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스포일러 (4)
“아,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 촉은 틀리지 않았다!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니까!]
“흐음,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하빈은 빼꼼 주위를 살피며 샤사삭 걸음을 재빨리 놀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경기도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현시우 그 녀석. 운 좋은 줄 알아라!”
하빈은 지금 피데스의 집무실에서 나와 한국에 온 참이었다. 현시우를 더 혼내 주고 싶었지만 그건 코니 님에게 새 무기를 의뢰한 다음에 제대로 하든가 해야 할 듯하고.
또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현시우가 그동안 하빈을 위해 애써 준 것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현시우가 날 생각해서 전부 다 본인이 했다고 말하고 다녔을 줄은 몰랐네.”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현시우는 그동안 현하빈이 50층과 울림국제고를 털었던 일들. 그걸 하빈의 행적이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일이라 덮어 주고 지나갔다.
그리고.
‘기만의 수호자 퀘스트가 나왔을 때도 적극적으로 막았다고 했었지.’
혹여나 그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이 나서서 먼저 처단하겠다고.
그 말을 듣던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음? 근데 생각해 보니 그건 현하빈 너를 지켰다기보단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지킨 것에 가깝지 않느냐?]
딱히 다 함께 덤벼도 현하빈이 다칠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랭커들이 다치면 다쳤지!
“엥, 그렇긴 하네?”
여러모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 현시우!
“그래도 내 힘숨 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니, 흠흠.”
아무리 이길 수 있다 해도 귀찮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매번 공격해 오는 놈들 상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터.
그동안 50층 공략이랑 던전 사태 막은 것들로 현하빈이 곤란을 겪지 않게 알아서 마무리했다는 점은 참작해 줄 만하다.
“아니지, 그럼 잠깐만.”
던전에 대해 떠올리던 현하빈이 순간 낯을 굳혔다.
“그럼 현시우 이 자식, 내가 ‘하난’인 척하던 것도 속으로 다 비웃고 있었을 거 아냐?!”
아이큐 187의 천재 명탐정, 지나가던 주민 하난으로 자신을 소개했던 하빈!
거기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기까지 했던 과거까지.
현시우는 대체 그 꼴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
뒤늦게 밀려오는 현타에 하빈의 귀 끝이 빨개졌다.
“아이씨! 진작 알려 줬어야 할 거 아냐! 그럼 내가 그딴 생쇼도 안 했지! 아오, 진짜 현시우 이걸 그냥!”
뒤늦게 떠오른 흑역사에 하빈이 허공에 발길질을 할 때였다.
[잠깐, 잠깐 우리 이럴 때가 아니다! 벌써 현관에 도착했잖느냐. 소리를 낮춰라.]
“……크흠.”
어느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한 하빈이 소리를 낮추었다. 동과 호수를 확인한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 맞겠지?”
[여기가 맞다! 내가 주소를 몇 번이고 확인했느니라!]
아헤자르는 흥분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가 바로 그 ‘황제를 길들이다 때려쳤습니다’의 작가 오마주 님의 집이다!]
“…….”
그랬다. 그들은 지금 ‘황제를 길들이다 때려쳤습니다’라는 소설의 원작자를 찾아 여기 왔다.
* * *
“……와, 살았다. 이대로 3회차로 넘어가는 줄 알았네.”
[진짜다. 난 사실 너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
‘……? 아니 제가 죽을 것 같으면 대책을 강구해야지, 왜 작별 인사부터 준비하시는 겁니까?’
[쏘리. 그치만 현하빈은 나도 못 이기는데 어떡하냐? 나라도 살아야지!]
“…….”
평화로운 피데스의 집무실.
현하빈에게 갈굼당하던 현시우는 다행히 중간에 보좌관이 들어온 덕분에 흐름을 끊을 수 있었다. 결국 하빈은 현시우를 갈구던 걸 미루고 본인 할 일을 해야 한다며 떠났다.
‘97층에서 채씨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을 거거든. 그래서 나도 이만 가 봐야 해. 97층에 초대해 놓은 애들도 좀 있고, 리베도 기다리고 있고!’
“……아마 나름대로 계획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어요.”
지세가 입을 열었다. 지세는 하빈이 ‘별의 서’라는 아이템을 찾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현시우 씨는 알고 있으신가요, 별의 서?”
“……!”
별의 서라는 단어에 현시우가 놀란 낯을 했다.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1회차 때도 현하빈이 모으던 건데.’
킬스크린과 던전을 넘나들며 여기저기 모으러 다녔던 현하빈. 그러나 일이 잘 안 풀려 반절 정도만 모았다. 마이너 패치가 가져간 부분은 중간에 관리자가 직접 소멸시켰고. 그 말에 지세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뭔지 알고 계시나요?”
“……네.”
현시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시스템을 구성하는 설계도와도 같은 겁니다.”
1회차 때는 일부만 가지고 연구했다. 그때도 채지세가 암호 해독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해독했던 일부 정보를 가지고 시간을 되돌리는 아이템들을 만든 것 같던데.’
회귀 아이템도, 전하빈이 2회차로 트립한 아이템도. 모두 ‘별의 서’를 해독해서 그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다 더해서, 사도들의 치트 키를 몇 개 더 훔치고, 현하빈 특유의 오류 생성 능력까지 합한 희대의 아이템이었지.’
회상을 마친 현시우가 흘깃 자신의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사실 그래서 저도 모으고 있었습니다. 던전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라거나, 누군가 입수해 판매하는 것들은 모두 사두었죠. 남은 건 킬스크린에 있는 것과 마이너 패치가 가진 건데.”
“마이너 패치가 가지고 있는 분량은 하빈이가 털어온 것 같아요.”
“네? 그걸 언제 털었습니까?”
“종말교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걸 받아 해독하고 있었는데…….”
지세의 설명에 현시우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1회차 때는 찾지 못한 채 소실되었던 부분인데.’
그걸 이미 현하빈이 털었단다. 거기다 킬스크린에 있는 부분까지 지금 털어온다니.
‘이, 이러다간 다 모으겠는데?’
다른 조각들은 현시우가 다 모아뒀으니 말이다. 합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세 씨,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실은 저도 제가 입수한 분량을 보고 자체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코드는 해독이 가능합니다.”
‘사실은 회귀 전에 얻은 지식이지만.’
생고생을 해서 몇몇 코드의 의미를 알아냈었던 1회차의 채지세. 그때 어깨너머로 들은 게 있었기에 현시우 역시 시작부터 일부 코드는 해독이 가능했다.
“그걸 해독하셨다고요? 그 정도 분량으로요?”
물론 지세가 듣기에는 놀랄 발언이었다. 그렇게 적은 분량을 가지고도 벌써 일부를 해독했다고?
“……네. 맞는지는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요.”
[사실 네가 해독 안 한 건데 되게 입을 잘 터네?]
사실 이 정보는 1회차의 채지세가 해독한 거였지만. 그렇다고 회귀했다고 밝힐 수는 없으니 현시우는 모른 척 본인이 해독했다고 말하면서 정보를 줄 생각이었다.
현시우는 지세가 기다릴 틈을 주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별의 서’ 몇 장을 꺼냈다.
“음, 일단 여기 이 페이지 끝부분에 있는 부호가 ‘시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부분이 세미콜론(;) 역할이랑 비슷한데…….”
종이를 짚어 가며 술술 설명을 이어가는 현시우. 그 모습을 보던 지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현시우 씨.”
“네?”
“역시 천재 맞죠?”
“……아닙니다.”
* * *
하빈과 아헤자르가 오마주 작가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 체칼라다임 국왕이 말했던 대륙회담 말인데, 내가 읽던 소설에서도 그 부분이 나온다!]
‘황제를 길들이려다 때려쳤습니다’라는 소설. 거기서 대륙회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는 거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잖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있어?”
[그냥 소설이라고 하기엔 느낌이 다르다. 굉장히 사실적이고 탄탄한 고증이 돋보였다. 그러다 보니…….]
아헤자르는 반신반의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 작가가 아우라이던의 대륙회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아헤자르의 주장에 따르면 97층은 과거의 아우라이던을 그대로 재현했거나, 그 시대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당대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마주 작가의 작품 역시 딱 그 시점의 역사를 반영한 것 같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 분명 작가가 뭔가를 알고 있다니까!]
그러니 이왕 대륙회담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 미리 내용을 알고 가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웹소설 최고의 인기 클리셰! 바로 책빙의의 방식이라는 거다!]
‘이게 책빙의가 되네?’
역사서 읽고 간 뒤 역사에 뛰어들면 그게 책빙의 아님?
물론 하빈은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그냥 잘잘이가 설명해 주면 되잖아? 이미 읽었다며 그 소설!’
‘황제를 길들이려다 때려쳤습니다’. 줄여서 황.길.때.
‘황길때가 뭐야 황길때가. 줄임 단어 상태 봐라. 어감 왜 이래?’
[황길때는 명작이다! 함부로 욕하지 마라! 크흠, 흠! 물론 내가 읽은 부분으로 그게 커버가 되면 좋겠지마는, 그럴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은 미완결이니까!]
미완결!
그랬다. 문제는 황길때가 아직 끝이 안 났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하필 지금 올라온 회차가 딱 대륙회담 나오기 직전이란 것이지!]
그들이 필요한 건 대륙회담 정보인데 그 부분이 하필 연재가 안 되었다. 결국 그 다음 이야기를 들으려면 작가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왕 킬스크린을 나왔으니 한번 확인해 보고 가도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들은 오마주의 집까지 오게 되었다.
“으음, 지세 언니 덕분에 찾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현관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함부로 남의 주소 알아내서 방문하고 막 그러면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하빈은 채지세의 도움을 받았다.
‘출판사 이름 보니까 이번에 우리가 인수한 회사 중 하나인데? 연결해 줄까?’
그랬다. ‘오마주’ 작가가 소속된 출판사가 바로 채지세의 소유였던 것이다.
덕분에 하빈은 일일 담당자 역할로 찾아올 수 있었다. 심지어 집에 방문해도 된다고 약속까지 잡은 상태.
아헤자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외쳤다.
[빨리 초인종 눌러라! 약속을 잡았으니 괜찮지 않느냐!]
“후우. 그렇지만 원래 작가님들에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는걸. 뭐라고 말하지?”
끄응. 하빈은 곤란한 낯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경쾌한 초인종 소리 뒤에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빈은 크흠, 흠,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똑똑. 오마주 작가님 계신가요?”
‘아, 이다음에 뭐라 말해?’
하빈은 일단 손에 든 선물을 어필하기로 했다. 원래 남의 집에 갈 땐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던 현하빈.
“작가님! 군만두 가져왔어요. 문 좀 열어 보시죠!”
-히이익!
그녀의 말에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가 기겁했다.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앗, 역시 군만두는 별로인가?”
[그럼 물만두였어야 했나?]
“아니면 찐만두나 튀김 만두?”
하빈이 손에 든 만두 봉지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비바고 만두 맛있는데…….’
[냉동 만두라서 문제인 건가…….]
어쩌면 평범하게 휴지나 물티슈 같은 선물을 준비해야 했는지도.
[하지만 휴지는 집들이 선물이 아니냐?]
‘흠, 그런가? 하지만 자취 선물로도 인기 많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마, 만두는 이제 그만! 살려주세요. 저 이제 비축분 없어요……. 하지만 정말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마침 문 너머로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수가!]
그 말을 들은 아헤자르가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듯 외쳤다.
[비축분이 없다니! 그럼 연참의 희망이 없잖느냐!]
‘너는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한 거냐, 김잘잘?’
역시 이 상황에서 멀쩡한 건 나밖에 없다니까. 흠흠. 책임감을 느낀 하빈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오늘 일일 담당자를 맡은 천재 편집자 하난인데요!”
[언제는 명탐정 천재 주민 하난이라 하지 않았느냐?]
‘명탐정이 편집자도 겸직할 수 있지!’
그들이 한창 툭탁대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굳게 닫힌 현관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오마주 작가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지, 진짜 편집자님 맞으세요? 하지만…… 어?”
그때, 하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오마주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잠깐의 침묵 뒤에 오마주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 당신은! 그때 아헤자르……!”
“엥, 저는 아헤자르 아닌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천재 편집자 현하빈!”
아헤자르는 친구 이름이라니까 그러네.
인상을 찡그리는 하빈과 달리, 아헤자르는 무척 신이 나 외쳤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