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5) (205/268)

205. 스포일러 (1)

“언니! 힐 대기 타고 있어줘! 그럼 맞아도 안 죽겠지.”

“자, 잠깐! 윽!”

퍽.

기다렸다는 듯 명치를 가격하는 현하빈의 팔꿈치!

“끄, 으윽…….”

그걸 직격타로 맞은 현시우, 아니 공식 세계 랭킹 1위는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하빈이 어이없단 목소리로 외쳤다.

“엄살 부리지 마! 힘 조절했거든?! 개미눈물의 소금결정을 생각하면서 때렸다고!”

안 그래도 그동안 뭔가를 때려본 전적이 많았던 현하빈.

“이제 누구 안 죽을 정도 때리는 건 익숙해졌다니까!”

‘그걸 익숙해지면 어떡하란 거냐.’

[하긴, 현하빈이 전투를 좀 거쳐오긴 했어.]

매번 상대가 안 죽도록 열심히 힘 조절하며 싸웠던 그동안의 전투. 덕분에 현시우를 때려도 죽을 위험은 없도록 조절에 성공했나 보다.

물론 현시우로서는 어이가 없을 발언이었다.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냐?’

끄으으. 마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현시우에게, 채지세가 다가와 조용히 속닥였다.

“약속대로 힐 해드렸습니다.”

“…….”

“이러려고 그렇게 힐을 부탁하셨군요?”

하빈이가 알면 죽이러 올까 봐 그렇게 간곡하게 힐을 부탁한 건가. 채지세는 안쓰럽단 표정으로 현시우를 바라보았다. 현시우는 다급히 대답했다.

“저기, 절 그렇게 보실 거면 그 시간에 쟤 좀 말려 주시, 컥!”

짜악!

그 순간이었다. 예고도 없이 현하빈의 등짝 스매시가 내리꽂혔다.

“지금 한눈을 팔 때야? 그래서 그 사정이 뭔데? 빨리 설명하라구!”

“…….”

[야야, 살아있냐?]

네아이바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현시우를 불렀다. 하빈이 뒤늦게 입가에 손을 올렸다.

“엇, 너무 세게 했나?”

최대한 살살 때린 거였는데. 그만 각성 전의 분위기를 떠올리고 예전 습관이라도 나왔나?

대답 없는 시우의 반응에 하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지세가 덧붙였다.

“괜찮아. 내가 버프랑 힐 걸어드렸거든. 상태 보니까 체력 남아있어.”

‘쳇.’

“…….”

‘그걸 친절하게 알려주면 어떡하냐고.’

이대로 기절한 척이라도 하려던 현시우. 그는 곧이어 이어진 지세의 힐링 스킬에 강제로 체력이 충전되고 말았다.

안 죽는 건 다행인데 계속 정신이 멀쩡한 것도 할 짓은 아닌 듯하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현하빈도 심했나 싶어서 걱정할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꾀병은 물 건너간 모양. 현시우가 끄응 한숨을 쉬며 눈치를 살살 살피던 때였다. 지세가 하빈을 만류했다.

“그래도 하빈아, 혹시라도 오빠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 부족하면 언니가 대신 혼내줄게!”

“으음…….”

하빈이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또륵 굴렸다. 아직 배신감과 어이없음이 한가득 남아서 여전히 멱살을 붙잡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설명해!’라고 윽박질러도 모자랄 판이지만…….

가뜩이나 넘쳐나는 스탯 때문에 현시우가 진짜로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아니 월랭 1위라며? 왜 이렇게 약한 거야? 한 대 정도는 버텨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센 거거든!’

풀스윙으로 맞으면 죽는다고!

기가 찬 현시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다행히 옆에서 지세가 하빈을 붙잡고 말려 주었다.

“하빈아, 일단 여기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해. 딸기쿠키 꺼내줄게. 클로디드 크림이랑 생크림도.”

“저번에 집무실에서 먹은 그거야?”

“응. 맛있게 먹길래 챙겨 뒀지.”

“그런 거면 먹어야지! 안 그래도 97층 체칼라다임인가 뭔가 하는 나라는 디저트가 좀 약하더라고. 어찌나 생각나던지.”

하빈이 별수 없다는 듯 현시우에게서 한발 물러나 소파로 다가갔다. 그사이 현시우는 책상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네아이바가 속삭였다.

[역시 채지세, 힐이 나쁘지 않네.]

바로 일어나도 될 정도로 멀쩡하다. 역시 죽어가던 인간도 살린다는 세계 제일의 힐러라 그건가.

……섭외하길 잘했다.

현시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책상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로디바 초콜릿과 티라미수 카스테라떡.

“이것도 있다.”

현시우가 건네준 군것질거리를 본 하빈의 눈이 커졌다.

“헉, 뭐야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이거 왜 여기 있어? 현시우 의외로 뭘 좀 먹을 줄 아네?! 혹시 교장실에도 이거 구비해 놓고 있었어? 한번 털어볼걸.”

“…….”

‘진짜로 교장실을 털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잘못하면 더 일찍 들킬 뻔했군. 현시우는 섬뜩한 생각을 마저 갈무리했다. 마침 하빈은 딸기쿠키보다 로디바 초콜릿을 더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빈이 저 초콜릿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곁에 있던 채지세가 어쩐지 졌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현시우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가족이니까요. 그 정도는 잘 알죠.”

[저번 딸기 뷔페 때, 딸기 아니고 메론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서?]

“흠흠.”

이걸로 저번의 수모는 갚았다. 현시우는 헛기침을 하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마침내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누그러진 분위기.

‘이제 죽음의 위기는 넘긴 건가?’

그래도 옆에 채지세가 있고 보는 눈이 있으니 하빈도 선을 지키려는 모양이다. 지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삼자대면, 예전에 하빈이네 집에서도 했던 것 같은데.”

묘한 익숙함이 느껴지는 구도란 말이지.

완전히 동일한 구성의 동일한 세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채지세로서는 그게 꽤나 묘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렇게 엄청난 정보를 얻었는데 왜 자신한테 진작 알려주지 않았냐며 계약자를 추궁합니다!]

‘지석이한테 가 계셨잖아요.’

킬스크린 97층이라는 위험한 곳에 간다는 소리에 ‘가장 가까운 빛’은 채지석에게 딸려 보냈다. 그동안 채지세가 현시우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나중에 생중계로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 판단해서 굳이 성좌를 불러 확인시켜주진 않았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다시 봐도 신기하다며 현시우를 훑어봅니다!]

뒤늦게 알게 된 정체에 ‘가장 가까운 빛’도 기웃기웃 현시우를 살폈다. 하빈이 덧붙였다.

“반짝이가 본인도 꼭 따라오고 싶다고 난리였지 뭐야.”

“그럼 지석이는?”

“리베랑 같이 왕궁 지키고 있어.”

“왕궁……?”

의외의 단어에 채지세와 현시우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97층엔 왕궁이 있는 건가.

그러나 하빈은 그 의문을 해소하지 않고 현시우를 재촉했다.

“어쨌든 내 인내심이 마저 바닥나기 전에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대체 5년 동안 왜 그랬어?”

왜 그랬냐니.

‘그렇게 추궁당하기엔 나름 잘 살았는데.’

떳떳하게 살아온 랭킹 1위의 삶. 청렴하고 깨끗하게 SPES를 일구어왔다!

하지만 하빈이 추궁하는 건 그런 쪽이 아니겠지. 왜 본인한테 말도 없이 집을 내팽개쳐놓고(?) 랭킹 1위 해먹고 살았냐는 것일 터. 현시우는 준비해 놓았던 변명을 읊기로 했다.

“그건,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랭킹 1위의 가족이라 밝혀지면 나를 노리는 세력들이 너까지 위험하게 할 거라는 판단에.”

[잘하고 있다. 이게 바로 흔한 클리셰지!]

히어로의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는 놈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 그러니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는 히어로물 주인공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근데 전 세계에 말 안 하는 건 그렇다 쳐.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도 됐잖아?”

“그건…….”

“우리 집 빚 있는 것도 몰랐던 걸로 보아서는 별로 성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젠장.’

안 통하는군.

“게다가, 대체 누가 위험해지고 누가 누굴 지킨단 말이야? 상황 보니 내가 너보다 더 센 것도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

“어? 생각해 보니 더 이상하네. 사실 아헤자르 갖다 준 것부터 다 계획된 거 아님? 나를 굳이 울림국제고에 입학시키고 교장으로 왔었던 것도 엄청 수상하네?”

“그러게, 듣고 보니 그것도 수상하네?”

채지세까지 흐음, 하는 표정으로 현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된 현시우는 주춤했다.

“그러니까 이걸 다 설명하자면…….”

회귀한 것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아직 회귀한 건 말 못 한다고!’

정체 공개된 것만 해도 성장 중지 패널티 받았는데 회귀한 거 설명하면 여기서 얼마나 더 패널티 받으라고?

“몰라! 난 말 못 해! 나름 사정이 있었다고! 가족인데 그것도 이해 못 해주냐!”

결국 폭발한 현시우가 벌떡 일어나며 모르쇠를 시전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하빈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어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설명해 준다며! 설명 어디 갔어! 지금 죽고 싶다고 어필하는 거지?”

“너야말로 내 백 억 홀랑 잃어버려 놓고 할 말이야?”

“어엇?! 잃어버린 거 어케 알았어? 설마 뒷조사도 했냐? 어? 내 뒷조사했어?!”

“……!”

졸지에 뒷조사한 게 들킨 현시우. 흠칫 굳은 표정은 그야말로 고해성사나 다름없었다. 하빈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어어? 이것 봐라? 내 뒷조사도 했다네? 언니, 이거 어떻게 생각해?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사생활 침해 아냐?”

“사생활 침해지.”

중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채지세. 하빈은 아헤자르를 손바닥에 탁탁 치며 현시우를 향해 위협적인 태도로 몸을 기울였다.

“뭐야, 그동안 얼마나 해먹었어? 또 뭐 숨겼는지 바른대로 말해라.”

“해먹긴 뭘 해먹어! 난 깨끗하게 살았거든!”

“근데 어떻게 교장 된 건데? 선생님들 협박해서 교장 한 거 아님? 내가 힘들게 학교 다니는 거 교장 신분으로 비웃으면서 지켜본 거지?”

“다들 해달라고 부탁해서 한 건데 뭔 소리야! 그리고 너 학교 힘들게 안 다녔잖아! 땡땡이만 치고 교양과목만 들었으면서!”

“헉, 어떻게 알았지? 내 뒷조사를 뭐 얼마나 한 거야?!”

“선생님들이 떠드는 것만 들어도 알걸! 지세 씨도 알고 계셨죠?”

“……알긴 알았지만.”

지세는 황당하단 눈빛으로 현시우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표정 관리 엄청 잘하던 사람이 웬일이래.’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압도하던 그 카리스마 어디 갔어?

‘이걸 지석이가 안 봐서 다행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쌓아 왔던 피데스에 대한 이미지와 환상 다 와장창 깨졌겠네.

채지석 역시 공식 석상에서 존경하던 헌터를 피데스로 꼽았을 만큼 피데스의 이미지를 굳게 믿고 있던 녀석이었으니, 이 광경을 봤다면 충격받았을지도.

물론 그 와중에도 남매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오, 그럼 내가 백 억 뺏기고 개고생하는 거 알았으면서 다 알고 모른 척 지켜보고 있었단 거잖아! 아오!”

직접 때렸다간 현시우 죽을까 봐 테이블에 있는 과자를 집어서 휙휙 던지는 현하빈. 그마저도 일반인이 맞는다면 멍이 들 만큼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 나름 배려였다고! 나도 상황 봐서 도와주려 했다고! 그래도 덕분에 마이너 패치 털었잖아!”

마법으로 보호막 펼치면서도 입은 살아있는 현시우.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참 재미있는 집안이라며 팝콘을 집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