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데자뷰
그 시각.
충격에 빠진 이는 또 있었으니.
“언니 이제 더는 뭐 없다며! 아니라며!”
기숙사에 박혀 있던 현하빈의 룸메이트, 여서윤은 방음 장치를 켜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방금 보던 실시간 중계 화면을 보며 외쳤다.
“코니님 손녀 아니라면서 컨티뉴 연합의 지지는 어떻게 받은 거야?! 거, 거기다 피데스 님 여동생이었어!?”
방금 전 중계를 보던 여서윤은 현시우가 가면을 벗는 장면을 보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언니랑 닮은 사람이 등장했어!
거기다 아예 입을 열어 ‘제가 현하빈의 오빠입니다’ 따위의 소개를 했을 땐, 그냥 혼이 나간 표정으로 생중계를 봤더랬다.
‘피데스 님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아니 근데 피데스 님은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이셨잖아?
“그럼 하빈 언니는 학교 교장선생님의 동생이기도 했던 건데……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땡땡이치면서 다녀도 되었던 건가? 아니, 그래서 땡땡이치면서 다녔나?
“언니,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결국은 다시 비명으로 이어지는 반응. 여서윤은 몰려오는 아득함과 배신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번에 경호원들이 찾아와 기숙사와 학교를 뒤집어 놓았을 때, 하빈은 강태서와 그냥 친구 사이라고 했고, 채남매와는 그냥 집에 놀러 다니는 친한 지인이라고 설명했다. 컨티뉴의 코니 님은 펜팔 관계일 뿐이라고!
‘진짜 그거 말고는…… 더 없는 거지?’
‘응. 없어! 아니, 있었나? 내가 기억하기론 없을걸?’
분명 하빈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어느새 현하빈은 컨티뉴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고, 심지어 이번엔 월드 랭킹 1위의 숨겨진 여동생이란다!
“이, 이건 꿈일 거야…….”
사람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면 이 상황이 꿈인가 의심을 하게 된다. 여서윤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핸드폰을 켰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인터넷 반응은 어떤지.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도 다 뒤집어졌다.
<울림국제고 익명게시판>
제목: 내가 말했잔하!! 현하빈 피데스 동생 맞네!!!
사실 말해놓고도 다들 아니래서 글삭했지만 어쨌든 맞다고
└아니 이게 진짜네
└너도 글삭했잖앜ㅋㅋㅋㅋㅋㅋ
└ㅋㅋㅋ나 네가 쓴 글 봄
└아 성지순례할뻔했는데 글삭해서 아쉽겠다
└아무튼 성지순례합니다
└성지순례
└ㅅㅈㅅㄹ
└와 이게 찐이네
└???뭔소리임? 현하빈이 피데스님 동생이라고?
└윗댓은 폰도 안 보고 사냐
└ㅁㅊ 진짜네
└이왜진
학교 게시판만 뒤집어진 게 아니었다. 각종 헌터 관련 커뮤니티들은 죄다 아수라장이었다. 여서윤은 이리저리 인터넷 반응들을 살폈다. 지금 기말고사 공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반응의 대부분은 ‘현시우’에게 몰려 있었다.
제목: 실시간으로 정체 공개한 피데스.jpg
(사진)
└ㅁㅊ 피데스 한국인이었어?
└월랭 1, 2위 전부 한국인인거 실화냐
└역시 게임의 민족
└지금 그게 중요한게아님 피데스 존잘맞잖아! 존잘맞았다고!! 아닐 거라 우기던 놈들 어디갔냐!!
└아 윗댓;; 이제 피미잡거리는 애들 또 설치겠네....
└ㅋㅋ아무튼 피미잡
└피미잡
└ㅍㅁㅈ ㅍㅁㅈ
└솔직히 나 마이너패치한테 살면서 처음으로 고마움 느껴본다 덕분에 피데스 한국인인 것도 알았고 얼굴도 봤잖아....
└윗댓 아무리 그래도 마이너패치는 범죄집단임 범죄집단 옹호하지마셈
└그렇지만 피데스가 그동안 가면으로 가리고 살았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움
└피데스 얼굴이 세상을 구한다
└근데 찐으로 세상 구한 사람 아님?
└ㅋ맞네
겉보기에 화려한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진지한 분석글도 함께 올라왔다.
제목: 다들 지금 분위기에 너무 휩쓸려서 얼굴이나 외적인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나는 피데스가 그동안 가면으로 얼굴 가린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안 그랬으면 오히려 화제성 때문에 저평가되었을 인물임. 철저하게 익명으로 행동했던 지난날들이라서 더 빛을 보는 듯.
└ㅇㅇ 초창기에 월랭 1,2위가 전부 한국인이라고 밝혀졌다면 한국도 과하게 견제 받았을걸
└그걸 다 알고 그동안 가면으로 가리고 활동해왔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활동내역 보면 특히 그럼. 철저히 한국 편에만 설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정말로 ‘세상’을 구하려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발버둥친 흔적이 보임.
└근데 가족 건드리는 순간 본인 정체 드러날 거 감수하고 가면 벗은 것도 존멋인듯
└아ㅋㅋㅋ원래 히어로물 보면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마이너 패치가 멍청했음
└그동안 채지세랑 협력해서 마이너 패치 털 자료 다 모아왔다는것도 소름이네
└ㅇㅇ....마이너 패치가 시스템 해킹했다는거 충격임....
* * *
[효과가 굉장한걸.]
회의가 끝난 뒤, 인터넷 반응들을 살펴보던 네아이바가 흐뭇한 목소리로 평했다.
현시우의 충격적인 정체 공개로 인해, 사람들은 ‘기만의 수호자’가 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 인터넷에는 온통 현시우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로만 떠들썩했다.
덕분에 현하빈에 대해 퍼뜨렸던 마이너 패치의 음모론은 이미 저 멀리 묻혀 버린지 오래고, 현시우의 고백과 함께 밝혀진 ‘마이너 패치가 시스템을 해킹한다’라는 새로운 음모론이 훨씬 강력한 힘을 얻은 상황.
“자고로, 언론플레이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거죠.”
현시우가 소파에 앉으며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인물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솔직히 이런 쪽도 능하신 줄은 몰랐는데.”
채지세였다. 그녀가 팔짱을 끼며 핸드폰 상황을 마저 살폈다. 여론의 반응은 아직 현시우에게 꽤나 호의적이었다. 준비된 증거들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명분까지. 모두 납득과 호감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던 모양.
“이 정도면 따로 기사 작업 같은 거 할 필요도 없겠어요. 순조로운 방향으로 여론이 흘러가고 있네요.”
지세는 말을 마치고 현시우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았다.
‘대단한걸.’
올곧은 이미지의 피데스가 이렇게 판을 깔고 여론전을 하는 것에 능숙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현시우는 가면 벗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서는 거라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신의 한 수가 되었어.’
가면을 벗고 발언하는 현시우의 진중한 표정. 그게 오히려 이야기에 설득력과 호소력을 부여했다.
게다가 마지막에 카메라를 노려보며 가족을 건드린 마이너 패치에게 경고하는 마무리까지.
본래 지니고 있던 피데스 특유의 인간미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동안 피데스로서 보여주지 못했던 카리스마를 살렸다.
‘다시 돌이켜 보아도 완벽한 태도와 표정, 완급 조절이었지.’
물론 그 이면에 담긴 감정, 가족에 대한 걱정이 진심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분위기를 휘어잡는 감각이 타고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의외로 정치에 능한 인물일지도.
‘하긴, 애초에 이쪽 능력이 있었으니 그동안 SPES의 수장으로 활약했던 거겠지.’
뒤로 빠져 있는 척하면서 실상은 계산과 물밑 작업을 철저히 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역시 알면 알수록 무서운 인간이라니까.
현시우에 대한 감탄을 마친 채지세가 설핏 웃으며 현시우를 돌아보았다.
“다만 진상을 알면 다들 어이없어할 테지만요.”
“그건…… 그렇죠.”
현하빈을 건드렸다고 공개적으로 화냈다. 거기다 현하빈을 열심히 지키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기까지.
[하지만 실상은 현하빈이 더 세지…….]
누가 누구를 지킨담.
[현하빈이 들었으면 코웃음 쳤을걸?]
“코웃음만 쳤을까요? 일단 제 멱살부터 잡으려고 벼르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 맞네.]
뒤늦게 떠오르는 암담한 추측에 네아이바와 현시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자회견을 잘 끝냈는데도 이상하게 뒤가 찜찜한 게 참…….
“……설마 이거, 현하빈도 중계를 봤을까요?”
[에, 에이. 설마 봤겠어? 채지석이랑 같이 킬스크린 갔다며? 그럼 거기 공략하느라 정신없겠지!]
“그렇죠? 아직은 안 봤겠죠……?”
둘이서 행복 회로를 극한까지 돌리고 있을 때였다. 지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각엔 당연히 봤을 것 같은데요?”
“네? 왜죠?”
“하빈이는 던전 안에서 폰 보는 게 취미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와이파이도 만들어 줬는데.”
“…….”
[……아. 망했네?]
그게 있었지. 던전 안에서도 터지는 와이파이.
거기다 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현하빈의 성격까지 합하면.
“…….”
현시우는 문득 등 뒤로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다급히 채지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세 씨, 제가 부탁했던 것들 기억하고 계시죠?”
“부탁? 아, 포션이랑 힐링 말인가요? 포션은 아까 회의 시작 전에도 많이 드렸는데 더 필요한가요?”
“아뇨, 일단 힐링 대기 좀 해주시고, 더불어서 혹시 현하빈 오면…….”
‘좀 말려 주세요.’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말을 채 뱉기도 전에 그들 옆에 있던 창문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롱 타임 노 씨!”
“…….”
[…….]
경쾌한 인사와 함께 등장한 인물. 한 손에는 검집으로 잘 감싼 아헤자르를 야구 배트처럼 쥐고, 살벌한 미소를 짓는 얼굴까지.
‘현하빈이다.’
[전하빈 아니고 이번엔 진짜 현하빈이다!]
왜 저번과 똑같은 데자뷰를 또 겪어야 하는 건데!
억울할 틈도 없이 상황 판단을 빠르게 마친 현시우가 지세를 향해 문장을 완성했다.
“약속대로 제 동생 좀 말려 주시죠!”
“어허, 가면마법사, 아아니, 현시우. 도망가기엔 늦었어!”
하빈이 생긋 웃으며 건들건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헤자르가 한숨을 쉬었다.
[어째 저번에 교장실을 찾아올 때가 생각나는 느낌인데.]
교장실을 두드리며 ‘쾅쾅쾅! 어이 피씨! 당장 나와!’라며 일수꾼 흉내를 냈던 현하빈. 그에 비해 지금은 소리도 지르지 않고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지만.
‘그게 더 무섭거든!’
현시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현하빈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어느새 현시우의 멱살을 야무지게 틀어쥔 현하빈이 짤짤 그를 흔들었다.
“뭐어? 월랭 1위? 너 지난 5년 동안 이러고 살았어? 이러고 있었는데 나한테 말 한마디를 안 하고!”
“자, 잠깐. 잠깐 이거 좀 놓고 말하자. 내가 다 사정이 있어서!”
“사정? 사정은 개뿔!”
짤짤짤.
대답할 새도 없이 붙잡혀 앞, 뒤, 위, 아래로 탈탈 흔들리는 현시우. 그는 어쩔 수 없이 지난번에 썼던 방법을 또 쓰기로 했다.
“배, 백 억 원 더 줄까?”
‘백 억?’
그 광경을 보던 채지세는 생각했다.
‘설마, 저번에도 저런 식으로 하빈이에게 100억을 줬던 건가?’
갑자기 현시우에게 100억을 받아들고 부자가 되었다는 현하빈. 그 내막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하빈은 저번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필요 없어!”
“큭……!”
[돈으로도 먹히지 않다니, 큰일이다!]
네아이바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라도 어떻게든 현시우를 살려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잘 생각해라, 계약자의 동생아! 백 억이면 치킨이 몇 마리이며 건물이 몇 채인데!]
“뭐야? 이거 성좌야? 성좌가 왜 이렇게 속물이야? 너 치킨 먹어봤어?”
현시우를 흔들던 하빈이 이번엔 네아이바를 톡톡 발끝으로 쳤다.
[크윽……!]
정곡을 찔린 네아이바가 침음을 삼켰다.
사실 네아이바는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