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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15) (215/268)

215.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5)

‘왜, 왜 날 봐?’

흠칫한 현하빈은 눈빛으로 강력하게 신호를 보냈다.

‘안 돼. 마밍아웃은 안 돼!’

그리고 애초에 마신 한다고 안 했다. 하빈은 주민등록법상 엄연한 인간! 처음 마계 갔을 때 마신인 척했던 업보는 있지만…….

그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프시네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역시 마신님! 이 상황에서는 이성적으로 참고 넘어가라는 뜻이군요.’

하마터면 감정에 휩쓸려 마신님의 큰 뜻을 거스를 뻔했다. 애초에 그들은 회담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하빈이 ‘용신교’로 참석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마신이 아닌 용신교의 신도로 위장해서 회담에 잠입하셨으니 정체가 밝혀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야.’

진정하고 꾹 입을 다문 이프시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각자 상황에 대한 해석을 했다.

‘흠…… 방금은 꽤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소?’

‘진짜 마계에서는 마신을 믿나 봅니다.’

‘그런데, ‘마신님이 보는 앞에서’라는 발언은 뭘까요? 여기 마신님이 있다는 걸까요?’

‘비유적 표현이죠. 원래 저희도 ‘신께서 보고 계신데 두렵지도 않나?’라는 말을 쓰잖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수군대는 사람들 틈에서 이프시네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상황을 수습했다.

“어쨌든 저희는 마계에 대한 모욕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허어!”

그 태도에 몇몇 귀족들이 불쾌한 낯으로 숨을 들이켰다.

‘저 뻔뻔한 태도를 보시오. 그동안 마계가 우리에게 한 짓이 얼마인데 이리 쉽게 넘겨버리려는 건지!’

‘이것 또한 계략이 분명하다니까요. 왜 쳐들어오지 않고 점잖은 척 회담장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어울려 줄 이유가 없습니다.’

‘흐음?’

마계가 뭘 했길래 저러지?

냠냠. 연어를 먹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빈은 슬쩍 곁에 있는 체칼라다임 측 사용인에게 물었다.

“마계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아, 잘 모르십니까? 하긴 용신님과 수행에만 정진하시다 보니 모르셨을 수도 있겠군요.”

하빈을 수행하기 위해 붙어 있던 시종이 속닥속닥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실은 저희 대륙, 마계 때문에 휘청한 나라가 한둘이 아닙니다. 저기 저 양쪽 제국 다들 마계에게 선조들 중 몇 분씩 잃으셨고, 마왕이 침략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삼겠다며 끌고 간 적도 있었고…… 마수들이 민가 사람들을 잡아먹은 적도 있었고…….”

“엥…….”

줄줄줄 흘러나오는 마계의 업보에 하빈은 끄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싫어할 만하네.

‘아니, 그럼 꼰대는 이런 문제 많은 곳을 나한테 확 넘기고 튀려 한 거야? 애초에 그런 거 왜 단속 안 하고 내버려 둔 건데?’

[너도 마신 안 하고 떠넘기고 싶어 하잖느냐.]

‘그거랑 나랑은 다르지! 나는 맡기 싫은데 강제로 스카웃 제의받은 거고, 꼰대는…….’

말을 이으려던 하빈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마신 글리치는 어쩌다 마신이 된 거야?

‘혹시 본인도 맡기 싫었나?!’

하긴 이야길 들어보니 마계 스케일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혼자 다 처리하기엔 꽤나 골치 썩었을 것 같다. 일곱 마왕들이 얌전히 꼰대 말 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꼰대도 마신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서 같이 조별과제 할 현하빈을 발견하자마자 신나서 후배님 후배님 한 건가?

조별과제 같이하기 좋은 신입생 포지션……?

‘뭐야, 그래서 마신 자리 떠넘기려 한 건가? 이 꼰대를 진짜!’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때였다. 크릭샤가 빈정거리는 말로 끼어들었다.

“흥, 다들 쪼잔하게 옛날 일 가지고 들먹이는 꼴이란.”

“릭샤릭샤!”

“약해서 당한 걸 누굴 탓해? 원래 약하면 지는 거다. 너네도 똑같잖…… 읍읍!”

“아잇, 김릭샤 씨!”

황급히 크릭샤의 입을 틀어막는 이프시네.

애초에 크릭샤는 ‘교만’의 마왕이었던 터라 기어오르는 인간들의 말을 참아줄 정도로 인내심이 넓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계의 약육강식의 섭리에 익숙해진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크릭샤는 억울한 듯 입을 틀어막은 이프시네의 손을 노려보았다.

‘뭐, 내 말이 틀렸냐? 이 녀석들도 다 똑같구만.’

보아하니 강대 제국들에 밀려서 다른 왕국들은 눈치 보고 조공이나 바치고 그런 거지, 뭐.

‘마계는 수틀리면 죽인다지만 여긴 목숨 붙여 놓는다는 점 말곤 비슷한 거 아닌가?’

내가 예전 같았으면 확 그냥……!

‘릭샤야,’

“……!”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릭샤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주춤했다. 시선의 출처는 다름 아닌 현하빈이었다.

맛있게 싹싹 연어를 다 먹은 하빈은 여전히 손에 은 포크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포크를 들어 입술에 대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스윽.

목을 긋는 시늉까지.

“…….”

‘이, 입 더 털면 죽인단 뜻인가 보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크릭샤는 집 나간 이성을 부여잡고 친절한 미소를 장착했다. 그가 재빠르게 뒷말을 수습했다.

“하하, 결론은, 우리 다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좋게좋게 넘기자는 뜻입죠! 하하.”

“……?”

급변한 크릭샤의 태도에 다들 벙찐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갑자기 표정이 풀렸지?’

‘마족은 감정 기복이 심하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상당히 무섭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이, 이중인격자일까요?’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도 모른 채 크릭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억지 미소라 산뜻하다 못해 살벌함이 느껴지는 표정.

“하하……. 그니까 지난 일은 묻어두고, 현재를 말하자 이겁니다.”

이프시네가 냉큼 말을 받았다.

“맞아요. 지난 선대 마왕들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볼 때입니다!”

‘현재를 보자니?’

‘어쩔 셈인 걸까요?’

이프시네와 크릭샤의 태도에 사람들은 재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동안의 업보를 모른 척 입 닦겠다는 의미일는지?’

‘아니면 보상이라도 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려는 걸까요?’

‘뒤통수를 치기 위한 연막일 겁니다.’

‘아니, 우리가 마계를 치려는 걸 눈치채고 떠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

상석에 앉은 티자르 황태자는 낯을 굳혔다.

‘역시 그편에 가깝겠지?’

마계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려던 상황을 눈치채고, 그걸 막아보려 부랴부랴 달려온 것.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회담에 참석부터 한 거라면 그건 별 효과가 없는 미봉책에 불과한 일.’

그럼 얼마 안 가 저쪽도 무너질 것이다. 결론을 내린 티자르가 입을 열었다.

“……우선 회담을 잠깐 휴회할 것을 제안하죠.”

“시작하자마자 쉰다고요? 기껏 왔는데?”

이프시네의 질문에 티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린 애초에 ‘마계’가 이 회담에 참여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의견을 각자 세운 뒤 다시 모여야 할 것 같군요.”

마계를 끼워 줄지, 말지, 믿어야 할지 말지.

그 대책을 세울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이지.’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는 계속 마계 측 인사의 주장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당황한 틈을 타 흐지부지 마계의 손해배상을 없던 일로 넘기거나 거꾸로 침략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면 어떡하란 말인가?

‘애초에 회담 목적도 마계 타도를 위해 뜻을 모으는 거였는데.’

그가 세운 완벽한 계획, ‘공공의 적을 만들어 대륙을 통합한다’는 전략이 시작부터 무너져 버렸다. 이대로는 회의를 진행해 봤자 길을 잃고 휘말리는 결말밖에 나지 않을 터.

휴회 시간을 갖고, 그 사이에 헤자라토의 지지세력을 모아 의견을 논하는 게 맞다.

마침 그의 맞은편에 앉은 단델리온 공작도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휴회에 동의합니다.”

‘마계의 등장에 새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

그럼 체칼라다임은 어떤 결정을 내리려나?

마침 체칼라다임의 호그누 국왕은 하빈 일행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휴회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이 회의 이대로 쉰다고?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빨리 끝나면 좋지, 뭐.’

안 그래도 이프시네와 크릭샤가 어쩌다 여기 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못 들었다. 제대로 대책 회의를 하려면 따로 만나는 게 좋을 터.

‘애초에 원래 목적은 별의 서였기도 하고.’

각 대륙에 흩어진 신비의 서. 그것도 원래 회담 주제였는데 이 사람들이 마족 나타나는 바람에 다 까먹은 듯?

‘이참에 명탐정 하난으로서 각개 조사 들어가야지.’

각자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하나씩 하나씩 추궁하면…….

생각을 마친 하빈이 입을 열었다.

“네, 휴회하세요.”

“체칼라다임 역시 휴회에 동의합니다.”

주축이 되는 세 나라, 헤자라토와 픽셔, 체칼라다임 모두가 동의를 하자 다른 나라들도 휩쓸리듯 모두 동의했다.

“좋아요, 휴회합시다.”

이프시네와 크릭샤 역시, 하빈이 동의하자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 걸 확인한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회담은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모두 평안한 밤 되시길.”

그게 과연 진짜 평안한 밤일지, 각자의 이해타산을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의견을 취합하는 밤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 * *

“하빈 님! 오랜만이에요!”

“오는 길에 따라붙는 놈들은 없었고?”

“걱정 마십쇼. 다 슥삭했습니다.”

그날 저녁. 숙소에 가자마자 크릭샤와 이프시네, 글리치는 하빈 일행의 숙소로 잠입했다. 따라붙는 인간들을 다 슥삭했다는 말에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 죽인 거야? 그럼 내일 또 시끄러워질 텐데?”

회담 첫날부터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스펙터클한 밤…… 같은 인상으로 남는 거 아니냐고.

“아녜요! 안 죽였어요. 몽마의 힘으로 슬쩍 재워 두었어요!”

“넵. 슥삭했다는 건 비유입죠, 비유.”

“오, 꽤나 일 처리가 깔끔하네?”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지석이 마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쩌다 회담장에 난입하게 된 거야?”

원래는 밖에서 만나는 줄 알았는데. 하빈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이프시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리치 씨가 저희 회담장 들어간다고 말 안 했어요?”

“안 했는데……?”

하빈이 글리치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글리치는 뜨끔 찔린 듯 시선을 피하며 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나도 당일 날 알았다.”

“? 리치 씨 저희랑 같이 옷도 고르셨잖아요?”

“여기 입고 가는 줄은 몰랐다.”

“으음…….”

이상하네.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이프시네는 고개를 갸웃하던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사실 하빈 님께서 부르지 않아도, 원래 대륙회담에는 참여할 생각이었어요. 선대 일곱 마왕들도 97층 침략 계획은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침략?”

“에이, 선대 마왕이면 모를까 저희는 침략 안 하죠. 하빈 님도 일이 커지는 건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대신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적으로 천천히 설득하려 했는데…….”

이프시네가 차분하게 설명을 하던 순간이었다. 하빈이 쏙 끼어들었다.

“엥? 천천히 설득이라니? 나는 그냥 오늘 깽판 치고 올 건데?”

“네?”

일이 커지는 걸 안 좋아하는 타입 아니었나? 다들 놀라서 하빈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밤엔 픽셔 제국부터 털 생각이었어.”

“……?”

“왜? 무슨 문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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