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1) (201/268)

201. 베일 너머 (3)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니?”

관리자의 일곱 사도가 모이던 회의장. 이젠 다섯 명밖에 없는 곳에서 살벌한 말싸움이 오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건 강태서였다. 그가 에라타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번 ‘기만의 수호자’에 대한 선전포고 방송. 그걸 말도 없이 진행하다니.”

그랬다. ‘현하빈’에 대해 마구 떠든 방송은 에라타 홀로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 추궁에 에라타는 코웃음을 쳤다.

“흠, 그거 이상하네? 내가 언제 너한테 일일이 허락 맡고 방송을 했나?”

“그래도 이건 문제가 다르지. 상의가 필요했어.”

“하, 상의? 우리가 원래 상의를 하는 친근한 사이였던가?”

“우리의 관계가 어떠했든, 그 정도의 일을 말도 없이 진행하는 건 과했다.”

강태서의 지적에 에라타는 흐응, 하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깍지를 꼈다.

“그건 네 전략적 판단이야? 아니면…….”

그녀가 강태서의 표정을 탐색하듯 훑으며 입을 열었다.

“‘현하빈’ 과의 친분으로 인한 개인적 사심인가?”

“…….”

강태서는 반응 없이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에라타를 쳐다보았다. 에라타도 역시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전부터 거슬렸단 말이지. 혼자 그런 거물을 가까이에 둬 놓고 모른 척 입을 싹 닦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 자격지심으로 망상한 게 아니고?”

“자격지심? 허, 말 같은 소릴 해야지. 너랑 현하빈,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으면서. 심지어 이번엔 학교에 파견되어 있었는데도 그 애에 대해 아는 게 없다니, 말이 돼? 그럼 나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뿐 아니겠어?”

에라타가 느릿하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손가락 두 개를 쫙 폈다.

“일부러거나. 무능하거나.”

“…….”

강태서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비웃는 낯을 한 그가 에라타를 향해 받아쳤다.

“아니, 네 결론은 어디까지나 ‘기만의 수호자’가 현하빈일 경우에만 성립하는 이야기지.”

그랬다. 에라타는 시종일관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임을 확신하는 태도로 임하고 있었다.

‘대체 뭘 보고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라타는 아직 자신이 찾은 영상 자료를 ‘세 번째’를 제외한 사도들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강태서는 흘깃 다른 사도들의 표정을 살폈다. ‘세 번째’는 에라타의 말에 동의하는 듯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보긴 한 모양인데…….’

냉정하고 현실적인 타입인 세 번째. 그녀가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아닌 경우에는 거짓 선전포고나 날린 꼴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그건 누가 봐도 악수가 된다.”

“……저 말도 맞긴 하지요.”

조용히 말싸움을 지켜보던 여섯 번째가 끼어들었다. 그 역시 에라타와 세 번째의 자료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에라타 님이 갑자기 뜬금없이 한국의 여자애를 지목한 게 의아하긴 했습니다. 저희한테 상의도 없이.”

“뭐, 내가 조금 빠르게 행동했던 건 인정해.”

여섯 번째까지 몰아붙이자 에라타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건 원래 선공이 답이라고. 내가 일부러 안 알려준 게 아니라니까? 상대가 알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려고 재빨리 행동한 거지.”

“우리한테 상의도 없이 말이지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라는 말도 있잖아?”

에라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아군 중에서도 못 믿을 놈이 있을지 모르니까.”

“…….”

“이야, 지금 우릴 의심하는 거야?”

이제껏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건들건들 앉아있던 다섯 번째가 불쾌한 낯을 했다. 에라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흥, 난 그저 속도전을 위해 총대를 멘 것뿐이야. 솔직히 우리가 선전포고 날려서 손해 볼 게 뭐가 있어? 까놓고 말해서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가 아니면 뭐? 아니어도 우린 손해 볼 게 없어.”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가 아니라면? 무고한 시민인데 피해를 본 거라면?

솔직히 마이너 패치가 알 바 아니지 않는가?

“유치하게 왜 이래. 우리 개X끼들인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럼 그냥 믿은 놈들이 바보인 거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음을 지은 에라타가 강태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캉. 너는 너무 우유부단하니까. 매번 ‘확실하지 않은데 나서는 건 위험하다’ 따위의 말로 비겁하게 발을 빼잖아?”

“그리고 결국엔 내가 맞았지. 무모하게 발을 들였다가 피데스에게 깨지는 건 네 쪽이었으니.”

“……말 다 했어?” 

“워워, 둘 다 진정하세요. 우리끼리 이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여섯 번째가 손을 내저어 둘을 말렸다.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기울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에라타 님도 참. 솔직히 첫 번째 입장에서도 화날 일인 건 맞아요. 지금 갑자기 일어난 선전포고 때문에 울림국제고가 한바탕 뒤집어졌다던데.”

듣고 있던 다섯 번째 사도도 낄낄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그래. 요즘 그것 때문에 첫 번째도 야근하느라 바쁘다며? 교사 노릇 하기도 빡치는데 말도 없이 근무지에 폭탄을 던진 거나 다름없잖아.”

강태서는 일부러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날름 탑승했다.

“그래. 그 부분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 근무지와 관련된 것이니 기본적인 상도덕은 지켰어야지.”

“……흠, 그 일은 조금 성급했긴 하네.”

에라타가 별수 없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에라타는 그걸 생각해도 강태서에게 먼저 정보를 주진 않았을 거다. 애초에 일을 먼저 친 이유는, 믿을 수 없는 강태서에게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으니.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여섯 번째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현하빈 그 녀석은 뭐죠? 컨티뉴와 솔라리스의 비호를 받고 있다니.”

“게다가 소재 파악도 전혀 되지 않고 말이지.”

세 번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덧붙였다. 다섯 번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 번째가 못 찾을 정도라고? 그게 말이 되나? 역시 수상한 인물일 만하네. 첫 번째, 넌 같은 학교인데 뭐 아는 게 없나?”

“나도 모른다. 세 번째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아.”

“……그렇긴 하지.”

여전히 탐색하는 눈빛으로 강태서를 살피는 에라타가 느리게 대답했다. 다섯째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하하, 첫 번째 선생은 야근이나 열심히 하라 해. 우린 SPES가 어떻게 나올지나 지켜보자고.”

과연 그들이 잡은 건 거물일까 쭉정이일까. 다섯 번째는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강태서는 조용히 자료 화면에 뜬 현하빈의 프로필을 흘긋 쳐다보았다.

‘진짜로 어디 있는 거야.’

이렇게 모두가 뒤집어진 와중. 현하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 * *

-삐아아아!

“오오! 이것이 바로 용의 불꽃!”

“어허, 손대면 안 돼요.”

“넵.”

리베의 불꽃 쇼에 경탄하는 국왕과 대신,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하빈은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삐아, 삐아아!

리베는 이 불꽃을 위해 꾹 참고 욥떡을 삼킨 상태였다. 리베의 눈에 퐁퐁 눈물이 솟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헉, 요, 용의 눈물!”

“용의 불꽃과 눈물을 동시에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경악하는 반응 사이에서 하빈은 몰래 등 뒤로 콜피스를 챙겼다.

‘에효, 우리 리베. 고생이 많아.’

많이 매웠나 보다.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면.

‘얼른 정리하고 데려가서 콜피스 먹여야겠어!’

작은 불꽃의 대가가 너무 강력하다. 나중에 달래 주고 마계에 대한 정보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륙회담이 어떤 것인지, 거기에 참여할 것인지.

‘방으로 돌아가면 채씨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 * *

“오구오구, 우리 리베. 많이 매웠지?”

-삐아…….

쪼록 콜피스를 빨며 눈물을 마저 훔치는 리베.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그들은 오랫동안 왕과 대신들에게 붙들려 있어야 했다. 용의 가호를 내려달라고 성물을 줄줄이 건네지를 않나, 심지어 리베의 불꽃이 닿자 성물들이 빛을 내기까지 했다.

‘오오, 전설로만 전해지던 성물이 실제로 작동하다니!’

대부분 별 효과는 없고 화려한 빛을 뿜는 장식용의 효과만 가득한 성물들이었다는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그 정도만으로 리베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데는 차고도 남았다.

그동안 하빈과 지석은 대륙회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질문하느라 진이 빠지는 시간을 보냈다. 하빈은 툴툴거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러다 곧 저녁 먹겠네! 하루 컷으로 97층 털려고 했는데, 아쉽다.”

물론 ‘별의 서’를 제대로 얻으려면 대륙회담에 참석해야 할 테니 그때까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마계에서 찾아올 이프시네-크릭샤-글리치와도 접선하는 일이 남았으니, 하루 컷 공략은 물 건너가긴 했지만.

하빈이 입을 비죽 내밀 때였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던 지석이 핸드폰을 켜며 물었다.

“현하빈, 핸드폰 확인했어?”

“아, 맞다.”

이곳 사람들을 상대할 땐 핸드폰을 꺼 놓는 게 하빈의 습관이었다.

‘매너 모드 해야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핸드폰 연락이 울리면 어떻게 둘러댈 것인가? 새로운 아티팩트라고?

그러기엔 중세풍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며 느낄 의심과 두려움이 보통이 아닐 텐데?

그런고로 하빈은 방금까지 핸드폰을 꺼 놓았던 상황.

‘음, 밀린 연락을 확인해 봐야겠네.’

마침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하빈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던 때였다.

“잠시만! 폰 켜지 말아 봐!”

먼저 자신의 폰을 보고 있던 채지석. 그가 손을 뻗어 하빈의 행동을 저지했다.

“왜?”

“지금 너…… 추적당하고 있을 수도 있어.”

“엥? 추적?”

지석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화면이 제대로 보이도록 하빈을 향해 자신의 폰을 보여주었다. 폰에 뜬 건 뉴스 기사 헤드라인과 SNS 글들이었다.

-‘기만의 수호자’, 울림국제고에 재학 중인 현하빈으로 밝혀져!

[뭐, 무슨?!]

“……!”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하루아침에 그게 다 뽀록났다고? 대체 누가?! 왜?!

“……마이너 패치 측에서 공개적으로 방송을 했대.”

“이런 말린 멸치들이! 기어코!”

하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조용히 살고 있는 선량한 힘숨찐에게 이게 무슨 짓이지?

[사실 별로 그리 조용하게 살지는 않았…….]

“뭐? 김잘잘, 너 누구 편이야? 조용히 하지 못해? 내 이 멸린 말치들을 진작 싹을 말려 놨어야 했는데! 이놈들을 그냥!”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로 벌떡 소파에서 일어난 현하빈. 그걸 본 지석이 만류하듯 하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 잠시만! 일단 상황을 더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지금 피데스 님이 여기에 대해 긴급대책회의 겸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고 했거든. 지금쯤 방송 중인 것 같은데…….”

“가면마법사가 여기에 대고 기자회견을 한다고?”

“어, 뭔가 수습을 해보려는 모양인데…… 아, 여기 있다. 한창 방송하던 도중이었나 봐!”

재빠르게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는 채지석. 그 말에 하빈은 고개를 돌려 화면을 쳐다보았다.

‘하긴 가면마법사라면 이번에도 도움이 될지 몰라.’

저번에도 50층 공략 사건을 본인 일이라고 묻고 넘어갔던 피데스. 게다가 학교 게이트 사건도 조용히 묻고 넘어갔던 전적이 있다.

여러모로 하빈의 힘숨 생활에 크나큰 공헌을 했던 그. 이번에는 과연 어떤 스탠스를 취할까? 그의 반응에 따라 어쩌면 이번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빈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화면을 보았다. 마침 피데스의 기자회견은 한창 뮤튜브로 실시간 중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 늦게 시청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제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먼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화면 속의 피데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백? 무슨 고백이지?”

하빈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50층 공략은 본인이 하지 않았다거나, 학교에서 활약한 것도 천재 주민 하난이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꺼낼 셈인가?

하지만 하빈의 예상은 빗나갔다. 말을 맺은 피데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손을 움직였다.

“……!”

얼굴 위로 올라간 손. 손이 움켜잡은 것은 피데스의 본인의 가면이었다. 근 5년간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설마.

추측이 채 닿기도 전에 피데스가 먼저 손을 움직였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피데스는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본인의 가면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허?”

[……! 이, 이게 무슨!]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 얼굴 안다고, 이 얼굴을! 안다고 외치며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합니다……!]

하.

현하빈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5년간 연락 하나 없이 실종되었던.

허구한 날마다 사라지는 혈육, 그러니까…….

“……현시우잖아.”

익숙한 낯짝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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