니다.”
“저 검! 우아한 하얀 칼날과 푸른 보석, 그림으로 남겨진 모습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티자르 황태자는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모두 진정하십시오. 저쪽이…… 진짜 아헤자르인지 아직 밝혀진 것도 없잖습니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풍겨 나오는 기운부터가…….”
물론 헤자라토 제국에서 이런 경우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내가 바로 아헤자르다!’, ‘제국을 내놔라!’라고 입을 털며 황위를 노리려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모두 가짜로 밝혀져 처형당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하빈이 검을 뽑아 든 순간부터 회담장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위압감.
반짝이는 아헤자르의 검신은 그동안 위조품이랍시고 가져온 가짜들이나 황궁에 그려진 그림, 어떤 문헌에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찬란했다.
“…….”
입 하나 여는 것조차 어려웠기에 그들은 소곤소곤 겨우 의견을 주고받는 게 다였다.
“아니 왜 다들 말을 안 하고 계셔?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이어지는 침묵에 하빈이 건들건들 입을 열었다. 그녀가 티자르 황태자를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갑자기 황위를 내놓으시려니 너무 아까워서 그러시나?”
“…….”
이제는 거의 잊히다시피 한 규칙이지만 헤자라토 제국의 초대 황제는 국법의 첫 번째 줄에 이렇게 썼다.
-어느 누가 황제가 되든, 헤자라토 제국은 황제보다도 아헤자르의 지위를 우선한다.
그걸 떠올린 황태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하빈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제 회담장에 참석했을 때는 존재감이 흐릿하다 못해 없는 정도였는데.
비록 용신의 일행이라고 소개하며 들어오긴 했지만, 황금용과 황금 머리의 사제가 더 주목을 받았다.
그나마 저 검은 머리의 사제가 나선 시점은 마족들을 옆자리에 앉히던 행동뿐. 심지어 거기서도 딱히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까지만 해도 가볍고 편안한 인상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해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무서웠다.
……그래, 무서웠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성좌의 존재감이라는 건가?’
마왕을 눈앞에 두고서도 이 정도로 소름이 끼치지는 않았는데.
타고난 강심장이었기에 마왕의 앞에 대고 ‘회담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티자르. 그러나 그는 지금 살면서 처음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잘못 대답했다간 상대가 아헤자르이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회담장, 아니 그냥 대륙 자체가 순식간에 소멸당할 수도 있겠다는 본능적인 직감.
한편, 하빈은 아헤자르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잘잘아, 너 원래 이 시대 때는 인간형으로 다녔댔지?’
[그랬지?]
‘이 검이 바로 네 트레이드마크였고.’
[…….]
그랬다.
지금 이 시대, ‘아우라이던’은 아헤자르가 인간형으로 활동하던 시대.
‘별책부록’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아헤자르는 이 시대 때 검의 모양으로 존재한 게 아니었다. 주 무기가 이렇게 생긴 검이었을 뿐.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하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전설 속 무신 아헤자르?”
“…….”
[…….]
어색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문 하빈과 아헤자르. 하빈은 이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까지 설명하고 앉아 있어야 하지? 내가 아헤자르니까, 제국 내놔.”
“……!”
“……!!”
[자, 잠깐! 잠깐!]
졸지에 자신의 이름값과 제국(?)까지 뺏긴 아헤자르는 저도 모르게 하빈에게 반문했다.
[내, 내 사칭이라니? 아무리 매관매직을 자주 썼다지만 내 사칭이라니이!]
‘에엥, 사칭이라니? 사칭 아니지. 잘잘이 네가 내 성좌인 건 맞잖아? 그럼 내가 진정한 후계자라고. 네 스킬도 다 나 줬잖아?’
[그렇지만…….]
‘어허? 김잘잘, 설마 제국을 눈앞에 두니까 탐나는 거야? 원래 그런 자리 싫다고 거절했다면서? 네가 안 주운 거 내가 줍겠다는데, 왜?’
[그게 문제란 거다! 내가 거절한 자리를 내 이름으로 냉큼 먹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아헤자르에게 하빈이 안타깝단 목소리로 말했다.
‘에효, 잘잘아……. 그동안 네가 쓴 캐시 값이 얼마인지 아니? 너의 이름값과 헤자라토 제국이라도 가져와서 갚아야 할 거 아냐? 언젠가 갚겠다며? 그리고 봉인 풀어준 게 누구지? 평생 상자 속에 처박혀 굴러다닌 거 꺼내준 게 누구?’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카카페 캐시를 제국으로 갚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해 보니 아헤자르가 직접 지불할 일은 없을 테니 나쁘지 않은 방식이긴 한데.
‘이래서 잘 키운 카카페 캐시, 열 나라 안 부럽다. 그런 거지!’
그동안 네풀릭스도 카카페도 결제 못 한다고 구박했던 아헤자르에게 제국이 있었을 줄이야!
하빈이 팔짱을 끼며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여전히 혼란을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대체 이 회담에 무슨 이런 일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회담에 갑자기 마왕들이 나타나지 않나, 이젠 갑자기 아헤자르의 등장으로 황실의 존폐가 위기에 처했다!
티자르 황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원래 아헤자르 님의 성정은, 정치에 깊게 개입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들었어.’
그래서 제국 전체를 준대도 거절하고 훌쩍 떠났다고 들었다. 헤자라토 외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고위 관직이나 영지, 나라를 준다고 해도 계속 거절해 왔다고.
‘그랬던 분이 갑자기 여기서 정체를 드러낸 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티자르 황태자는 여전히 자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하빈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아마 진짜로 황위를 내놓으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 거였다면 처음부터 정식으로 황궁을 찾았을 테니까.’
혹은 회담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밝혔겠지.
굳이 이 시점에 밝힌 것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오, 역시 황태자라 그런가.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데?”
하빈이 중얼거렸다. 다짜고짜 ‘아헤자르라니 내가 그걸 믿을 줄 알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는 식으로 날뛰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정중히 원하는 걸 물어보는 황태자.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 잘 됐지 뭐.’
하빈은 회담장에 뿌렸던 기운을 갈무리하고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산뜻한 목소리로 서두를 열었다.
“좋아,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근데 난 일단 마계를 회담에 참여시킨 다음 계속하고 싶은데. 마계 참석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 다시 손?”
“…….”
“…….”
* * *
[경고! 지금 접속한 모드는 관리자 모드입니다.]
[경고! 접속자의 격이 현저히 낮습니다! 접속 시간에 비례하여 ‘존재성’이 영구적으로 손상됩니다.]
띠링띠링.
주변을 채우는 불길한 검붉은색 알림들. 그리고 귀를 긁는 날카로운 경고음들까지.
강태서는 그것들을 무시하며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게에엥!(인간, 밥 먹어라!)
사료를 먹다 말고 걱정이 되었는지 강태서의 주위를 맴도는 까망이.
그도 그럴 게, 메일을 받은 이후부터 태서는 제대로 먹지 않고 관리자 모드를 해킹하는 것에만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쉽게 풀리지 않는 듯 태서의 낯은 어두웠다.
‘……내가 ‘세 번째’만큼 이 분야에 특화되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홀로 열심히 연구했지만, 독학으로 도달하기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껏 인류가 개발해온 코드와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고, ‘사도’들에게 지급되는 코드와는 또 다른, 관리자의 코드들.
‘하지만 그걸 따질 시간이 없어.’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비상 점검 기간이라 관리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 세 번째가 실종되어 감시망이 느슨해진 틈.
그리고 ‘현하빈’으로 추측되는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치트 코드를 받은 지금.
여기서 해내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경고! 존재성이 위험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계속 진행하지 않는 것을 권장.]
“…….”
존재성.
그게 어떤 스탯인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게 다 깎이면 죽는다. 아니, 죽는 것 이상일지 모른다. 존재의 반대말은 무존재, 소멸이니까.
그럼 천국도 지옥도, 혹은 미래도 과거도 없이 그냥 완전히 없어지는 걸까? 물론 죽음 뒤의 세계 같은 걸 바란 적도 없지만.
남은 수치가 다 깎이기 전에 해낼 수 있을까.
‘아주 잠시라도, 시스템의 권한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럼 관리자가 최악의 방법을 쓰더라도 맞설 수가 하나 생길 텐데.
5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오며 그 방법만을 찾고 찾았다. 지금, 이번이야말로 기회였다.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이 빛을 볼 마지막 순간이 머지않았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버린 수많은 사람과 신념,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에게 코드를 넘겨준 그 애를 위해서라도.
상념의 끝에 마침내 마지막 한 줄을 친 강태서가 ‘실행’ 버튼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알림창이 위기를 감지한 듯 지지직거렸다.
[!!알립니다!!]
[비상 점검 모드가 곧 풀립니다.]
“……!”
[……관리자 복귀까지 남은 시간 : 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