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스포일러 (6)
‘잘잘이를 찾고 있냐니? 이미 있는데?’
아헤자르는 집에 굴러다니던 걸 잘 주워뒀다.
[안 굴러다녔다! 가만히 있었다!]
‘그래그래. 가만히 있는 걸 잘 주웠지.’
잘 주운 게 맞나?
아무튼.
“아헤자르를 찾느냐니.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네? 이쪽이 아니셨나요?”
하빈의 반문에 오마주가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저는 아우라이던의 일곱 성좌 이야기. 그 부분에 관심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일곱 성좌?”
“물론 제 아이템에는 그중에서 제일 강했다던 아헤자르에 대한 이야기만 일부 남은 게 전부지만.”
[크흠! 거봐라. 내가 제일 강한 거 맞지?]
‘그래. 우리 잘잘이가 제일 세다. 아주 최강이다. 그래그래.’
하빈이 이번에도 튀어나오려는 김잘잘의 자랑을 한 귀로 흘려넘기려는 순간이었다. 아헤자르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뭐, 어차피 일곱 성좌 이야기는 몰라도 상관없다. 아마 살아남은 존재가 나와 네아이바 빼고 없을 테니.]
‘……없다고?’
[아마 나머지는 다 사라졌을 텐데……. 이번에 만난 네아이바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걸 보아 무언가 큰 타격을 입은 터.]
아. 그러고 보니 현시우의 집무실에서 네아이바와 아헤자르가 만났었지. 그때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네아이바, 나한테는 말 걸었는데?’
[?!]
‘현시우 죽이지 말라고 열심히 말리던데 잘잘이한테는 안 들렸나 보네.’
하빈의 말에 아헤자르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네아이바! 난 널 친구로 여겼는데!]
아마 네아이바로서는 현하빈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헤자르에게 신경을 못 쓴 모양. 현하빈과 아헤자르에게 모두 들리게 말했다간 곁에 있는 채지세에게도 말이 들렸을 수도 있으니 신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헤자르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
[다, 다음에 만나면…….]
‘무슨 이야기하게?’
[……그러게. 무슨 이야기를 하지?]
당황해서 입을 다무는 아헤자르. 하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 녀석들, 결국 만나게 해 줘도 서로 어색해서 묵묵부답인 거 아냐?’
네아이바도 그래서 말 안 건 거 아니냐고.
마침 아헤자르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러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예전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음, 내가 나서려고 할 때마다 네아이바가 힘만 쓸 생각하지 말고 머리도 좀 쓰라며 빈정대었고…….]
‘? 친구 맞냐?’
아니, 오히려 찐친인 것 같긴 한데.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빈은 그래도 정이 많이 든 아헤자르의 편을 들어 주기로 했다.
‘아냐, 잘잘아. 힘이 세면 머리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단다.’
[그, 그렇지? 그런 것이지?]
‘그래! 만약 머리를 써야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 닥치면, 내가 힘이 부족한 게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자.’
[그렇다! 역시 힘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빈이 편을 들어 준 덕에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아헤자르. 하빈은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하지만 그 위에 돈이 있단다.’
[……?]
‘아무리 세도 카카페 캐시 충전 못 하잖아, 잘잘이는!’
[크윽!]
‘힘으로 안 될 때는 혹시 돈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
뭔가 순진한 성좌의 동심을 파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지만!
하빈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물었다.
‘그래서, 결국 일곱 성좌들은 너희 빼고 다 죽었어?’
[……그래. 나와 네아이바 외에는 다 소멸되거나 실종되었다.]
실종되었다고?
실종이라는 단어에 하빈이 멈칫했다.
‘……그럼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실종과 소멸은 다른 문제다. 물론 다 소멸일 수 있겠지만 굳이 실종이라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하빈의 질문에 아헤자르가 답답했다.
[실종된 건 탈라리스라는 성좌인데,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직접 본 적도 없고 건너건너 소식을 들은 게 다다. 멸망 직전에 실종되었다.]
‘어떻게 생겼었는데?’
[머리색이 노란색이었나, 연두색이었나……?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게 다라서.]
‘흐음.’
노란색이나 연두색이라니. 어쩐지 좀 익숙하게 상큼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능력은?’
[이동……하는 류의 능력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어쩌면 그걸 사용해서 도망쳤을지도 모르지만 멸망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들었던 성좌라서 아직까지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목소리도 외모도 잘 모른다.]
어, 이거?
아무리 봐도 누가 생각나는데.
‘흐으음.’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빈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 생각을 한편으로 접어 두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오마주에게 정보를 얻는 게 우선이었기에.
“작가님. 저희가 궁금한 건 일곱 성좌 쪽 이야기가 아니에요.”
“넷?”
오마주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아이템을 찾으려고 정보 얻는 줄 알았는데…….’
물론 다른 헌터들이라면 오마주의 말에 솔깃했을 것이다. ‘아헤자르요?’, ‘그게 성좌라고요?’, ‘그 성좌를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 적혀 있나요?’라며.
그러나 이미 아헤자르를 얻은 하빈에게는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오마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정보라면 이미 경매장에 넘어간 시점부터 조사하셨을 테죠. 아마 제가 입수한 역사서에는 아헤자르와 관련된 정보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오신 모양인데…….”
오마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우연히 겉표지 안쪽에 있는 별책부록을 발견했거든요. 경매장 사람들 모르게요.”
“오, 그래요?”
“거기 아헤자르에 대한 찬양이 한가득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혹시 그걸 찾고 계시나 했는데.”
아무래도 오마주가 역사서를 입수한 다음 찬찬히 살펴보다 무언가 더 발견을 했었던 모양. 그래서 처음 질문 때부터 지레 찔려서 그걸 내놓아야 하나 고민한 모양이었다. 물론 하빈에겐 필요 없는 부분이었지만…….
[나에 대한 찬양이라니! 굉장히 중요한 정보로군! 이건 궁금하다! 어떻게 적혀 있었는지 다시 물어보자!]
반면, 솔깃해서 조르는 아헤자르.
‘아 뭐래, 하나도 안 중요하거든?’
김잘잘 칭찬 읽어봤자 어디에 쓰나.
하빈은 아헤자르의 흥분을 무시하고 그냥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저희가 궁금한 부분은 그게 아니라, 다음 화에 대한 내용이에요.”
“다, 다음 화요?”
“네에.”
하빈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오마주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아, 아이템 노리러 오신 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역사서 다시 가져가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요?”
“에이, 그거 지루해서 언제 다 읽어요? 저 시간 없어요.”
“……?”
물론 역사서를 다 읽고 가는 게 제일 효과가 있겠지만, 하빈이 알기로 역사서 아이템 해독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라 들었다. 번역 아이템을 써도 현대 말과 다른 문법이나 용어가 상당히 많다지.
마치 우리가 조선시대 한글 문서를 읽는 정도의 불편함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당연히 하빈은 그런 지루하고 번거로운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 이미 다 해독하고 읽으신 분이 계신데, 왜?’
하빈이 흡족한 얼굴로 오마주를 쳐다보았다. 그랬다. 하빈이 굳이 역사서 원본을 읽지 않아도, 오마주가 이미 역사서를 열심히 해독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작품을 써야 하니까.
‘이분도 보통 집념이 아니긴 해.’
작품을 쓰기 위해 무려 연구용 아이템을 구매해 직접 고대 역사서를 해독하는 노력과 집념이란. 게다가 경매장 관리인도 찾지 못한 별책부록까지 찾아내고, 그걸 해독했을 정도로 꼼꼼하게 파헤쳤다.
“그럼 작가님은 역사서 내용은 다 알고 계신 거죠?”
“네? 네……. 다 해독하긴 했는데.”
“그걸 바탕으로 작품 쓰신 거고요.”
“아…… 네. 제가 쓴 부분은 그중에서도 픽셔 제국, ‘단델리온 공녀’의 일대기를 따왔어요.”
[거봐라!]
아헤자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내 말이 맞지? 딱 픽셔 제국의 이야기였다니까! 지금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과 문화, 복식까지 전부! 픽셔 제국이 틀림없었다!]
“그럼 어느 정도로 각색하셨나요?”
“…….”
하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난이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각색된 분량이 적으면 소설만 대충 읽고 가도 웬만큼 해결된단 거고, 각색된 부분이 많으면…… 결국 역사서 원전을 읽어야겠지.
‘끄응. 역사서 읽는 건 싫은데.’
그런 거 읽을 바에 그냥 때려치우고 대륙회담에 가서 힘으로 평정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
‘허어, 아까도 말했잖아, 잘잘아. 힘이 강하면 머리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그, 그게 그런 뜻……?이 되나?]
‘네가 주장한 논리인데 왜 거스르려 하는 거니, 김잘잘?’
[그, 그렇기는 한데…….]
그들이 한창 떠들고 있을 때였다. 오마주가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음, 그게 사실은요……. 이거 저희 회사 관계자분들이나 업계 관계자들에겐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미 너무 많은 걸 불어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오마주가 멋쩍은 얼굴로 하빈의 눈치를 살폈다. 하빈은 냉큼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어차피 진짜 편집자도 아니었던 현하빈. 정작 오마주의 출판사에 방문한 적도, 앞으로 방문할 일도 없었다. 이쪽에 취직할 일도 없을 테니 업계 관계자를 더 만날 일도 없고. 지세 언니도 딱히 하빈에게 추궁할 리는 없겠지.
빠르게 계산을 마친 하빈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고 말하세요! 제 개인적 일 때문에 궁금한 거라, 정말 우리끼리의 비밀로 알고 넘어갈게요!”
묘한 신뢰감을 주는 태도에 오마주가 입을 열었다.
“각색…… 거의 안 했어요. 역사서에 적힌 플롯에서 인물들 이름 같은 것만 바꾸고, 사건이나 반전은 실제 역사서와 거의 흡사합니다.”
“오!”
[오오!]
그 말에 하빈과 아헤자르는 반색했다.
[그럼 이대로만 가면 소설 내용과 97층 내용이 똑같단 소리 아니냐!]
‘진짜 책빙의다, 책빙의!’
지루한 역사서 읽을 필요 없네! 웹소만 읽어도 된단 거 아냐?
[봐라! 이래서 웹소를 읽어야 한다!]
아헤자르가 신이 나서 외쳤다. 완전히 기가 살아난 아헤자르는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
[그동안 나한테 캐시 쓴다고 잔소리한 것들 모두 사과해라! 결국엔 도움이 되지 않느냐!]
‘…….’
[이래서 미리미리 웹소를 읽어 놔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작품에 빙의될지 모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이게 실화라서 반박이 안 되네.’
진짜 실화냐.
고개를 절레 저은 하빈이 다시 오마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잘 됐네요! 제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대륙회담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였거든요.”
“네……? 정말로 제 소설 내용이 궁금하셨던 건가요?”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다음 화 어디 있으신가요? 쓰고 계셨어요?”
“그, 아직 2천 자 썼는데…….”
“네?! 그것밖에 안 쓰셨다고요? 아아니, 2천 자면 다음 화 절반 분량도 안 되잖아요! 진짜 뉴스 볼 시간은 있으면서 다음 화 쓸 시간은 없어요? 플롯은 있죠? 트리트먼트는? 시놉시스라도 어디 봐요!”
“그, 그게!”
빨리 다음 내용을 달라고 요구하는 현하빈의 기세에 오마주는 주춤 물러섰다.
‘진짜…… 편집자 일하러 오신 건가?!’
원하는 게 다음 화라니.
원고 독촉뿐이라니!
사인까지 받으셨던 걸로 보아하니, 정말로 작품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신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