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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19) (219/268)

219. Our chance (2)

다른 사람 스킬을 카피하는 기술이 있냐니.

이건 아무리 봐도 채지석의 ‘찬란의 답습’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하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띠링띠링 알림이 떴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런 거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된다고, 대체 저쪽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모른 척하라고 외칩니다!]

잽싸게 떠오르는 메시지 덕분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지석은 멈칫했다.

원래 언젠가 솔직히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말하게 될 줄이야. 이 와중에도 하빈은 지석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짧은 고민을 끝낸 지석은 결단을 내렸다. 나름대로 동요를 숨겨 보려고 부러 더 유쾌하게 반문했다.

“너 진짜 탐정이야? 어떻게 알았어?”

“…….”

이러면 현하빈은 평소처럼 ‘그거야 다 아는 수가 있지!’라든가, ‘알면 다쳐!’로 받아칠 것 같았는데. 오히려 하빈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잠깐 머뭇거렸다.

“오……. 진짜 있었구나. 대답해 줘서 고마워. 사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어서 물어보면서도 좀 미안했는데.”

‘언제는 그런 거 생각하고 물어봤었냐?’라고 습관처럼 되받아치려던 지석은 입을 다물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채지석을 배려해 준 물음이었던 모양.

그러나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난리를 쳤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예언 능력 알아낼 때는 묶어놓고 협박해서 알아내지 않았냐며, 어차피 답정너 아니냐고 인상을 씁니다!]

“뭐야? 반짝이 답정너라는 단어도 알아?”

[답정너가 뭐냐?]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해’라는 뜻의 신조어란다, 잘잘.”

[오, 그런 거라면 현하빈 너는 답정너가 맞지 않느냐? ‘어차피 답을 뱉어내게 될 테니까 너는 말로 할 때 순순히 대답해’라는 느낌으로 협박을 하잖느냐?]

“아잇! 뭐라는 거야! 그런 적 없거든? 그리고 답정너는 원래 그런 뜻이 아니라고!”

“…….”

아헤자르와 툭탁툭탁 말싸움을 하던 하빈. 그녀가 휙 하고 채지석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이번엔 협박 느낌 없었지? 그렇지?”

“……없었어.”

“이거 봐! 난 순하게 대답을 요구한다고.”

[순순히 대답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거겠지…….]

“그거나 그거나!”

[진심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나저나 채지석의 스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냐며 끼어듭니다.]

“오……. 그거 궁금할 법하지.”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누군가의 스킬을 카피하는 스킬’이라는 게 드러나면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정보가 샜는지 상당히 궁금할 것이다. 하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이 명탐정의 머리로 미리부터 감을 잡고 있었고!”

[진짜냐?]

“흠흠. 물론 물증은 하나도 없긴 했는데…… 사실 결정적인 건,”

하빈은 끄응, 하는 얼굴로 저기 멀리 보이는 종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그녀가 가늘게 눈을 떴다.

“……현시우가 그 말을 하더라고.”

“피데스 님이?”

“응.”

현시우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러니까 피데스 정체 알고 탈탈 털리다 헤어질 때. 그때 현시우는 하빈에게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카피 스킬 능력자, 그거 채지석 맞아.’

‘? 갑자기?’

‘네가 찾고 있는 정보 아니야?’

‘…….’

회상을 마친 하빈은 짜증 난다는 듯 팔짱을 꼈다.

“하여튼, 현시우 그놈은 대체 남의 비밀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알고 다닌대? 내가 기만의 수호자라는 것도, 채씨가 카피 스킬 능력자라는 것도!”

“그러게.”

채지석의 낯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무리 피데스 님이라지만 이건 내가 누나한테밖에 말한 적 없는 정보인데. 어떻게 안 거지?”

“내가 보기에 이 녀석 아주 사생활 침해랑 정보 캐내기 상습범이야, 아주! 어? 사람들한테는 겉으로 젠틀한 척하더니 뒷조사 만렙이네!”

사실 현시우는 회귀자여서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가 들었다면 상당히 억울했을 발언. 채지석이 추측을 덧붙였다.

“어쩌면 정보와 관계된 특수 스킬을 더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

“흐음, 그런 건가?”

고개를 기울인 하빈이 지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카피 스킬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 혹시 내 허락을 받아야 빌릴 수 있고 그런 거야?”

“그건 아닌데.”

“헉, 그럼 지금도 바로 스킬 빌릴 수 있어?”

“있긴 해. 하지만…… 횟수 제한이 있어.”

“역시.”

세상에 쉬운 거 하나 없다니까? 대단한 스킬이니만큼 제한도 많은 모양. 어깨를 으쓱한 하빈이 주위를 살살 둘러보았다.

“뭐 찾아? 방음 장치는 이미 켜뒀거든?”

평소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는 게 하빈의 방식이다 보니, 지붕 위에 앉았을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둔 채지석. 그 말을 들은 하빈이 반색했다.

“좋아! 역시 채씨야. 그럼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해도 되겠군.”

“무슨 작전?”

“내일 회담장에서 할 일들이랑, 헤자라토를 털어먹을 방법이랑, 채씨의 스킬에 관한 거랑…… 다음 염단 돈가스는 어떻게 공수할지 같은 거!”

하빈이 신이 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쑤욱 꺼냈다.

[잠깐? 그건?! 그걸 언제 챙겼느냐?!]

익숙한 모양새의 아이템에 아헤자르가 놀란 듯 침음을 삼켰다. 하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일 내가 사용할 방법은 바로 이거거든.”

* * *

다음날, 각국의 대표들이 자리한 회담장.

“마계 대표는 이쪽에 앉아 주십시오.”

“……!”

“우리 보고 여기 앉으라고?”

다른 사람들이 앉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한 테이블. 그쪽으로 안내된 상황에 크릭샤가 얼굴을 굳혔다. 곁에 있던 시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게, 그…… 아직 회담에 참여하실 자격이 있는지 확정되지 않았고…… 다른 분들이 걱정하시어…….”

대놓고 마법 결계가 쳐져 있고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구석 테이블. 거기 앉아서 대기하라니?

‘겨우 이깟 걸로 마왕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크릭샤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프시네 역시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통보 없이 온 건 우리 측 잘못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회담 참석이 확정되면 자리를 옮겨주실 거죠?”

“네? 넷. 물론입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의 안내를 따라 이프시네와 글리치가 착석했다. 하빈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애들을 저런 데 앉히다니!’

이프시네가 만지작거리는 서류를 본 그녀의 언짢음이 깊어졌다. 밤새 네풀릭스를 보던 현하빈의 곁에서 혹시나 회담에 참가할지 모른다며 들뜬 표정으로 서류를 다시 검토하던 이프시네.

‘회담에 참여 정도는 시켜 주고 싶은데.’

기껏 준비한 과제를 제출도 못 하고 끝나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온 이상 최소한의 발언권은 마련해 주고 싶었다.

하빈은 슬쩍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각서, 기억하죠?’

어제 딸 찾아준 대가로 쓴 각서! 마계 참여에 동의 표한다고 하라고!

‘물론이죠.’

티 안 나게 고개를 슬쩍 끄덕이는 공작. 그녀의 뒤에는 이번에 찾은 딸, 릴리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아직 공작 외의 다른 사람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아 여전히 가발을 쓴 ‘비서 찰리’의 모습으로 있긴 했지만.

[주인공을 이렇게 오래 볼 수 있다니!]

아헤자르는 맞은편에 앉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

[빨리 끝나고 사인 받자.]

‘엥, 공작의 사인으로는 안 될까? 이미 받아 뒀는데.’

[언제?!]

‘각서 쓸 때 밑에 썼었잖아.’

[그건 각서용 서명이지 않느냐! 그거 말고 인벤토리에 챙겨온 ‘황길때’ 단행본! 단행본에 릴리와 공작의 사인을 다시 받아라!]

‘엥? 거기에 받겠다고? 뭐라고 하면서 받게? 백지에 사인하라고 하면 이상하게 보일 텐데. 혹시나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면 어떡해?’

[그, 그건…… 그건 확실히 좀 곤란하겠군.]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 회담의 중재자인 티자르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참석하신 것 같으니, 첫 번째 안건인 ‘마계를 회담에 참여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마계를 대륙회담에 참여시킬 것인가.

그 주제에 대한 논의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대로면 반대파가 더 많은데?’

체칼라다임은 찬성, 픽셔 제국도 찬성.

이 대륙의 가장 큰 나라 중 두 개가 찬성했으나 마지막 복병이자 가장 큰 제국인 ‘헤자라토’가 반대를 던진 것이다.

“마계와의 회담은 다음에 다시 여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하려던 대륙회담은 대륙회담대로 마무리하고, 다음에 마계를 위한 회담을 따로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크흠, 그 말도 맞군요.”

헤자라토의 눈치를 보던 몇몇 약소왕국도 그에 따라 반대로 돌아섰다.

하빈은 슬쩍 이프시네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애써 침착한 티를 내고 있지만 아쉬운 얼굴로 서류를 집어넣는 이프시네.

그리고 당장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려던 걸 현하빈의 눈치를 살피며 모른 척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크릭샤.

“으음…….”

물론 ‘마계를 위한 회담을 다음에 열자’라는 제안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마계는 갑자기 회담장에 들어온 것이기도 하고, 티자르 황태자 역시 마계와의 대면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서 마주하는 게 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맞는다고 판단한 모양.

마계가 진짜로 ‘평화적인’ 대면을 원한다면 한 번쯤은 굽히고 들어오라는 무언의 압박과 떠보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 이해는 가. 이해는 가는데.’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단 말이지.”

“예?”

“나 오늘 집 가려고 했는데, 다음 회담까지 언제 기다리냐고.”

하빈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공작도, 황태자도 하빈을 돌아보았다.

하빈은 끄응, 하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이래서 내가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결국 써야겠네?”

‘현하빈, 메테오는 아니지? 진짜 다른 방법 맞지?’

‘아, 어제 이야기한 거 못 들었어? 내가 쓸 방법은 이거라니까!’

하빈은 헤자라토 왕국의 대표, 티자르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님. 혹시 ‘헤자라토’ 제국의 이름이, 어디서 따온 이름인지 아세요?”

“갑자기 무슨…….”

한창 진행되던 논의 중에 끼어든 현하빈의 발언. 회의와 관련 없는 말에 황태자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겁니까?”

“아뇨. 전 진지한데요. 혹시 여기서 헤자라토 제국의 기원이 뭔지 아시는 분!”

“…….”

“없나요?”

물론 없을 리는 없었다. 저기 상석에 앉은 티자르 황태자는 황족으로서 제국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질리도록 배웠을 테니 말이다. 그 주변에 있는 가신들도 마찬가지겠지.

하빈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헤자라토’라는 제국의 이름은 원래 ‘헤자르 데 아토’라는 말에서 따온 것. ‘헤자르를 위한 나라’.”

“…….”

“원래는 영웅 ‘아헤자르’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제국이라면서요?”

“……그래서 무슨 이야길 하고 싶으신 겁니까?”

“바로 이거죠!”

하빈은 씨익 웃으며 아헤자르를 검집에서 쑥 뽑았다. 그러자 뽑혀 나온 새하얀 검신과 푸른 보석이 찬란한 빛을 뿌렸다.

위풍당당하게 아헤자르를 치켜든 하빈이 마침내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짜잔! 여러분! 이게 뭘까-요?”

“저저, 저저저, 저건!”

“저저, 저저! 어떻, 게!”

그 광경을 본 헤자라토 관계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 거품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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