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스포일러 (3)
“피데스가 현시우였다고?”
-게에엥!(교장이 대빵이었냐!)
한편, 마이너 패치 측에게 회의에 불참한다 통보하고 집무실에서 중계를 보고 있던 강태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사건건 자신을 견제하던 피데스. 언제나 뭔가 알고 있는 듯 그를 떠보고 감시하던 월드 랭킹 1위.
그의 정체가 현하빈의 오빠란다.
“…….”
‘게다가 기만의 수호자는 현하빈이고 말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현시우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사실인 모양.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가 아니었다면 저런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일단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게 더 안전했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았단 건-
현시우가 보기에도 기만의 수호자는 현하빈이었단 거다.
그게 더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 그동안 마이너 패치를 미친 듯이 잡았던 건가?’
현하빈의 적수가 될 것임을 간파하고.
어쩌면 관리자의 속셈까지도 모두 간파하고서.
하긴, 생각해 보면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마이너 패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몬스터를 잡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더 신경을 썼는데, 피데스만 예외였다.
‘몬스터만 잡을 게 아닙니다. 인간들 사이의 범죄도 중요하죠.’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초창기부터 마이너 패치를 때려잡던 피데스.
“설마 시작부터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이 상황을 모두 예측할 수 있다고? 마이너 패치가 시스템을 해킹하는 것과 ‘기만의 수호자’의 적이 될 거라는 것까지.
가히 예지에 가까운 능력.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지 능력자가 아니라니.’
관리자는 분명 그들의 앞에서 공인한 적 있었다. 피데스는 조사 결과 예지 능력이 없었다고.
-게엥, 게엥(뭘 멀뚱히 보고 있나? 교장이 대빵인 건 신기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이어지는 강태서의 생각을 끊은 건 까망이었다.
-겡겡겡!!(잊고 있나 본데, 인간아, 내게 츄르를 줄 시간이 벌써 지났다!)
책상 위에서 살랑 한 바퀴를 돈 까망이가 다가와서 뺨을 부벼댔다.
-게엥! 겡!(옛다, 애교가 부족해서 그랬던 거냐? 애교 정돈 해줄 테니 빨리 츄르 줘라.)
“…….”
-겡겡!(아니면 다음은 발톱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아라, 인간!)
‘배가 고픈가 보군.’
별수 없이 서랍에서 츄르를 꺼내 뜯으며 강태서는 힐끔 핸드폰을 살폈다. 그나마 까망이 덕분에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먼저 해야 할 건.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지?’
피데스? 현하빈?
아니면 마이너 패치?
피데스는 안 그래도 전부터 강태서에 대해 미묘한 관계를 이어왔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동료로. 그리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애매한데…….”
원래는 피데스가 강태서를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지금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번 마이너 패치 테러 사건으로 나를 추궁할 줄 알았는데.’
마이너 패치가 울림국제고와 SPES 본부를 테러했을 때. 강태서는 피데스에게 달려가서 알렸었다.
SPES 테러는 마이너 패치의 함정이라고.
그리고 그 직후 울림국제고가 던전에 집어삼켜지고 강태서는 사라졌으니, 평범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강태서를 의심할 만했다.
강태서가 어떻게 그 정보를 알았는지, 그들과 무슨 관계였는지. 왜 정보만 알려주고 정작 본인은 사라졌는지.
하지만 상황이 끝난 이후 피데스는 강태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묻지도, 감사를 표하지도,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칠 때마다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교장과 교사로서의 업무 지시만 했을 뿐.
강태서로서는 기꺼운 일이긴 했다. 혹여라도 피데스가 ‘그때 SPES 테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따위의 말을 섣불리 꺼냈다간, 관리자도 그 정보를 입수할 위험이 있다.
그럼 얄짤없이 강태서를 배신자로 의심할 수 있었다.
강태서는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고 저지른 짓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무모했어.’
그래서 강태서는 피데스를 마주칠 때마다 그가 뭐라도 말을 꺼내지 않을까 내심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가 이상하게 여길 발언이라도 뱉을까 봐.
그러나 피데스는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없었던 일처럼 굴었으니.
‘설마 이 모든 정황을 다 알았나?’
강태서가 섣불리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라는 걸?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냥 강태서가 어련히 알아서 정보통을 가지고 있었겠거니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는 건가.
게다가 그날 이후로 피데스는 강태서를 향해 굳이 날을 세우지도 않았다. 강태서로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꼭 마이너 패치의 시스템을 다 꿰뚫고 있는 작자 같았다.
던전의 배후에 마이너 패치가 있다는 것도 단번에 알아내고, 에라타의 기습 방송에도 당황하지 않고 증거를 모아 가져오기까지.
그럼 이번엔 이런 의문이 든다.
‘현하빈과는 이야기를 다 끝낸 건가?’
대체 어디부터 얼마나. 아니, 애초에 마이너 패치의 최대 적수가 현하빈의 가족이었다니.
“하…….”
정확히 말하면, 현시우는 강태서의 지인이기도 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현하빈과 같이 동네 도서관에 있을 때 몇 번 스쳤었다.
‘야, 현하빈. 공부하냐? 솔직히 안 하지?’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 있던 현하빈을 비웃으며 추궁하던 현시우.
‘아, 한다고! 뭔데 갑자기 시비야?’
현시우랑 말싸움을 하던 현하빈은 구석에서 책을 읽던 강태서를 휙 돌아보았다.
‘저기 내 친구 있으니까 증언 들어 봐! 야! 태서야! 너도 봤잖아! 나 공부하지?’
졸지에 증인으로 서게 된 강태서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네, 공부하던데요.’
‘이거 봐! 했다잖아! 태서는 거짓말 안 해!’
‘오, 언제 친구도 사귐? 그럼 거기, 현하빈 친구. 걱정 말고 솔직히 말해 봐. 현하빈 공부 안 하지?’
‘…….’
‘아, 한다니까! 이거 봐! 문제 푼 흔적!’
‘올, 진짜 했네.’
‘나 매일 도서관 오잖아! 내가 도서관 꽁으로 다니는 줄 알아?’
‘어. 소설 빌리러 오나 싶었지.’
‘아오, 진짜! 맨날 엄마한테 나 공부 안 한다고 모함하는 게 너지?’
말싸움을 하다 책으로 퍽퍽 서로를 치던 따뜻한 남매의 모습.
‘거기, 현하빈 친구. 우리 떡볶이 먹을 건데 너도 한 컵 먹을래?’
‘강태서, 이건 기회야! 무려 저 짠돌이 현시우…… 아아니, 우리 착한 오빠가 떡볶이를 산다고. 이런 기회 잘 안 오니까, 이때 뽕을 뽑아야 해!’
‘네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자주 못 사주는 거거든? 넌 꼭 내가 사줄 때만 많이 먹더라?’
‘헤헤. 원래 호적메이트가 끓여준 라면이랑 호적메이트가 쏜 음식이 제일 맛있는 법!’
‘그냥 취소할까 보다.’
‘아 이미 맘속으로 주문 다 했다고! 난 치즈떡볶이! 강태서 너도 치즈떡볶이?’
공부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엉겁결에 떡볶이 한 컵을 받아든 적이 있었다. 처음 누군가에게 얻어먹어 본 떡볶이였다.
그들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추운 겨울 홀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떡볶이를 든 손은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강태서는 떡볶이 한 컵을 빚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은 순간을, 가끔 날아오던 작은 관심을, 현하빈이 남겨주고 간 사탕 몇 개를, 빌려줬던 책 몇 권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이었다. 강태서의 노트북 화면이 지직거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지지직-지직-직-
‘……‘세 번째’인가?’
해킹에 도가 튼 세 번째는 급할 때 이런 식으로 개인 노트북으로 직접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강태서는 화면에 뜬 ‘비밀번호를 입력하십시오’ 알림에 암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세 번째’로부터 온 메시지가 떴다.
-혹시 아직 어느 편에 설까 고민 중이야?
“……?”
타닥타닥.
실시간으로 치는 것처럼 화면에 주르륵 나타나는 글자들.
-아, 아니다 말을 잘못했네. 너는 원래부터 한쪽 편이었으니까. 그렇지?
‘무슨 의미지?’
다른 사람도 아닌 세 번째가 갑자기 이런 메시지를 보낼 리가 없는데.
설마, 관리자의 명령과 다른 노선의 일을 했다는 걸 눈치채고 떠보는 건가?
강태서가 긴장한 낯으로 메시지를 살필 때였다.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메시지가 떴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마저 보낼게. 이게 바로 ‘세 번째’의 치트 코드야. 나머지 사도들 건 알아서 잘 챙겼지?
“……!”
치트 코드.
관리자가 각 사도들에게 제공해 준 ‘치트’를 쓸 수 있게 하는 각각의 키.
강태서 또한 자신의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키에 허락된 영역은 한정적이다. 그래서 태서는 틈날 때마다 다른 사도들의 코드를 노렸다.
지난 울림국제고 던전 사태 때도 미리 훔쳐놓은 ‘네 번째’의 키를 사용해 던전의 상태를 조작했었다.
……학생들에게 너무 위험하지는 않은 방향으로.
그 외에도 에라타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지금은 없는 일곱 번째의 키까지 틈틈이 챙겨왔다.
다만 ‘세 번째’는 워낙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이라 가장 얻기 힘들었다.
관리자에게 받은 키에 대한 정보. 그걸 자신의 노트북에 꼭꼭 숨겨 놓았는데, 튼튼한 보안 프로그램과 생체 보안까지 몇 겹으로 해둬서 손댈 엄두조차 못 했던 것.
그걸 이렇게 쉽게 내준다고?
화면을 응시하던 강태서는 상대를 향해 타닥타닥 답장했다.
-너, 세 번째 아니지?
-엇, 당연히 아니지!
“……?”
확실히 말투도 세 번째와 비교해 너무 다르다. 의문의 상대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치트 코드 메일로 보내놨다! 메일 여전히 똑같은 거 쓰지? 그럼 20000!
팟!
대답할 새도 없이 꺼져 버린 대화창.
그럼 20000……? 게다가 여전히 똑같은 메일을 쓰냐니?
“무슨 메일을 말하는 거지?”
혹시 함정은 아닐까.
강태서는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게이트 사태 이전에 만들어두었던 예전 메일이었다. 그 이후로 쓸 일이 없어 묵혀만 두고 있었던.
5년간 수없이 쌓여 있는 스팸 메일들 사이에서 방금 받은 메일이 푸른색으로 떴다.
제목: 잃어버리면 죽는다.
내용: 세 번째의 치트 코드. 내가 어? 이거 얻으려고 시간 얼마나 썼는지 알아? 모르겠지? 모르면 받고 잃어버리지나 마. 안 잃어버릴 자신이 어ㅃㅆ으면 외ㅇㅝ라 외워
“…….”
태서는 첨부 파일을 클릭하기 전, 발신인의 메일 주소를 보고 손을 멈췄다.
발신 주소는 현하빈의 옛날 주소였다.
* * *
피데스의 집무실.
“……21.4억이 표시될 수 있는 최대치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이야기 들은 적 있어.”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1회차 때, 현하빈에게서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최대 스탯 수치는 21.4억으로 표시되는 것 같다고.
“그럼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는 거네?”
“그렇지.”
최소 21.4억부터 시작하는 것일 뿐, 정확한 스탯 수치는 불명.
“어쩐지!”
하빈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쩐지 힘 조절하는 게 너무 어렵더라. 스탯이 2천이면 그 정도로 안 어려웠겠지. 그 이상이라서 그리 어려웠던 거 아냐?!”
사실 현하빈은 검색을 해가며 어느 정도 스탯일 때 얼마만큼 때려야 이 정도 대미지가 나는지 연구를 한 적도 있었다.
[힘을 숨기는 데 진심이었군…….]
“하, 그래서 이렇게 현시우를 때리는 게 힘든 거구나. 다음에 코니 할머니께 연락해서 안 죽게 때릴 수 있는 아이템 만들어 달라 하든지 해야겠어.”
하빈이 팔짱을 끼며 현시우를 쏘아보았다. 제대로 치고 싶었는데 힘 조절하느라 많이 봐줬다! 이래서 힘이 너무 세도 문제라니까.
“코니 님께…… 그런 걸 부탁한다고?”
더 강하게 때리는 게 아닌 약하게 때리는 아이템이라니!
그 이야길 들은 지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고문용 기구 중엔 안 죽고 고통만 주는 게 있을 수도 있겠구나.”
고문이라는 단어에 하빈이 귀를 쫑긋했다.
“앗, 아니면 크릭샤라도 불러서 물어볼까? 나보다 약하고 고문도 전문인 것 같았어!”
“그만, 그만! 지금 나 하나 때문에 마왕을 소환하겠다고? 무려 마왕을?”
“응? 사실 현시우 때문 말고도 몇 번 불렀는데. 이번에도 모여서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
“……?”
아이스크림 이야길 꺼낸 하빈이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앗, 그러고 보니 걔네 오라 해놓고 난 여기 와 있었네! 채씨는 잘 하고 있을까?”
* * *
-삐아아.
“…….”
“그, 그러니까 황금용의…… 오른팔님?”
하빈이 사라진 뒤, 리베와 채지석만 덩그러니 남겨진 방 안. 시종이 눈치를 보며 지석에게 물었다.
“그, 외람되오나 다른 한 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래도 갑자기 사라진 현하빈을 찾는 모양. 채지석은 하빈의 인사를 떠올렸다.
‘현시우 혼내주고 올게! 알아서 잘 둘러대 줘!’
“……다른 한 분요?”
뭐라고 설명하지?
‘오빠 패러 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채지석은 그 말을 좀 더 포장해 곱게 돌려 전달하기로 했다.
“용신의 왼팔, ‘빈’님은…… 다른 세계의 최강자를 처단하러 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