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스포일러 (2)
“이, 이럴 수가.”
마이너 패치 중에서도 ‘세 번째’ 사도의 충격은 특히 컸다. 그녀는 다른 사도들에 비해 정보 수집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사도였기에.
“……그래서 내가 ‘현시우’의 단서를 못 잡은 거였나.”
현하빈을 조사할 때, 그 혈육인 현시우는 일반인 치고 너무 깨끗하고 정보가 적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피데스의 정체도 오리무중이었는데…….”
그게 모두 동일인이었다니. 모든 게 딱딱 들어맞음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과연 피데스가 드러낸 정체가 맞기는 맞을까?’
혹시 마이너 패치를 엿 먹이기 위해 ‘현시우’를 섭외해서 쇼를 하는 건 아니겠지?
피데스는 뒤로 빠져 있고, 현시우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언론플레이를 했다던가.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허를 찔리다 못해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랭킹 1위의 정체, 그리고 기만의 수호자 정체. 그 둘이 남매란다!
게다가 피데스 그놈은 어찌나 약삭빠른지, 벌써 사람들의 반응을 호의적으로 탈바꿈하고 마이너 패치에게 새로운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바로 마이너 패치가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다는 가설!
“하.”
세 번째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은 비상 점검 기간이라 관리자님이랑 연락이 안 닿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여기 계셨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네 번째’처럼 모두 소멸에 처해졌을지도.
“돌아오시기 전에 뭐라도 수습을 해야 하는데.”
세 번째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렸다.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여론전이라도 잘 해내야 했다.
‘아이피를 조작하고 해킹을 해서라도 현남매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삭제하고 음모론을 다시 심어야겠지…….’
세 번째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순간이었다.
“저런, 일이 참 바쁜가 봐.”
“……?”
갑자기 텅 빈 작업실에 들리는 목소리. 갑작스레 느껴진 기척에 세 번째는 휙 고개를 돌렸다.
‘여긴 나 혼자밖에 없을 텐데?’
생중계는 에라타랑 다섯, 여섯 번째끼리 보라고 했다. ‘세 번째’는 따로 빠져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혹시 집중에 방해될지도 모르니 부하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고.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목소리가 들릴 일이 있나?
수많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마이너 패치의 비밀 아지트다. 피데스조차도 한 번도 침입에 성공한 적 없는.
그러나 그의 눈앞에 등장한 이는 누가 봐도 외부인이었다.
“안녕! 너한테는 롱 타임 노 씨를 못 하겠다. 그럴 기분이 안 나서.”
“……현, 하빈?”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세 번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동안 수도 없이 탐색했던 상대, 기만의 수호자. 방금까지 생중계로 확인한 피데스의 동생. 그러니 그 외형을 모를 리 없었다. 세 번째의 말에 상대가 입을 열었다.
“오, 맞긴 한데. 다들 헷갈려서 현하빈 말고 전하빈이라고 부르더라고. 혹시 전하빈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불러도 괜춘!”
“미친 건가?”
“누가?”
전하빈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오며 자신과 ‘세 번째’를 각각 가리켰다.
“나? 아니면 너?”
“…….”
세 번째는 입을 다물었다. 마이너 패치의 비밀기지에 홀로 잠입한 행각부터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만의 수호자’. 뭔가를 작정하고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꾸나?’
요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영상 자료를 뒤지며 밤샘 작업을 했던 세 번째. 그녀가 다크서클을 문지르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전하빈을 노려보았다.
하도 자주 떠올리던 인간이라 헛것이라도 보나.
그러나 이렇게 생생한 상대가 헛것이거나 환청일 리 없겠지. 포션을 마신 ‘세 번째’의 정신은 아직 멀쩡하다. 판단을 마친 그녀가 스킬을 장전했다.
“다, 다가오지 마.”
‘지금 이 상황을 모두에게 알려야 해. 기만의 수호자가 여기 침입했다고.’
그녀가 가진 통신 관련 스킬들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전하빈의 공격이 더 빨랐다.
“에헤이! 원군 요청은 안 되지!”
슈슉.
가히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의 시전 속도. ‘세 번째’는 손쓸 틈도 없이 스킬 방지 수갑이 채워진 채 꽁꽁 묶여 버렸다.
‘……!’
“괜히 다른 애들까지 부르면 곤란해! 내가 시간이 아주아주 부족해서.”
말을 마친 하빈은 ‘세 번째’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책상 위의 노트북으로 향하던 전하빈의 걸음이 잠시 우뚝 멈추었다.
“아, 생각해 보니 지문 등록은 네 걸로 되어있었지?”
“으읍!”
재갈과 수갑으로 묶인 ‘세 번째’의 손가락을 멋대로 가져가 노트북에 대는 전하빈.
“에휴, 1회차 때 이거 못 열어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가려. 그땐 네가 이미 죽고 없어서 못 열었지 뭐야? 심지어 관리자에게 소멸당한 거라 지문 따위 찾지도 못 했다구.”
“으읍! 읍! 으읍!”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미 죽고 없었다고? 관리자님에게 소멸당했었다고?
그러나 전하빈은 세 번째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하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호, 이번엔 열리네!”
-생체 정보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화면에 뜬 알림을 확인한 하빈이 씨익 웃었다. 그녀가 이리저리 노트북 안의 파일을 살폈다.
“으으! 읍!”
“쉬잇. 조용히 하라구. 어디 보자, 기밀 자료 저장공간이 어디 있었지? 1회차 때 지세 언니랑 머리 맞대고 열심히 연구했는데. 흐음……. 지문 빼고는 나머지 다 뚫어 뒀다고. 아! 여기 있다!”
타닥타닥.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전하빈. 그걸 보며 세 번째는 눈을 의심했다.
‘내 노트북을 저렇게 잘 다룰 수 있다고?’
운영체제부터 프로그램까지 모두 다 기존에 쓰는 것과는 다른 ‘세 번째’만의 스타일로 재편성한 노트북이었다. 웬만한 일반인들은 노트북을 입수했다 해도 어딜 어떻게 들어가는지 몰라서 한참을 헤맬 텐데, 하빈은 어찌 된 건지 몇 번이고 이 작업을 해보았다는 듯 능숙하게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오, 이건 뭐야? 여론 조작하려고 대기 타고 있었나 보네! 그럴 수는 없지! 삭제!”
“읍읍!!!”
“그리고… 오, 대박. 관리자가 준 권한 코드 목록이 여기 있잖아? 대박대박.”
“으으읍!”
‘아, 안 돼!’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세 번째. 하빈이 입수한 정보들은 세 번째가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그녀만의 기밀들이었다. 모든 걸 손쉽게 털어낸 하빈이 휘파람을 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아, 이제 이 나쁜 노트북은 없애 버려야겠지? 놔뒀다간 또 나쁜 일에 쓸 거잖아, 그치?”
‘내, 내 노트북!’
그동안 세 번째가 마이너 패치 활동을 하며 마련해 두었던 지식의 보고, 정보의 결정체. 그걸 하빈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올렸다. 세 번째는 그만 아찔해졌다.
‘어, 어떡하지?’
웬만한 공격에는 파괴되지 않도록 열심히 방비를 해놨지만 방금 본 하빈의 실력으로서는 노트북을 없애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럼…… 클라우드에 남은 거라도 나중에 백업을 하면, 어떻게든, 그러니까…….’
“걱정 마. 클라우드 파일까지 다 없앴거든!”
‘으아아아악!’
세 번째의 마지막 희망을 즈려밟으며 생긋 웃어준 전하빈이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그러자-
빠자자자자작-
노트북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하빈의 손 사이로 흘러내렸다. 세 번째가 경악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으읍! 읍! 읍읍!”
“에이, 가는 길에 손 씻어야겠네. 찝찝하게. 후, 후우!”
손에 묻은 먼지를 털기 위해 하빈은 태평하게 숨을 불었다. 탁탁 몸에 붙은 가루들도 다 털어낸 하빈이 여전히 묶인 ‘세 번째’를 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시간도 없는데 요 목격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무슨 좋은 생각 있는 사람? 발발이? 잘잘이?”
“…….”
‘누굴 부른 거지?’
발발이는 또 누구고 잘잘이는 또 누구람. 뒤따르는 고요한 정적에 전하빈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 맞다. 걔네는 여기 없지.”
둘 다 믿을 수 있는 존재에게 줘버렸네.
네아이바도, 아헤자르도.
어쩐지 쓸쓸한 낯을 한 하빈이 조용히 팔짱을 끼었다.
* * *
[사, 살려줘. 살려줘라,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한편, 현시우의 집무실.
현시우의 마력이 동나는 걸 확인한 네아이바가 간곡하게 하빈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하빈은 얄짤없다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한 대 남았다.”
“그거 맞으면 죽는다고 진짜로! 아니, 일단 아헤자르라도 내려놓고 말하던가!”
‘대체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는 건데!’
그때였다.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채지세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빈아, 다른 건 몰라도 실수로 피데스를 죽였다간 당장 신문 앞면에 실릴 거야. 전 세계 사람들이 너를 주목할걸.”
“앗, 그건 곤란하지.”
하빈은 들었던 손을 다시 스르륵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최소 징역인걸. 거기다 전 세계적인 현상 수배라니 끔찍하군!
고개를 절레 저은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하, 현시우는 대체 어쩌다 셀럽이 되어선.”
“내가 되고 싶어서 됐냐?”
“? 보니까 완전 즐기고 있던데? 공익광고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아주.”
“……큼, 크흠.”
“거기다, 어? 집도 아주 좋아요! 옷장 미어터지던데? 어? 내가 겨울날에 패딩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덜덜 떠는 동안 본인은 명품으로 온몸에 도배를 했다, 그지?”
“아, 아니 진짜 내가 잘못했다고! 잘못했다니까! 원하면 내 방에 있는 명품 패딩 다 너 줄게!”
“필요 없어! 이미 냉기 저항 21.4억이다!”
“미친!”
상상 그 이상의, 그야말로 충격적인 스탯 수치에 현시우는 입을 떡 벌렸다.
“거짓말이지? 아니 대체 사람 스탯이 어떻게 21억…….”
“21.4억?”
옆에서 듣고 있던 채지세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숫자도 아니고 21.4억이라니 굉장히 미묘하네요.”
말투를 보아서는 현시우도 들으라고 꺼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갑자기 달라진 대화 분위기에 현남매는 일단 말싸움을 멈추고 지세를 돌아보았다. 시우가 지세에게 물었다.
“뭐 떠오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음.”
갑자기 몰린 시선에 지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빈이가 딱히 부정하지 않는 걸 보아 저 수치는 아마 진실인 모양이네.’
애초에 그런 걸로 거짓말할 성격은 아니긴 하고 말이다. 물론 굉장히 높은 수치의 스탯이라 놀랍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보아 온 현하빈의 행각을 보면 오히려 그래서 납득이 되기도 하지.
생각을 갈무리한 지세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각 잡고 이야기하기엔 되게 별거 아니긴 한데. 그냥 떠오른 지식일 뿐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지세가 머릿속으로 숫자를 떠올렸다.
2,147,483,647
……약 21.4억.
“그게 32비트 시스템상 표현할 수 있는 최대 수치 숫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