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2)
“우와, 여기가 97층이군요.”
“그냥 돌아가면 안 되나?”
“안 돼요! 지금 나머지 두 분은 아이스크림 먹었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전 그거 먹기 전엔 못 돌아가요! 무려 하빈 님이 부르셨는데!”
97층, 헤자라토 제국의 도심. 그곳에는 세 명의 인영이 후드를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각각 이프시네, 크릭샤, 글리치였다.
“리치 씨, 저희를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이프시네가 글리치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들은 글리치의 이동 능력 덕분에 층을 뛰어넘어 여기에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했는데 보면 볼수록 진짜 우리 편이 맞으시더란 말이지.’
마계에 있는 동안 글리치는 이프시네와 크릭샤를 따라다니며 몇몇 일들을 거들어 주었다.
‘마왕군을 재정비하고 있다고?’
‘네. 그동안 제대로 된 보수랑 복지 없이 강제로 동원하다 보니 겉으로는 수가 많아 보일지 몰라도 내실이 무척 부족했어요. 제대로 된 체계도 없었고요.’
이프시네는 다른 마왕들이 남기고 간 군들을 새로 통합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행동은 글리치가 보기에 퍽 흥미로웠다.
‘왜 마왕군을 통합하는 거지?’
이제껏 일곱 마왕이 서로 견제하며 지배하던 전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통합된 마왕군이 창설된 건 아마 최초일 텐데.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마계대전이라도 일으킬 참인가?’
‘음.’
‘뭐야, 진짜 마계대전 일으킬 거냐?’
크릭샤도 끼어들어 물었다. 대충 귀찮아서 내버려 뒀더니 조그만 녀석이 마계대전 같은 꿈을 꾸고 있었나?
지난번에 하빈이 곤란을 겪고 있자 ‘마계대전을 일으킬까요!’라며 나선 적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그 물음에 이프시네는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전쟁을 좋아하진 않아요. 딱히 먼저 전쟁을 일으킬 생각도 없고요.’
‘그럼 왜?’
‘때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더라고요.’
오랜 시간 마계에서 약자로서의 삶을 경험한 이프시네다. 약자는 평화를 주장하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강자가 짓밟으면 그저 끝날 뿐. 그녀가 오래도록 지켜본 마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르면, 언제나 선택권은 강자에게 있었다.
그건 사실 마계를 벗어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계는 워낙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산 세계다. 신에게도 배척받는 곳이라 들었다. 마계 바깥 어디를 가도, 혹은 정말 대적할 수 없는 미지의 상대가 나타나도. 무사할 수 있으려면.
‘언젠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무시당하고 짓밟히지 않을 정도는 힘을 키워야 하겠죠. 적어도 하빈 님께 도움이 될 정도로는 말이에요.’
‘흠.’
글리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은 뭐가 더 필요하지?’
‘일단 군량으로 비축해 둘 식량이랑…….’
‘여기 있다.’
글리치가 손을 튕기자 마왕성의 저장고가 가득 찼다.
‘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식량이?’
‘사실 마왕성 지하에는 금괴랑 보석, 아이템을 보관해 둔 장소도 있는데…….’
‘리, 리치 씨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
놀란 건 이프시네뿐만이 아니었다. 크릭샤도 당황한 낯으로 글리치를 추궁했다.
‘마왕성 지하에 그런 공간이 있었다고? 이건 나도 모르는 정보인데?’
사실 글리치가 그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신이었기에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글리치는 대충 둘러댔다.
‘……마신이 알려줬다.’
‘하빈님께 들은 정보로군요! 그럼 믿을 수 있겠죠.’
‘…….’
어쨌든 글리치 덕분에 그들은 마왕군 재정비를 손쉽게 끝내고 무려 97층까지도 한번에 왔다.
“그래도 우리끼리만 왔다는 게 걸리긴 하네요. 기껏 정비한 군을 데려올 수 있으면 좋은데.”
이프시네의 말에 곁에 있던 크릭샤가 핀잔을 주었다.
“진짜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이야? 여긴 겁많은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마왕군을 데려왔다간 다들 혼비백산해서 맞서 군을 끌고 올 거다.”
“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통로를 찾은 상황이 아니니 데려올 수도 없지만요.”
각 층을 서로 넘나드는 방법에는 크게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플레이어’로서 각 층을 공략하는 방법. 탑 바깥의 인간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한 층을 공략해야,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탑의 거주민들이 쓰는 방법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로, 탑 안에 존재하는 나름의 ‘통로’를 사용하는 것.
굉장히 드물긴 했지만, 동굴이나 호수나, 거울, 아티펙트 등등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나름의 통로들이 있었다. 찾기는 굉장히 어렵지만.
‘그리고 통로 방식은…… 17층 거주민에게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이건 ‘플레이어’들은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라 들었어.’
거주민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에 가까운 방식. 그러나 거주민들도 그 통로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아서 찾아야 하는 일이었고, 매 층마다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마법이나 기술을 써서 이동하는 거지.’
일전에 크릭샤가 그 방법을 써서 26층과 50층을 오간 적이 있다. 다만, 층을 넘나들 정도의 실력가 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된다 해도 한계가 많았다. 당장 크릭샤도 26층과 50층이 같은 세계관인 것을 이용해 이동한 것일 뿐.
‘하빈 님처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은 드물단 말이지.’
그러나 이번에는 ‘글리치’의 도움으로 손쉽게 97층에 왔다.
“릭샤릭샤의 말이 맞아요. 어쩌면 우리 셋만 온 게 더 잘 된 일일지도요.”
다리 위를 건너던 이프시네가 크릭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들은 헤자라토 제국의 명물 다리를 걷고 있었다.
“조용히 온 덕분에 이렇게 미리 분위기도 살필 수 있으니까요!”
정찰도 원래는 적은 인원수만큼 보내서 해야 하는 거다. 하필 따라온 게 마왕 두 명이랑 마신 한 명의 정예라는 게 문제지만.
글리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 인원으로도 마왕군 필요 없을 텐데?’
현하빈까지 나중에 합류한다고 생각하면…….
굳이 군을 끌고 올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글리치는 흘깃 다리 난간을 보았다.
헤자라토 제국의 명물 다리여서 그런지 다리 난간에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적은 온갖 낙서들로 가득했다.
-고기가 맛있는 곳은 ‘언덕 아래 푸줏간’: 고기 싸게 드립니다.
-다리 끝에서 매일 아침마다 신선한 꽃을 팔아요
돈을 벌기 위해 홍보를 한 문구부터.
-여기가 다리 중간이라서 일출이 제일 잘 보임
……
-이 글 보시는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정보글, 덕담까지.
게다가 다리 난간 너머로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그들 사이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위기감 없이 평화로운 즐거움이 머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여기 마왕이 왔다고 하면 다 아수라장이 되겠지.’
조용히 나타난 게 잘한 것 같다. 게다가 현하빈도 워낙 소란스러워지는 걸 싫어하니 분명 조용히 오라고 했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딱딱한 돌로 만든 다리 바닥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마침 앞서가던 이프시네가 글리치를 돌아보았다.
“맞다, 리치 씨! 저희가 97층에 도착한 거 하빈 님한테는 알리셨나요?”
“그래.”
글리치는 주머니에 넣은 폰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메시지 보냈으니 받았겠지, 뭐.
* * *
“아니, 도착을 하면 어디에 어떻게 도착했다는 거야?”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또 하나하나 물어봐야 하는 거지? 에휴, 하여튼 내가 신경을 안 쓰면 되는 일이 없어요!”
이래서 능력 있는 내가 참 힘들다니까.
하빈이 이리저리 글리치의 메시지를 살피며 답장을 쓰고 있는 동안, 채지석은 아헤자르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97층의 일들이 이 웹소설 전개와 똑같이 흘러간다는 의미죠?”
[그렇다. 작가가 ‘아우라이던의 역사서’ 아이템 일부를 차용했더군.]
“웹소설만 보고도 그걸 알아내고 작가까지 찾아가다니 훌륭한 추론이었네요. 실행력도 좋았고요.”
지석의 평가에 아헤자르가 흡족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게 다 웹소를 제때 읽었던 이 몸의 활약이었느니라. 물론 매번 캐시를 빌려준 네게도 감사를 표한다.]
“뭐야, 채씨. 잘잘이한테 캐시 빌려줬어? 언제?!”
[……!]
현하빈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채지석에게 문화상품권과 캐시 선물을 빌린 적 있었던 아헤자르. 그는 뜨끔한 목소리로 혐의를 부인했다.
[아, 아니다! 네가 잘못 들었겠지!]
“흐음…….”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채씨, 아무리 딱해 보여도 캐시 막 빌려주고 그러면 안 돼. 잘잘이는 채무 변제 능력이 없단 말이야.”
[무슨 소리! 내가 능력이 없다니! 두고 봐라. 꼭 갚을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이번 단서도 찾은 것이 아니냐?]
분개하는 아헤자르의 말에 따라 오마주의 원고가 팔락팔락 넘어갔다. 채지석은 날아가려는 원고를 다시 붙잡고 재빠르게 원고를 훑었다.
“그런데 이거 미공개 원고인 것 같은데 어떻게 가져온 거야? 이런 거 막 가져와도 되나?”
에이포 용지에 뽑힌 원고는 오타 검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는 대사도 없이 줄거리만 급하게 적혀진 원고. 구석에는 당근이 흔들리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왜…… 뜬금없이 당근이 그려져 있는 거지……?’
어쨌든 이 원고는 누가 봐도 미완성 원고라는 게 문제였다. 상품화되지 않은 원고를 미리 보는 건 어려울 텐데?
“혹시 작가님 집에 찾아가서…… 협박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허어, 채씨! 날 뭘로 보고!”
하빈이 팔짱을 끼며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집에 찾아가긴 했어! 그리고 다음 화를 달라고 했지!”
“……? 그럼 맞잖아?”
집 찾아가기, 거기다 원고 독촉 협박(?)까지. 지석의 의문 섞인 시선에 하빈이 변명하듯 외쳤다.
“아냐! 모두 합법적인 루트였다구! 난 편집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 알고 보니 작가님 소속 출판사를 지세 언니가 소유하고 있더라니까.”
“오, 그래?”
최근에 인수한 회사들 중 하나에 출판사도 있었나 보네. 하빈의 해명을 들은 지석이 마침내 편안한 표정으로 원고를 마저 읽었다.
“우린 다 읽었으니 채씨만 마저 읽으면 돼. 사실 마계 대전 부분 때문에 원작이 너무 많이 틀어졌을 순 있지만…….”
하빈이 폰을 두드리며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는 순간이었다.
벌컥-
“용신님과 오른팔님, 계십니까? 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 그가 소파에 떡하니 누워 있는 하빈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외, 왼팔님께서 복귀하셨군요?”
“그래그래. 잠시 다녀왔다.”
태연하고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는 하빈. 그 모습을 본 시종이 눈치를 살폈다.
‘다른 세계의 최강자를 처단하러 가셨다 들었는데…….’
하지만 그 내용과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흔들리는 눈빛의 시종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외람되지만 다녀오신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최강자를 처단하러 다녀오셨다고…….”
“엥. 최강자? 처단?”
그 단어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처단하러 다녀온 대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시우뿐인데. 하지만 현시우는…….
“죽을까 봐 봐주고 오는 길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