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2) (202/268)

202. 베일 너머 (4)

긴급 대책회의와 기자회견을 열기 전.

피데스와 채지세는 단둘이 먼저 만남을 가졌다.

현시우가 ‘데네브는 황도를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뒤에 바로 성사된 만남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죠.”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채지세가 물끄러미 현시우의 가면을 쳐다보았다. 다시 탁자 위의 장식으로 시선을 옮긴 지세.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현시우’에게만 알려준 문장을 당신이 알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이 셋 있는데요.”

“…….”

현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세가 이어 입을 열었다.

“첫째는 당신이 현시우에게 그 문장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 그리고 두 번째는 피데스 당신이 우리의 대화를 따로 입수했을 가능성.”

“…….”

“그렇지만 저는 현시우라는 분이 섣불리 당신에게 그런 정보를 드렸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정보 유출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 당신이 그날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가능성도 없고요.”

“그럼 세 번째 가설이 남겠네요.”

“그렇죠.”

잠깐 아래를 향했던 지세의 시선이 다시 위로 향했다. 가면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 선명한 시선으로 현시우를 응시하는 그녀.

“제가 생각한 세 번째 가설은, 두 사람이 동일인일 가능성입니다.”

지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피데스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전부터 의심했어요. 솔직히 현시우 씨가 잠적했던 시기와 당신이 나타난 시기가 꽤 절묘해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모로 제가 찾은 자잘한 정황들을 포함해, 당시 저랑 만났을 때의 습관과 분위기도…….”

기다렸다는 듯 네아이바가 현시우에게 속삭였다.

[야야, 역시 그때 내 말을 들었어야지!]

‘뭐가요?’

[그때 너무 피데스같이 행동했었다니까? 역시 코를 파든 발라당 눕든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

“죄송하지만.”

이어지는 네아이바와 지세의 설명을 잘라낸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 답을 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비록 마신에 의해 한번 까발려졌지만 이번에 또 정체를 전달하는 말을 하면 관리자의 패널티가 당장 한 번 더 작용할지도 모른다. 현시우는 대신 말을 최대한 돌려 완곡한 표현으로 전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역시 채지세라면 이 정도로 눈치챌 것 같았어.’

데네브는 황도를 지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현시우는 생각했다. 채지세의 성격상 이 문장을 아무에게나 알려 줄 사람이 아니라고.

채지세는 머리가 상당히 좋은 인물이다. 게다가 인맥 관리를 세심하게 하기로 정평이 난 사업가.

그럼 그 문장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 준 게 아닌, 사람별로 각자 다르게 해서 알려 주지 않았을까?

문장을 듣자마자 누군지 파악하고 대비하며, 동시에 선별해야 할 테니.

또한 투자와 정보전에 능한 데다 예지 능력까지 주 무기로 가진 채지세가 ‘현시우’와 ‘피데스’에 대해 그동안 조사를 안 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과 결정적인 키워드, 상황, 거기다 이렇게 현시우가 직접 비언어적 표현으로 찔러주는 힌트까지 합하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챌 거라 생각했지.’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상대에게 먼저 알아차리게 하는 방식.

어쩌면 지금이 점검 기간이고 관리자가 한눈을 파는 사이라 가능한 방법일지도. 마침 지세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겠군요.”

“원래 사람마다 개인사가 복잡하기 마련이니까요.”

“현하빈은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알게 되겠죠.”

“그 말은…….”

당장 다음 회의에서 정체를 밝힐 셈인가?

눈빛으로 묻는 지세의 반응에 현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걸 위해 도와주셔야 할 게 몇 가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이건 ‘피데스’로서 부탁하는 건가요?”

“아뇨. ‘데네브는 황도를 지나지 않는다’를 들은 사람으로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때 분명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당시 저 문장을 알려주던 채지세는 함께 이런 말을 했었다.

현하빈과 관계된 일은 돕겠으니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고.

그러니까 지금 피데스는 SPES의 수장이 아닌 현하빈의 오빠인 ‘현시우’로서 부탁하는 거다.

그걸 알아들은 채지세는 대답했다.

“좋아요. 일단 들어나 볼까요?”

* * *

“……그럼 채지세 씨, 지금 계획하고 있는 ‘세러데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 진행되셨습니까?”

“……네?”

시우의 물음에, 지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아니, 애초에 그 프로젝트 ‘이름’은 살면서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데.”

이준휘 비서나, 심지어 동생 채지석에게도 말하지 않은 프로젝트 명이다. 기록해 둔 적도 없다. 혼자 속으로 붙여 놓은 프로젝트 명을 꿰고 있다고?

‘대체 뭐야?’

하지만 현시우는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일단 명명은 하지 않아도 진행은 하고 계셨다는 거군요. 몇 퍼센트 했습니까?”

“……80.”

지세는 무슨 이런 사람이 있느냐는 듯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현시우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언제나 정의를 추구하던 피데스에 대한 존중심, 신뢰, 그리고 그의 정체인 ‘현하빈의 오빠’라는 관계까지 생각하면 협조 못 해줄 건 없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인데?’

정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깊이를 알 수 없다.

“세러데이 프로젝트, 어떻게 알았죠? 그것도 개인사? 혹시 예지 능력자라도 되나?”

“개인사입니다.”

“흐음.”

지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침 그들은 지세의 자택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앞서가던 지세가 몸을 돌려 현시우를 돌아보았다. 정체를 밝혔지만 아직 가면은 안 벗은 상태의 현시우. 그 가면을 흘긋댄 지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말이에요. 당신, 예지 아니라도 뭐 비슷한 거 갖고 있는 거죠? 아, 대답할 수 없는 처지라니 대답하라고 하진 않을게요. 대신 이것만 물어보죠.”

지세는 그동안 투자하면서 사사건건 자신과 투자 종목이 겹치던 ‘익명의 투자자’를 떠올렸다. 돈 될 것만 기가 막히게 치고 빠지던 투자자. 혹시 예지 능력자가 한 명 더 있는 거 아닌가 의심했었던.

“그 투자자 ‘Unknown’으로 활동한 거, 혹시 그쪽이었어요?”

“……?”

‘맞긴 한데.’

어차피 그 부분은 알려 줘도 손해는 아니다. 회귀 사실을 밝히는 것도 아니니 뭐. 현시우는 가볍게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하? 세상에!”

지세가 감탄인지 헛웃음일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그 천재 투자자가 이 사람이라고?’

채지세는 씨익 웃으며 현시우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피데스 씨 생각보다 더 무서운 분이셨네?”

현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맞받아쳤다.

“글쎄요? 지세 씨도 집 지하에 로봇군단 숨겨 놓고 계시면서. 이거 밝혀지면 일단 각국의 수뇌부들이 죄다 뒤집어질 걸요?”

곧바로 여유롭게 대꾸하는 모습에 지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마디를 안 지시네요? 흠, 이런 점은 하빈이랑 조금 닮으시긴 했군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항상 저희 남매에게 어디 가서 지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뭐, 다른 의미긴 하다만 어딜 가도 절대 지지 않을 남매이긴 하지.]

그게 힘으로 안 진다는 뜻이지만 말이다.

네아이바가 깊이 공감한다는 투로 덧붙였다.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누가 더 무서운지 떠들려면 끝도 없겠지만, 일단 시간이 없으니 이어 설명하죠. 세러데이 프로젝트, 그거 80퍼센트 완성되었다면 나머지 20퍼센트 완성에 도움을 줄 정보를 제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음.”

현시우는 머리를 굴렸다. 사실 여기 왔을 때부터 받아낼 대가 목록쯤이야 다 생각해 놨지만. 그중에서 좀 중요한 건.

“나중에 현하빈한테 말 좀 잘 해줬으면 하는데…….”

“……?”

“크흠, 아닙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마저 나누죠.”

굳은 표정의 현시우가 지하실로 향하며 덧붙였다.

* * *

그렇게 채지세와의 논의를 끝내고 회의장에 도착한 현시우.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한 것이다.

“…….”

[…….]

-…….

“……와.”

가면 밑으로 드러난 현시우의 얼굴. 그걸 보고 침묵에 잠긴 현하빈과 그 일행들.

“음! 그러니까……!”

“…….”

화면을 보며 인상을 찡그린 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거 역시 CG인가? 요즘 기술 많이 좋아졌다!”

[디, 딥페이크? 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딥페이크라는 기술이 생겼다 들었다!]

“호오, 김잘잘. 딥페이크도 알아? 많이 컸네?”

감탄을 흘린 하빈이 상큼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딥페이크인가 봐!”

“자, 잠깐. 지금 현실 부정할 때가 아니거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현하빈, 나도 정말 혼란스럽지만 이거 CG 아니고 딥페이크도 아니야. 꿈 아니고 진짜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거…… 맞아!”

“흐음, 혹여나 채씨가 지금 나 놀리려고 CG 수작 부리는 거 아니고?”

“나야말로 지금 이게 뭔지 모르겠거든?!”

역시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지석이 화면을 보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너, 이분 얼굴이 현시우라고 했지?”

현시우. 비록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하빈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은 하빈의 오빠 이름이다. 그 정도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채지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내가 존경하던 분이 그러니까, 그 피데스 형님이, 그러니까……!”

현하빈이랑 가족이라고?

“둘이 너무 안 닮…… 아니, 정말 상상도 못 했……!”

“뭐야? 채씨 방금 뭐랬어?”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어쩐지! 어쩐지 저번에 현하빈네 집에 갔을 때 너무 수상했다며 이제야 진상을 알았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고 보니 ‘가장 가까운 빛’은 예전에 채지세와 함께 현시우를 살펴본 적이 있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어떻게 남매가 쌍으로 다 해먹을 수 있냐며 현씨 집안의 유전자 구성에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채지석이 아는 가장 강한 인간 두 명이 가족이란다. 그것도 남매.

“그럼 그분이 100억을 아무렇지 않게 줬던 것도…….”

피데스한테 100억쯤이야, 동생한테 그 정도 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야 착착 맞아떨어짐을 느끼며 채지석이 인상을 찡그릴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 역시 안 되겠어.”

채지석의 폰을 두드리며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던 하빈. 그로 인해 이 상황이 진짜 실시간 라이브라는 점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정작 현하빈의 폰은 추적이 될까 봐 켜지 못한다. 그 말은 현시우든 누구에게든 당장 연락을 넣을 수도 없단 이야기.

“내가 이걸 이대로 손 놓고 봐야 한다고? 킬스크린 97층에서?”

그럴 수야 없지.

하빈은 뚜둑, 뚜둑 손을 풀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97층은 하루 컷 못 하지만…… 혈육 멱살 잡는 건 하루 컷 된다 이거지.”

“야, 너 뭐 하려고? 설마……!”

지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빈은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파지직! 하고 허공에 오류가 생겼다.

“용신교고 나발이고, 잠시 현시우 잡으러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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