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13) (213/268)

213.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3)

“아니, 얘네는 완전 다른 데 떨어졌다네? 헤자라토 제국에 있대.”

상황을 전해들은 하빈이 한숨을 쉬며 심드렁하게 폰을 들여다보았다. 글리치와의 대화에 따르면 마계 일행은 그들과 다른 나라에 있는 모양. 하빈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프시네는 대륙회담 때 만나자고 해야겠다. 괜히 직접 찾으러 가다간 대륙도 넓어서 엇갈릴 것 같은데.”

초행길이기도 하고 하빈도 이쪽 지리를 모르니 확실한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좋을 것이다. 대륙회담엔 헤자라토 제국도 참여하니까, 마계 일행도 그쪽 사절단을 따라오라고 하면 되겠지?

톡톡 자판을 쳐 마신에게 답장을 보내던 하빈. 평온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하빈의 표정이 굳은 건 그때였다.

“엇, 뭐지? 얘는 또 왜 갑자기 전화야?”

“뭔데?”

하빈의 말에 채지석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하빈의 휴대폰 화면에 뜬 연락처는.

“강태서……?”

* * *

-게에엥(전화 걸 시간에 나랑 놀아 줘라, 인간.)

“흠…….”

‘신호는 가는데…… 안 받네.’

강태서는 계속 이어지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빈에게 메일을 받은 직후부터 연락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계속 ‘전화기가 꺼졌다’는 알림음만 나오는 중이었고.

‘아마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받지 못했던 거겠지.’

무려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기만의 수호자’이자 ‘피데스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강태서 본인 말고도 미친 듯이 연락이 쏟아질 터. 그래서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통화가 좋은데.’

관리자의 눈을 효과적으로 피하려면 메시지 같은 수단보다 직접 대화로 빠르게 주고받고 증거를 인멸하는 게 낫다.

메시지로 긴 텀을 두고 주고받으면 자칫하다 ‘세 번째’의 해킹에 걸리거나 관리자의 감시망에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일 안전한 방법은 피데스에게 SPES 테러를 경고했을 때처럼, 관리자에게 혼란을 주는 코드를 실행시키고 그 시간 안에 직접 말로 전하는 방법이다.

“…….”

강태서는 힐긋 대기시켜 놓은 코드 입력창을 옆눈으로 쳐다보았다. 현하빈이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관리자의 눈을 가리는 코드를 실행시킨 다음, 빠르게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으로서는 직접 메시지를 보내도 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비상 점검 모드가 실행된 이후로 관리자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말해도 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해 나쁠 건 없으니까.

뚜루루루- 딸각.

‘받았나?!’

통화연결음이 끊기는 소리에 강태서는 흠칫했다. 이번에야말로 전화를 받은 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다분히 기계적인 안내음이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뚝!

“…….”

-게에엥(그러게 전화 말고 나랑 놀아 달라니까!)

* * *

“엥, 태서는 웬일로 전화야?”

평소에 연락 안 하다가 오빠가 새계 랭킹 1위인 거 알자마자 갑자기 먼저 전화하는 거 보소.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다, 태서야.’

전화 거절 버튼을 누른 하빈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야, 이 녀석은 항상 절묘할 때마다 연락한다니까?”

[어떻게?]

“연락 없다가 내가 각성자 되었을 때 갑자기 나타나고, 세계 랭킹 1위의 동생이라고 하니까 연락하고! 물론 걱정의 마음으로 연락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최근에 연락 하나 없다가 이 바쁜 순간에 갑자기 전화하는 건 곤란하지.”

물론 강태서가 이 생각을 안다면 ‘관리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연락을 안 했던 거라고!’, ‘그리고 난 메일 때문에 연락한 거라고.’ 하며, 무척 억울해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하빈은 아주 엄격하고 진지하게 카톡 상태메시지를 수정했다.

-한동안 바빠서 카톡 X 전화X

급한 연락은 현시우에게 하세요.

“이러면 태서 말고도 다들 연락을 자제하겠지?”

[그런데 왜 현시우가 여기 나오느냐?]

모든 연락은 현시우한테 하라니.

“당연히, 현시우가 터뜨린 일인데 현시우가 잘 하겠지!”

상의도 없이 ‘현하빈은 제 동생입니다!’, ‘제가 세계 랭킹 1위의 정체 피데스입니다!’라고 피밍아웃 하밍아웃까지 이중으로 터뜨린 현시우!

“그 여파를 감당할 각오는 한 거겠지?”

그러니 남은 인터뷰와 문의 전화는 현시우가 받도록 해라!

현하빈은 비죽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언뜻 보아 현시우에게 뒤처리를 떠넘긴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현하빈의 선택은 객관적으로 보아서도 틀리지 않았다.

둘이 제대로 말을 맞춰 놓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 인터뷰를 한다면 중간에 문제가 생길 일이 많았다.

‘……말을 맞추지 않았다면 입이라도 하나 줄이는 게 나아.’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SPES 역시 언론 대응팀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하빈이 독단적으로 괜한 말을 얹는 것보다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이다.

“괜히 연예인들이 소속사에게 문의해 달라고 둘러대는 게 아니라니까?”

수많은 이해관계와 변수를 고려할 수밖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서와 서윤이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게다가 답장을 해주려고 해도 지금은 어렵다구.”

왜냐하면 이제 대륙회담을 위해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지!

하빈은 경쾌한 표정으로 채지석을 돌아보았다.

“자, 다 챙겼지, 채씨? 뭐 우린 챙길 것도 없지만…… 아! 염단 돈가스는 몇 개 남았어?”

“한 개. 하나는 첫날 네가 야식으로 먹었고 두 번째는 현시우 형님 처단하고 오자마자 생각난다며 먹었어.”

“아앗, 벌써 하나밖에 안 남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 하나를 다 먹기 전에 97층을 다 털어야겠어.”

하빈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리베를 끌어안았다.

“그럼 우리의 용신님과 함께 가 보실까!”

-삐아악!

* * *

“……용신님께서 다행히 대륙회담에 동행해 주신다는군.”

체칼라다임의 국왕 호그누가 안도한 낯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용신님과 그 일행들은 아무리 검증해도 진짜라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다. 용신의 왼팔, 빈님이 돌아온 뒤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었다.

‘혹시…… 힘을 증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효. 여러분, 제발 저 언제까지 증명하고 있어야 해요? 우리 삐약이…… 아니, 용신님께서 불도 뿜었잖아요? 이분들 저번 컨티뉴 저리 가라네? 우리 그냥 돌아간다? 확 돌아가 버려?’

하빈의 옆에 있던 채지석이 속삭였다.

‘……어, 그냥 살짝 보여주고 끝내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실수로 다 죽을까 봐 그러지!’

말을 끝낸 하빈은 한숨을 쉬며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그 한 동작에 체칼라다임의 기사단이 모두 나가떨어졌다.

‘크, 크억!’

‘헉!’

무슨 공격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저 멀리 날아가 뒹구는 병사들. 나동그라진 사람들을 보며 하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앗, 죄송합니다. 또 힘 조절에 실패했네. 그러니까 이런 거 시키지 말랬잖아요…….’

그 모습을 본 호그누와 기사단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분들은 진짜다!’

‘오오, 정말로 용신이 강림하셨도다…….’

‘그야말로 체칼라다임의 축복이다!’

픽셔 제국과 헤자라토 제국에게 밀려 언제나 기를 못 펴고 살았던 왕국 체칼라다임. 군사력으로도 국력으로도 밀리던 왕국이었지만.

‘어쩌면 용신님의 가호가 함께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승리할지 모른다.’

잠시 보여준 무력만으로도 헤자라토와 픽셔 제국을 대적할 만하다. 아니, 대적하고도 남을지 모른다.

‘체칼라다임의 전성기가 다시 오는 것인가?’

용신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만으로도 대륙회담이 두렵지 않았다. 호그누는 오랜만에 떨리는 얼굴로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 * *

“와, 여긴 엄청 편하네. 이동 마법 최고다!”

다행히 대륙회담을 향한 여정은 쾌적하고 안락했다. 아우라이던의 각 나라에는 이동 마법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 이동 인원수의 제약이 무척 크고 소모되는 마력이 많아, 웬만큼 큰일이 아니면 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군사를 동행하는 등, 전쟁에 악용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손쉽게 회담 장소에 도착한 체칼라다임과 하빈의 일행들. 그들은 귀빈 대접을 받으며 대륙회담의 장소로 입성했다.

“다음, 체칼라다임의 대표 용신님과 호그누 전하께서 입장합니다.”

회담 장소에는 각국의 대표들이 모였다. 헤자라토의 대표들. 그리고 픽셔 제국의 대표들. 다른 자잘한 나라에서 보낸 사절단들까지.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던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흠, 이프시네는 무사히 왔으려나?’

대륙회담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여기 나타나겠지? 어쩌면 사절단의 일원인 척 따라왔을지 모른다. 궁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근처 여관에 머물고 있을지도.

‘회담 상황 봐서 찾아가야겠다.’

오늘은 대륙회담의 첫날.

원래 회담이라는 것이 하루 만에 결정되기에는 중요한 사안이 꽤 있을 테니 며칠간 이어갈 것이다. 그럼 이프시네를 만날 틈이 나겠지.

그사이에 ‘별의 서’도 찾으면 좋고.

‘오늘은 적당히 봐서 이프시네랑 김릭샤, 꼰대 선배 어딨는지 만나서 재회해야겠다.’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마침 그들의 등장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들이…… 체칼라다임에 나타났다는 용신님 일행이라죠?’

‘공교롭게도 대륙회담 직전에 나타나다니. 과연 이 상황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정말 체칼라다임은 신의 가호를 받는 왕국인가?’

‘진짜 용신님이실까요?’

-삐이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놀람과 의혹의 시선 속에서 리베는 거만한 얼굴로 쭈욱 가슴을 폈다. 아마 용신의 신성함과 대단함을 표현하려던 모양. 그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조, 좀 작긴 한데.’

‘귀여우시군요…….’

‘어허, 어디 용신님께. 감히 귀엽다는 말을 했다가 경을 칠지도 몰라!’

청력이 좋은 하빈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뿌듯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우리 리베가 너무 귀엽긴 해.’

대륙회담이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옆에 귀여운 리베도 있고…… 진행 상황을 보아하니 주전부리와 식사도 챙겨주는 것으로 보였다.

주변 눈치 안 보고 맛있는 거 먹다가 용신께서 들어가고 싶다 뭐다 하는 핑계 대면서 숙소로 돌아가면 되겠지.

‘언제쯤 이 자리를 뜰까?’

하빈이 턱을 괴며 첫 디시로 나온 연어 샐러드를 포크로 콕 찍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끝나면 마계 일행들 얼굴 볼 테니 좀 참아 봐야지.

‘아, 선배한테 연락 넣는다는 걸 깜빡했다.’

끝나고 어디서 만날지 미리 연락해야지. 하빈이 테이블 아래로 폰을 넣어 몰래 카톡을 쭉쭉 썼다.

1선배 어디임?

1나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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