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9) (209/268)

209. 스포일러 (5)

[사인회 한 번으로 내 이름을 작가님이 기억해 주다니!]

상황과 관계없이 감격에 젖은 모양인 아헤자르. 그 상황을 보며 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김잘잘. 지금 작가님이 네 이름 기억하고 있는 게 그렇게 기쁘냐?’

[당연히 그렇다!]

“…….”

‘에휴. 저 웹소 덕후를 어쩌면 좋아?’

흥분한 아헤자르와 다르게 하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수상하다.

스치듯 지나갔던 아헤자르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나도 잘잘이라고 맨날 부르다 보니 가끔 까먹는데 말이야.’

[뭐, 뭣이!? 어떻게 내 이름을 까먹을 수가 있느냐!]

“흠흠.”

어쨌든 스치듯 지나간 잘잘이의 본명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오마주.

‘당시 사인을 할 때도 반응이 남달랐지.’

오마주는 ‘아헤자르’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는 당황해서 아헤자르가 진짜 맞냐고 되물었었다. 뭐 하는 친구냐고 물어보기도 했었고.

‘그때는 그냥 판타지풍 이름이라 되물은 줄 알았는데.’

발음이 어렵거나 귀를 의심해서 되물은 줄 알았지 뭐람.

하지만 이제 보니 더욱 의심이 싹튼다. 하빈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오마주 작가를 향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작가님은 아헤자르라는 이름이 굉장히 인상 깊으셨나 봐요.”

“……그게.”

“혹시 알고 계신 건가요?”

하빈은 당황한 표정의 오마주를 향해 쉬는 틈 없이 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아헤자르’가, 다른 누구도 아닌-”

“…….”

“아우라이던의 성좌 이름이라는 걸요.”

“……!”

* * *

“……그, 그걸 어떻게!”

반사적으로 외친 오마주는 합, 하고 자신의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하빈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걸렸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이 작가는 분명 아우라이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거나, 그와 관련된 자가 분명하다니까!]

그래서 ‘황길때’에도 그토록 고증이 뛰어났고 핍진성 있는 묘사가 등장한 모양이었다.

[특히 세계관이 아우라이던과 너무 비슷해서 볼 때마다 추억에 잠길 수 있었지. 그야말로 명작이었다! 전부 소장권으로 소장했느니라.]

‘소장권 지른 돈은 내 돈이었고 말이지?’

[아, 아니다! 30퍼센트 정도는 이벤트 캐시였다!]

‘허? 30퍼밖에 안 돼? 맨날 이벤트 참여 열심히 했는데 그것밖에 못 모았어?’

[알다시피 내 뽑기 운은 안 좋지 않으냐……. 매번 100캐시만 뽑혀서…….]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헤자르. 그와 대비되게, 오마주는 아직도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묻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거죠?”

“크흠, 그야…….”

하빈은 아헤자르를 흘깃 쳐다보았다. 여기 당사자가 있다고 말해, 말아?

그래도 아직 그녀가 아헤자르를 지니고 있다는 건 비밀이었다. 하빈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흠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천재 편집자 하난. 명탐정도 겸직하고 있죠!”

그러나 그 해명을 들은 오마주는 오히려 잔뜩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 진짜 편집자이신 건 맞아요? 아니, 아까는 하난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소개하지 않으셨어요? 성함이 현하빈이셨던가…….”

“아, 맞네.”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저는 천재 편집자 현하빈!’이라고 외쳤었던 하빈.

“크흠, 그게 말이죠.”

하빈이 해명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오마주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러고 보니 ‘현하빈’ 양은! 지금 난리인 피데스 님의 여동생! 그러고 보니 생기신 것도, 혀, 현시우 님과 닮은!”

“앗.”

“거기다…… 컨티뉴의 후계자이신 분 아닌가요?!”

“아앗!”

당황해서 눈을 굴린 하빈이 속으로 아헤자르에게 말했다.

‘어떡하지, 잘잘아? 이분, 뉴스를 좀 잘 챙겨 보시는 분이신가 봐!’

속보를 다 꿰고 계셨네. 오늘 뜬 실시간 중계인데 언제 다 보셨대!

하빈은 재빨리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허. 작가님! 지금 아직 다음 화 쓰지도 않았는데 뉴스 보고 계셨던 건가요?”

“그, 그건!”

“다음 화는 다 쓰고 보신 건가요?”

“그게…….”

“허, 참 나! 하, 정말!”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쉰 하빈이 오마주를 다그쳤다.

“작가님! 지금 원고가 안 나왔는데 뉴스 볼 시간이 있으십니까?!”

하빈의 엄청난 기세에 오마주는 주춤 물러서며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너무 엄청난 내용의 뉴스라서…….”

피데스의 정체가 전 세계 동시 송출로 생중계되고 있는데 참기는 어려웠을 터. 하지만 하빈과 김잘잘은 봐주지 않았다.

[빨리 비축 쌓아서 연참하라고 해라!]

“비축은 언제 쌓으실 건데요!”

“죄송합니다!”

“이래서 언제 초고 받아서 언제 교정하고 언제 최종본 만듭니까? 미리미리 하셨어야죠!”

하빈의 프로페셔널한 다그침에 아헤자르가 당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니, 그런데 왜 진짜 편집자 같은 용어를 쓰고 있느냐?]

‘응? 사실 해봤어, 편집자!’

안 해본 알바가 없었던 하빈. 그녀는 무려 편집 외주 알바도 해보았다.

‘원래는 이렇게 작가님을 다그치면 안 되는 거지만…….’

원래라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예의를 지켜서 좋은 말로 정중하게 독려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게다가, 사실 그들은 진짜 편집자 행세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오마주에게서 97층과 관련된 정보를 캐는 것.

‘에휴. 이게 무슨 고생이람. 김잘잘이 살았던 시대라며? 그럼 김잘잘이 기억만 잘 하고 있어도 되었던 거 아냐?’

[그리 오래전인데 어찌 다 기억하겠냐? 게다가 대륙회담 당시에 나는 하필 다른 대륙에 있었다!]

어쨌든 하빈의 매운 다그침에 오마주 작가도 그녀를 믿는 눈치였다.

“지, 진짜 편집자 같긴 한데…… 하긴, 편집자가 아니라도 거물이긴 해서…….”

오마주의 출판사는 채지세의 소유. 안 그래도 현하빈을 솔라리스가 싸고돈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공식으로 퍼져 있었다.

‘그럼 대표님 라인이잖아!’

대표 라인이 아니라도 공식 세계 최강자의 유일한 혈육. 거기다 최고의 제작계 기업 컨티뉴의 상속자로 여겨지는 현하빈.

이미 편집자고 자시고 논할 단계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 일단 들어오시죠.”

결국 하빈을 거실로 안내한 오마주. 그녀가 비바고 군만두를 냉동실에 넣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방금 피데스 님 생중계 인터뷰가 있었는데 안 가보셔도 되는 건가요?”

아무래도 현하빈 당사자에 대한 인터뷰이기도 했으니, 하빈이 직접 가서 수습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물은 것이었는데.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잘 응징하고 왔으니까.”

‘응징……?’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생긋 웃으며 말을 돌린 현하빈. 그녀가 손깍지를 끼며 척,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쳤다. 그야말로 압박 취조실 분위기를 조성한 하빈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작가님, 아우라이던에 대해 잘 알고 계시죠?”

[아, 아니 그렇지만 너무 본론으로 들어간 거 아니냐?!]

시작부터 다짜고짜 ‘아우라이던에 대해 아느냐!’라고 질러 버리다니.

‘엥? 그럼 내가 뭘 먼저 여쭤봐야 했는데?’

하빈은 빨리 97층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우라이던’은 딱히 엄청난 비밀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다. 게이트 사태 터지고 한때 학자들 사이에서 던전의 역사를 조사한다며 연구했던 수많은 세계의 이름 중 하나.

‘지금은 그 던전역사연구학도 사장되는 모양새지만.’

던전의 역사가 의외로 아이템 제작이나 던전 공략에 큰 영향을 끼친 전례가 없어 점점 지원을 못 받아 뒤로 밀려난 학문이 되었다고 한다. 각 던전마다 표방하는 세계관이 워낙 각양각색이라 한 세계관을 열심히 파 봤자 그게 또 나올 거란 보장도 없고.

그러는 동안 아헤자르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거 말고 대화 시작은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뭐였는지, 차기작을 쓸 생각이 있는지를 먼저 여쭙는 게…….]

‘허어, 김잘잘 여기서 사심 채우지 마라. 이거 저번 같은 사인회 아니거든?’

이 녀석 이거 진심이네?

하빈의 핀잔에 아헤자르가 발끈했다.

[아니, 기본적으로 대화의 시작은 그렇게 말을 트며 호감도를 쌓아야 할 것이 아니냐! 시작부터 ‘당신, 아우라이던에 대해 뭔가 알지?’라고 접근하면 누구든 겁을 먹고 경계할 것이다!]

‘저런. 하지만 이것이 바로 명탐정의 방식인걸!’

셜록 봐라. ‘난 친구 같은 거 없어!’라며 마이웨이로 상대를 추궁하지 않는가?

‘나는 명탐정 하난. 상대의 동요를 놓치지 않지!’

마침 오마주의 낯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당황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역시 너무 많이 차용해서 썼나? 하지만 아우라이던의 세계관이 무척 매력적이라서…… 제가 시대물을 좋아하기도 해서 그 느낌으로 쓴 건데…….”

[호오! 우리 세계관이 매력적이었다니!]

아헤자르가 흡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빈도 눈썹을 치켜올렸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시네?’

하긴 조선왕조실록 차용해서 시대물 쓰듯이 아우라이던의 역사서 차용해서 시대물 쓰는 게 나쁜 건 아니었다.

단지 오마주가 놀란 건.

‘그 일 때문에 피데스 님의 동생이 곧바로 달려오다니. 역시 던전조사학이나 SPES의 중차대한 기밀과 맞닿았던 걸까?!’

그동안 오마주는 익명 경매장에서 사들인 아우라이던의 역사서 아이템들을 모아 ‘황길때’의 집필에 참고 자료로 확인해 왔다. 그녀가 비싼 돈으로 역사서 아이템을 살 때마다 같이 경매에 참여했던 던전역사연구학 대학원에서 앓는 소리를 냈었지만 말이다.

‘아, 안돼! 저 아이템 못 사면 저희 논문은 어떻게 씁니까?’

‘하지만 우린 연구비가 별로 없어서…….’

‘으아악! 문과 대학원에도 지원 좀 해 줘라아악!’

‘던전 역사학이라고 쌩문과 취급이라니 말이 되냐아악!’

‘던전 아이템도 연구와 관련된 건 국가 소유화시키는 법안이 빨리 발의되어야 하는데…….’

‘그거 헌터들 반대가 너무 거세서 통과 안 될걸? 일단 우리 은퇴할 때까지는 안 될 거다.’

‘으윽, 아우라이던 논문 주제는 포기하고 그냥 제로브라는 새로 발견된 세계관이나 조사하는 게 어떨까요?’

‘오, 그게 그나마 트렌드긴 해. 제로브 연구하면 국가 지원 좀 나오려나?’

연구비가 없었던 대학원들이 깔끔하게 포기해 버린 덕분에 오마주는 손쉽게 역사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문제가 될 줄은 알았지.’

국가 연구에 쓰여야 할 정도의 아이템을 개인이 사용한다는 일에 나름의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던 오마주.

물론 현 사회에서 대부분의 헌터는 그런 일에 부채감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다. 좋은 아이템을 발견하면 대부분 개인이 사용하지, 대학에 기증한다거나 넘겨주어서 연구에 보탬이 되거나 하는 일은 미담으로 남길 만한 일이었다.

‘역시 내가 가진 역사서에 중요한 정보가 있는 건가.’

생각을 갈무리한 오마주가 입을 열었다. 이미 상대가 진짜 현하빈인지 집에 들일 때부터 여러 차례 확인도 했고, 출판사 측에서도 공인한 상태인 걸 보니 솔라리스의 채지세도 보증하는 사람. 그럼 이 정도는 믿고 말해도 되겠지.

오마주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성좌 ‘아헤자르’를 찾고 계신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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