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3) (203/268)

203. 어디서 들었는데 악당이 절대 하면 안 되는 한 가지가 용사의 가족을 건드리는 거라고…….

당장이라도 회의장으로 달려갈 기세의 현하빈. 그 모습을 보며 모두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잠깐만! 지금 당장 이동하기 전에 그, 피데스, 아니, 현시우 형님이 뭐라고 말씀하는지나 마저 들어보자.”

[그렇다! 얼굴만 같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느냐!]

“무언가 사정이 있었겠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회의 내용을 보고 가도 안 늦다고 외칩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손에 들고 있던 팝콘을 슬그머니 뒤로 숨깁니다.]

“허?”

파지직.

주변의 거센 만류에 하빈은 허공에서 빛나던 오류를 다시 손에 그러모았다.

‘하긴, 아직 진상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지.’

피데스의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이 현시우다.

그래서?

저쪽이 진짜 현시우인지, 어쩌다 보니 현시우의 얼굴을 닮은 놈인지 아직 모른다.

그리고 아무래도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본론인 모양. 괜히 중간에 끊었다가 중요한 정보를 놓칠 수도 있으니 일단 다 듣고 멱살을 잡아도 충분하다.

하빈은 화면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래. 가면 벗은 가면마법사가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보자. 채씨, 소리 키워 봐.”

“이거 최대 크기인데?”

“아잇 참. 이래서 블루투스 스피커 챙기고 다녀야 한다니까?”

하빈이 툴툴거리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인벤토리에서 쏙 꺼냈다.

* * *

[경고. 관리자가 경계하던 정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관리자가 플레이어의 신상을 파악했습니다!]

[관리자의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패널티를 계산 중입니다…….]

띠링, 띠링!

계속해서 뜨는 알림들. 그러나 현시우는 보이지 않는 척 무시했다. 지금은 생중계 상황이다. 절대 동요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패널티, 어느 정도나 될까?’

[‘전하빈’이 알려줬는데.]

‘그 말이 맞아야 할 텐데 말이죠.’

관리자가 ‘플레이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패널티는 계정 영구 정지.

‘하지만 아마 이번에는…….’

띠링!

[특수 상황! 비상 점검 기간입니다!]

[특수 상황! 일부 오류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관리자의 재시도가 이어집니다!]

[시스템 규정 위반! 플레이어에 대한 과도한 패널티 판정, 패널티 적용에 일부 실패합니다!]

[패널티 재산정…….]

[……패널티가 결정되었습니다.]

시끄럽게 뜨던 알림들이 마침내 검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현시우의 앞에 마침내 커다란 창이 떴다.

[관리자의 패널티, ‘성장 영구 중지’가 발휘됩니다!]

[현 시간부로 ‘현시우’의 레벨 성장이 중지됩니다!]

[현 시간부로 ‘현시우’의 스탯 성장이 잠금 처리됩니다!]

[현 시간부로 펫 공간 등 일부 시스템 사용이 잠금 처리됩니다!]

“…….”

역시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더 이상 레벨업을 할 수 없는 처지로 만들어 버리는 패널티.

‘근데 어쩌라고.’

이미 월랭 1위인데.

물론 강태서나 에라타가 따라잡을 가능성이 생기긴 했지만, 그동안 압도적인 격차를 벌려 놓았다. 이 정도면 못 해도 한 달은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현시우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안에 끝낸다.’

관리자는 실수한 것이다. 지금 현시우가 정체를 밝힌 시점에는 이미 레벨업을 안 해도 되겠다는 계산까지 포함한 것이었으니까. 속으로 미소를 짓던 현시우는 잠깐 흠칫했다.

‘그래도 이 레벨로는 역시 현하빈한테 안 아프게 맞기는 힘들겠죠?’

[어, 솔직히 그건 안 될 것 같다.]

“…….”

다른 이도 아닌 현자 네아이바의 판단이 저 모양이라니. 역시 포기해야 할지도.

* * *

“…….”

“……허어.”

한편. 침묵에 잠긴 회의장 안.

현시우가 가면을 벗은 직후, 현하빈 일행뿐만이 아닌 회의실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데스의 보좌관, 이곳에 참석한 각 국가 중요 인사들과 외교관, 기자들, 각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은 물론, 이걸 생중계로 지켜보던 실시간 인터넷 반응까지 모두 다 뒤집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사람들이 경악의 탄성을 흘렸다.

“……헉, 진짜 가면 벗은 거야?”

“아, 아니 이걸 이렇게 공개하셔도?”

“시, 시청자분들! 지금, 지금 이건 백 퍼센트 실시간 리얼 생중계입니다! 방금 피데스가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어…….”

찰칵! 찰칵!

미친 듯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그리고 황급히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자들의 떨리는 말소리, 웅성거림.

현시우는 그것들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소란이 멎자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이제 밝히겠습니다. 제 본명은 현시우입니다.”

“……!”

현시우.

그 이름에 몇몇 이들이 흠칫했다. 현하빈에 대해 취재했던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현하빈에게 남아있는 단 한 명의 혈육!

‘현하빈의 오빠 이름이 현시우 아니었나?’

‘그, 그러고 보니 생긴 게 닮았어.’

‘‘현’씨는 드문 성씨일 텐데…….’

당혹한 웅성거림 사이로 현시우는 확인사살을 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기만의 수호자로 지목된 ‘현하빈’은 제 친동생이죠.”

허억.

그 말에 입을 벌린 걸 다물지도 못하고 현시우를 멍하니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

“……!”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어떻게 된 겁니까? 두 분은 어떤 관계, 아, 아니. 가족이랬지만. 그러니까.”

계속되는 당황이 이어졌지만 현시우는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인해 섣불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편이 모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익명의 아이콘이었던 피데스. 무국적자에다 무소속이라는 그의 특별한 지위는 그 자체로서도 전 세계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혈연, 지연, 학연이 끼어들 틈도 없는 완전한 익명이자 늘 공정한 잣대를 고수했던 피데스의 이미지.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겠군요. 적어도 제 가족이 연루된 일인 이상, 여러분도 제 입장을 아셔야 하는 게 도리일 테니까요.”

이제껏 차분하게 입장을 말하던 현시우. 그가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현하빈을 죽이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마이너 패치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에라타가 제 가족을 건드리기 위해 갖다 붙인 언론플레이죠.”

“……그런!”

“그럴 수도…… 있겠군요!”

에라타의 방송 목적.

‘현하빈을 건드려 현시우를 나오게 했다.’

방금 공개된 현시우의 충격적인 정체, 그건 사람들에게 납득할 이유를 주기 충분했다.

“그럼 에라타가 방송을 한 이유는 현하빈을 건드려서 피데스 님이 가면을 벗도록 하려고?”

“악랄하군요!”

“……마이너 패치의 수법답군.”

‘사실 아니지만.’

[이게 언론플레이지.]

현시우와 네아이바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사실 에라타는 현시우의 정체를 상상도 못 했을 테다. 그럴 의도 따위 전혀 없었을걸?

‘그냥 기만의 수호자인 현하빈 매장하려고 움직인 모양이지만.’

현시우가 물타기를 하는 순간, 그건 ‘착한 랭킹 1위의 혈육을 인질로 잡고 가면을 벗기려 한’ 마이너 패치의 음모로 변모한다.

마침 웅성거리던 사람들 사이로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그, 그럼 ‘기만의 수호자’를 처치하라는 퀘스트는?”

‘걸렸다.’

현시우는 당연히 이 질문이 나올 거라 짐작했다. ‘기만의 수호자’는 뭐고, ‘기만의 수호자’를 처치하라는 퀘스트는 왜 나왔는가?

‘이참에 이것까지 이용해서 판을 키워볼까요?’

[가즈아!]

현시우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저 혼자만 알고 있으려 했던 정보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밝힐 수밖에 없겠군요.”

“뭡니까?”

무거운 말투. 정말 엄청난 정보가 나올 분위기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귀를 기울였다. 모두의 이목이 몰리도록 뜸을 들였던 현시우.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만의 수호자 처치 퀘스트, 그것 또한 마이너 패치의 짓입니다.”

“네? 퀘스트인데도요?”

“그렇습니다.”

현시우가 말을 이었다.

“제가 조사한 결과, 마이너 패치는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무슨!”

“시, 시스템에 개입한다고?”

“해킹이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네.”

현시우는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은 진짜니까 말이지.’

순수한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첨가했다. 관리자의 일곱 사도는 치트를 쓸 수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 그리고 그들이 기만의 수호자 퀘스트를 내렸다는 건 거짓.

“하지만 어떻게 시스템에 개입을…….”

“그게 가능합니까?”

문제는,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사람들의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점이다.

시스템을 해킹하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초유의 사태.

물론 초창기에는 ‘누군가 이 시스템을 해킹하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걱정이 빗발쳤고, 그걸 실제로 시도해 본 이들도 넘쳐났지만.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시스템의 안전성은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번에도 ‘비상 점검’이 터졌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허어…….”

[정작 비상 점검 사태 터뜨린 건 본인이면서 굉장히 잘 써먹는군?]

‘흠흠.’

현시우는 말을 이었다. 비상 점검 사태 외에도 끼워 맞출 수 있는 증거는 넘쳐난다.

“게다가 저번 울림국제고 사건도 있었죠. 인공적으로 제작한 던전. 그것의 소행도 마이너 패치라고 생각합니다.”

“……!”

“……일리가 있군요.”

계속되는 정황 증거에 점점 사람들이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에 종지부를 찍을 다른 사람의 한마디.

“저 또한 동의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채지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탁자 한쪽에 ‘솔라리스의 수장’으로서 참석해 있던 채지세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자료들을 꺼냈다.

“울림국제고의 겸임교사로서, 저 또한 이번 던전 사태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마이너 패치가 던전의 상황에 개입한 정황을 찾아냈습니다. 관련 자료를 모두에게 공유하겠습니다.”

채지세의 절묘한 화력지원.

이건 모두 회의 직전에 둘이서 말을 맞춰놓은 것이었다. 지세의 합류와 꺼내어진 증거들에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던전 사태의 배후에 역시 마이너 패치가 있었다고요?’

‘저렇게 증거를 내놓는 걸 보니 진짜인 모양인데.’

‘하긴, 그 당시도 마이너 패치의 테러와 맞물려서 사건이 일어났었죠.’

현시우도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네, 그리고 현재 조사 중인 ‘종말교 폐쇄 사건’에서도 관련 자료들을 찾았습니다. 마이너 패치가 시스템을 해킹하여 마약 주원료 꽃들을 효과적으로 개량해서 키워냈더군요.”

종말교의 지하에서 현하빈이 찾아냈던 마이너 패치의 비밀 장부. 그게 채지세의 손을 거쳐, 현시우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것도 증거자료로, 모두가 볼 수 있게 제출하겠습니다.”

“……!”

기밀 자료들이 눈앞에 턱턱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그 정보의 출처가 존경받던 월랭 1위 피데스와, 천재로 일컬어지는 채지세.

마침 SPES에서 종말교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도, 채지세가 울림국제고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들도 모두 딱딱 들어맞는다.

증거 하나 없는 범죄자 에라타의 말. 그리고 증거를 한가득 가져온, 언제나 신뢰받던 피데스.

이 구도에서 신빙성이 높은 쪽은 단연 피데스일 수밖에.

‘물론 이 와중에도 근거 없이 마이너 패치에게 동조하는 놈들이 있겠지만.’

이유 없이 음모론을 믿거나 무작정 까내리기 좋아하는 자들은 어딜 가든 있기 마련. 신경 안 쓴다.

“마이너 패치는 실수한 겁니다.”

현시우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쪽이 어떤 언론플레이를 하고, 해킹을 하든. 그리고 설사 여러분이 저를 믿지 못하신다 해도 상관없이 저는 하나뿐인 가족을 지킬 거거든요.”

그는 카메라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그러게 가족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 *

“……?”

“…….”

“……뭔.”

한편 그 시각.

실시간 생중계를 보고 있던 마이너 패치는 뒤집어졌다.

그중에서도 함께 생중계를 보고 있던 에라타,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에라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무슨 소리야? 쟤 현하빈이랑 가족이야? 쟤가 현시우라고?!”

“그, 그런가 본데요?”

“우린 몰랐는데? 왜 우리가 건드렸대? 아니 우린 몰랐다고! 쟤가 네 동생이었는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보다 저 장부가 왜 저기 있는 겁니까?”

마이너 패치의 기밀 장부! 종말교에 숨겨 둔 장부가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다니!

“환장하겠네.”

에라타는 입술을 짓씹었다.

“X발. 현하빈이 털어서 지 오빠한테 갖다 줬나 보지.”

진짜……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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