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6)
“픽셔 제국을…… 오늘 밤에 턴다고?”
그들의 반응에 하빈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응? 당연하지.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 된단 말이야. 염단 돈가스도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작가 오마주에게 전해 듣기로, 이 시대의 대륙회담은 몇 날 며칠씩 오래 끌기도 한다 들었다. 다들 여독을 풀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가며 오래오래 회의를 한다나.
“무엇보다 ‘원작’에 따르면 이 회담은 무려 2주를 끌더라고, 2주!”
‘황길때’에 의하면 대륙회담은 2주가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회담하는 건 하빈의 방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난 언제나 하루 컷을 외치던 사람이라고!”
“그렇다고 픽셔 제국을 하루 만에 턴다니…….”
황당하단 지석의 말에 하빈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하, 이것도 봐준 거거든? 맘 같아선 하루 만에 픽셔랑 헤자라토 제국을 둘 다 털고 이 회담을 접수하는 것도…….”
“역시 마신님이십니다!”
하빈의 장대한 포부에 크릭샤가 반색한 얼굴을 했다.
“역시 마신님도 그 무례한 놈들을 무력으로 칠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입죠? 저도 거들겠습니다!”
팔을 걷어붙이는 광경을 보아하니, 오늘 회담장에서 들은 뒷담이 꽤나 기분 나빴던 모양. 크릭샤는 물 만난 듯 신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인원이 적어서 마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마신님의 힘이라면 분명 이 대륙을 접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죠. 오늘 혓바닥을 놀리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벌써 복수할 생각을 하는지 음흉한 웃음을 짓는 크릭샤. 그 말에 이프시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가 처음 계획했던 동맹이나 협정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죠? 회담 계획 다 세워 왔는데…….”
제대로 된 배상을 하고, 앞으로의 군사 협조에 대해 논하는 방향의 제안서들. 서류 뭉치를 팔락팔락 넘기는 이프시네를 본 지석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꽤 체계적으로 준비하셨네요?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해본 느낌이 아닌데.”
“아,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다른 층이랑도 몇 번 회담을 했었어요! 평화적인 방법으로 협정을 맺은 곳도 많답니다.”
이프시네가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층은 애초에 ‘마계’에 대한 적대심이 없는 곳이 많아서 설득하기 수월했어요. 마계의 특산품을 서로 교류하는 거랑, 유사시에 서로 군사를 빌려주는 협약에 다들 동의하던걸요.”
이프시네가 신난 얼굴로 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마왕군 말고도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동맹군들이 늘었답니다!”
“오, 그건 정말 괜찮네. 잘했어.”
“헤헤, 감사합니다!”
하빈의 칭찬에 이프시네가 기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또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회담에 들어가기도 전에 거부당한 것 같아서…….”
“회담? 그건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프시네를 격려한 하빈. 그녀가 리베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했잖아, 오늘 픽셔 제국을 털 거라고. 안그래도 우린 이미 체칼라다임을 털고 왔어! 용신님의 가호로 말이지.”
-삐이이!
리베의 불꽃쇼와 하빈의 차력쇼로 체칼라다임 인원들은 이미 이쪽으로 껌뻑 넘어왔다. 하빈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제 그 왕이랑 대신들, 내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걸?”
“현하빈, 메주는 진짜로 콩으로 쑤는 거…….”
“아잇, 진짜! 어쨌든 말이 그런 거라고 말이!”
지석을 콕콕 찌른 하빈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러니 체칼라다임 쪽은 문제없을 거야. 마계가 회담에 참여하는 거, 호구 왕, 아아니…… 호그누 왕도 동의하기로 했어!”
하빈은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호그누 국왕은 하빈 일행에게 의견을 구했었다.
‘용신님께서는 마계의 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어, 그건 말이죠…….’
하빈은 진중한 표정으로 리베를 돌아보았다. 말을 맞춰둔 대로, 리베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삐이. 삐이 삐이이. 삐삐, 삐.
‘뭐, 뭐라고 하시는 거죠?’
‘후우,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세요.’
용신의 왼팔을 자처한 하빈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안타깝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모두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 하시는군요. 언제까지고 마계를 배척하고 덮어두기만 해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가 될 테니, 오래된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이 기회를 발판삼아 체칼라다임의 국익을 챙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길게 말씀하신 건가요? 우는 건 짧게 우셨는데.’
‘어허! 용언(龍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또 의심하는 겁니까?’
-삐이?! 삐이이?!!!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일단 회담장에 마족들을 들여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 차분히 생각하는 게 좋다는 거죠.’
‘과연 그렇군요!’
그렇게 체칼라다임은 마계의 회담 참석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다시 돌이켜 봐도 입을 잘 털었다며, 사이비 교주가 따로 없다고 칭찬합니다!]
“뭐야? 저거 칭찬 맞아? 난 사이비가 천직인 게 아니라 사이비를 터는 게 천직이라고!”
“근데 교주 경력이 벌써 두 번째잖아……?”
종말교에서 한 번, 이번엔 용신교로 또 한 번. 무려 경력직(?) 가짜 종교 지도자 현하빈. 그 사실을 지적하자 하빈이 발끈했다.
“용신교는 교주 자리 안 했어! 교주는 황금 머리의 채씨야! 난 그냥 용신의 왼팔을 자처했을 뿐이라구.”
하빈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프시네도 끼어들었다.
“애초에 하빈 님은 저희 마신이신데요? 교주가 아니라 그냥 신이신데…….”
사실 종교의 우두머리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마신 지위를 지켜도 된다. 그걸 떠올린 지석이 덧붙였다.
“이쯤 되면 일단 뭔가의 우두머리를 하는 게 천직인가 보다.”
“이번엔 우두머리 아니고 왼팔이라니까 그러네? 허, 참.”
게다가 그동안 하빈이 맡은 역할은 아주 다양했다. 무고한 알바생, 지나가던 주민, 명탐정, 편집자까지!
[뭘 해도 입을 잘 털었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수틀리거나 입으로 설득 안 되면, 아헤자르 휘두르는 걸로 다 잘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크흠, 어쨌든 오늘 밤엔 픽셔 제국의 단델리온 공작을 만날 거야.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야지!”
아헤자르를 야구 배트 모양으로 만들어 손에 탁탁 내려친 하빈이 후후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지었다. 크릭샤가 신이 나 끼어들었다.
“언제 어떻게 만날 예정입니까? 지금 바로 출발할 거면 저도 무기를 준비할까요?”
“음? 무기를 왜 준비해?”
“당장 전쟁하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크릭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법진들을 펼쳤다.
“저는 인간들을 칠 방법을 백여 가지 정도 준비했는뎁쇼. 마물 소환진도 그려 오고 켈베로스도 대기시켜 놨는데……!”
그새 신이 나서 인간들을 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 크릭샤의 말에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넣어 둬, 넣어 둬. 아니 왜 이런 일에 우리 귀여운 켈베를 소환하려고 그래? 그거 강아지 학대야. 학대!”
현하빈 앞에서 끼잉 꼬리를 말며 개껌을 조르던 켈베로스의 모습을 떠올린 하빈이 쏘아붙였다. 크릭샤는 시무룩한 표정을 숨기며 다시 소환진을 갈무리했다.
‘켈베는 마왕군 정예 소환수인데…….’
매번 개껌 받아먹고 재롱 피우는 데 익숙해져서 켈베로스 이미지가 말이 아니었다. 크릭샤가 주섬주섬 소환진을 회수하는 동안, 하빈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순순히 회담 참여에 협조해 달라고 하고, 별의 서도 내놓으라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생각하자!”
일단 요구하는 걸 달라고 이야기는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원래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말로 해야 하는 거랬어. 달라는 말을 해야지.”
“근데 달라고 해도 줄까?”
‘설마 협박 같은 거 하려는 거 아니겠지? 아니면 정말 무력으로 단델리온 공작을 진압한다거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현하빈을 보는 채지석. 곁에 있던 크릭샤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거절하면 명분을 가지고 쳐들어가겠단 것이군요! 세상 누가 그걸 냉큼 수락하겠습니까? 아주 완벽하고 음흉한 계획입니다!”
다짜고짜 마계를 회담에 끼워달라 하고, 별의 서도 내놓으라 하면 당연히 공작이 거절할 것. 그러면 그때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다니, 전쟁이다!’하고 치려는 건가?
그러나 크릭샤의 말을 들은 하빈이 오히려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어? 지금 내가 공작 하나 구워삶지 못할 걸로 보여? 다들 날 어떻게 보는 거야?! 두고 봐! 오늘 밤 안에 전쟁 일으킬 필요도 없이 말만으로 픽셔 제국을 털어먹고 올 테니까!”
“진짜 무력 없이 말만으로 털 셈이신 건가요, 마신님?”
“……그게 말이 되나? 인간들이 얼마나 약은 족속들인데.”
경외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이프시네와, 구석에서 뚱하게 끼어드는 글리치. 그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빈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다들 딱, 기다리고 내가 하는 걸 잘 보라구! ……물론 수틀리면 ‘정말로 불가피하고 어쩔 수 없이 아주 유감스러운’ 무력을 쪼오금 행사할 수도 있지만!”
“…….”
“근데 네가 무력을 ‘쪼오금’만 행사해도 그거 엄청 큰 거 아냐?”
스탯이 21.4억이라며…….
“아이 참 채씨, 낄끼빠빠해! 뭐 그렇게 말이 많아?”
“……그래.”
* * *
그렇게 그들은 단델리온 공작의 침실에 바로 잠입했다.
일단 공작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표면상 ‘용신의 성스럽고 위대한 일행’인 하빈과 채지석만.
그리고 여기까지 따라온 지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정말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는 거 맞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말로만 픽셔 제국을 털어먹어 보겠다 자신감 넘치게 선포한 하빈!
‘그런데 이미 침실에 잠입한 것부터가 평화랑은 거리가 멀지 않을까?’
‘쉬잇, 채씨. 너무 세세하게 따지면 다쳐!’
‘…….’
그래. 헌터들이 던전을 공략할 때 몬스터의 서식지나 거주민의 집에 침입하는 일은 꽤나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이해하고도 남을 행동.
마침 단델리온 공작도 누군가 오밤중에 찾아올 거라 예상했는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일어나 있었다.
“……역시 오늘 밤 손님이 오셨군요.”
단델리온 공작이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어느 쪽 진영이든 비밀리에 접선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지.’
회담 전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비밀 접선과 물밑 작업. 그게 공작에겐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침의로 갈아입지 않고 정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공작이 태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용신님의 일행이군요.”
“네. 안녕하세요, 공작님.”
하빈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것치고 워낙 뻔뻔해서 진짜로 정식 초대를 받고 왔다 해도 믿을 것 같은 분위기. 공작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분명한 목적이 있으시겠죠?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했으면 합니다. 나도 시간이 없어서요.”
“흐음…….”
본론이라.
“진짜 본론부터 말해도 돼요?”
“……?”
‘야, 뭘 말하려고 그래?’
장난기 넘치는 하빈의 미소에 채지석은 순간 불길함을 감지했다. 그러나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현하빈은 평화적으로 한다고 했지? 그러니 선을 넘는 말은 안 할…… 거야.’
평소에 다소 많은 것을 생략한 언행을 일삼았던 하빈. 그래도 이번엔 외교적 자리이니 순한 맛으로 하겠지.
그리고 현하빈은 본론을 말했다.
“공작님, 지금 잃어버린 따님을 찾고 계시죠?”
“……그걸 당신이 어떻게?”
몹시도 당황하는 공작. 그녀의 두 눈에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큰 파문이 일었다.
그 모습을 본 하빈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자알 들으세요! 딸을 순순히 찾고 싶으면 앞으로 제 요구를 다 들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야, 현하빈!’
그렇게 말하면 꼭 납치범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