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4)
“마, 마, 마, 마계라니!”
“마족이 쳐들어왔다!”
“예언이 실현되었다!”
“으아아악! 창문을 열어라! 난 나가야겠어!”
갑자기 등장한 이프시네와 크릭샤의 모습에 회담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비백산해서 체면을 잊고 이곳을 벗어나려는 귀족들, 그리고 창백한 낯으로 굳은 채 마족들을 쳐다보는 각 나라의 대표들, 결연한 표정으로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까지.
“진정해라!”
“모두 진정하십시오!”
그래도 재빨리 안정을 찾은 각 나라의 대표들 덕에 사람들은 가까스로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헤자라토의 대표 티자르 황태자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는 이 회담을 위해 마련한 서류를 내려보았다.
본래 ‘대륙회담’을 주최하기로 했을 때, 그의 목표는 세타 제국의 평화였다. 그동안 오래 끌어온 냉전 체제를 풀고 사이좋게 지내자, 대충 그런 결말을 위해 노력해 보려던 것.
‘그래서 공동의 목표로 마계를 지목하려던 거였는데.’
마침 픽셔 제국에서도 ‘마계의 일곱 마왕이 쳐들어올 것이다’라는 신탁이 내려왔다고 했다.
모름지기 정치에 가장 활용하기 좋은 패가 ‘공포’ 아니던가?
이참에 ‘마계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세타 제국의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라며 사람들을 통합시킬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이 회담장에 마계 대표가 직접 나타나?’
시작부터 일그러지는 회담 주제에 티자르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 픽셔 제국의 대표로 온 단델리온 공작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일곱 마왕이 쳐들어온다는 신탁. 그게 지금 실현되려는 건가?’
그래도 이 상황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비록 마왕의 힘이 강력하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굳이 회담장까지 온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꾸욱 주먹을 그러쥔 공작이 입을 열었다.
“다른 마왕들은 어쩌고 둘이 왔지?”
“다른 마왕?”
이프시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왕 저희 둘뿐인데요?”
“……?”
“나머지는 다 죽었어요.”
“???”
그, 그럼 마왕 두 명인가?
상상치도 못한 답변에 공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신탁은?!”
* * *
“분명, 일곱 마왕이 쳐들어온단 신탁이 있었네!”
“저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군요. 저 인간들이 마족인지 사기꾼인지 어떻게 압니까?”
“애초에 진짜 마왕이라 해도 거짓말을 하는 걸 수 있잖습니까. 마족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종족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지. 신탁이란 게 있었으니…….”
웅성웅성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사람들. 그 수군거림 사이로 한마디가 끼어들었다.
“신탁이고 자시고, 계속 우릴 세워 둘 건가?”
크릭샤가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 왔더니 이것들이 진짜.’
‘참아요, 릭샤릭샤!’
저기 앉아 있는 현하빈과 옆구리를 콕 찌르는 이프시네가 아니었으면, 진작 테이블을 다 뒤짚어엎고 ‘아하, 침략 안 해줘서 불만이냐, 인간들아? 원하는 대로 다 죽여주마!’ 따위의 말을 하며 깽판을 쳤을지도.
‘침략 안 한 게 왜 이상한 거지? 마왕 수가 적은 게 불만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다. 크릭샤가 불퉁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였다.
“그러게요. 왜 다 세워 둡니까? 앉아요, 앉아. 여기여기!”
“……요, 용신님의 왼팔님?”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냥한 말투로 이프시네와 크리샤를 안내하는 현하빈. 그 모습에 다들 벙찐 표정으로 하빈을 바라보았다. 마치 친구 안내하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놀라는 건 덤이었다.
‘여, 역시 용신님의 일행이다. 어떻게 저렇게 대담하실 수가!’
‘우리가 꺼려 하는 걸 알고 옆자리를 양보하다니!’
어디에 앉혀야 할지도 걱정이었는데 알아서 자신의 옆에 앉히는 배려까지.
물론 하빈의 입장에서야 ‘우리 애들 왜 세워 두냐? 여기 앉혀야겠다.’의 느낌으로 손짓한 거였지만. 모두에게 감탄을 자아낸 행보가 되었다.
그 와중, 픽셔 제국의 신관이 중얼거렸다.
“정말…… 마왕들이군요. 여기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력랑이…… 다른 존재라고는 추호도 생각이 안 듭니다.”
‘오, 검증 안 해도 되어서 빠르네?’
다행히 걸어 다니는 전투력 측정기가 저기 있잖아?
‘여기 사람들 너무 의심 많아서 얘네 마왕인 거 언제 증명하고 앉아 있나 걱정이었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납득하니 다행이다.’
하빈과 지석은 일부러 힘을 감추고 있으니 신관들도 느끼지 못한 모양. 물론 하빈이 스킬을 쓰는 순간 바로 뽀록날 위험이 있지만, 이 정도면 되었지 뭐.
‘근데 어쩌다 얘네가 여기까지 온 거야?’
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마신 글리치와 연락할 때, 대륙회담을 이용해 만나자고 했지만 그게 회담장에서 보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꼰대 선배라지만 그 뉘앙스는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도 현하빈이 조용조용히 넘어가는 걸 좋아하니까 이제 그 정도는 외울 줄 알았단 말이다.
‘게다가…… 꼰대 선배는 왜 여기 안 온 거야?’
이프시네와 크릭샤만 왔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하빈이 머리를 굴릴 때였다. 마침 글리치에게서 답장이 왔다.
꼰대 선배
나는 말렸다.
내 탓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